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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부전족운동(不纏足運動)"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무술변법(戊戌變法)은 사람들에게 강유위, 양계초가 요란하게 벌인 일을 떠올린다. 여기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볼 때는 별 것이 아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술변법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근대화 정치개혁이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참패한후의 중국은 강산이 찢기고,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 처음 정치무대에 등장한 유신파 지사들은 해야할 일이 아주 많았다. 사상계몽에서부터 제도개혁까지. 부국강병부터 과거개혁까지, 큰 일 중요한 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도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 화급한 시기에 유신파인사들이 열중한 일은 정치변법외에 부녀의 '부전족'이었다.

 

'부전족운동'은 유신운동기간중 유일하게 활발했던 사회개량운동이다. 운동기간에, 전국에서 모두 백개에 가까운 각양각색의 학회가 나타났지만 그 어느 것도 '부전족회'처럼 세력을 떨치고 오래가지 못했다. 강유위가 세상에 나와서 한 첫번째 '유신사업'은 바로 '부전족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비록 서양의 지혜를 가져왔다고 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여인의 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알 수 있다. 양계초는 <시무보>를 주재했는데, '부전족운동'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시무보>의 인기가 높아서 낙양의 종잇값을 올릴 때, 그 비싼 지면에 '부전족'에 관한 글이 자주 실렸다. 개명한 사대부들은 봉강대리(장지동)부터 수재, 동생(童生)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거의 모두 '부전족'을 반드시 해야하는 중요한 일로 여기는 것같았다. 어떤 동생은 심지어 자신의 과거시험답안지에 '부전족회'라는 글을 붙이기도 했다. 시험볼 때조차도 여인의 발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전족운동'을 발기하고 참가한 건장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시대를 앞선 남자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부녀해방운동'은 남성위주이다. 이들 남자들의 눈에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은 "의가(宜家)", "선종(善種)" 즉, 집안일을 잘하고 농사를 잘짓게 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해야할 일이 많고 바쁜 때에 천하를 구할 대임을 맡은 대장부들이 왜 굳이 여인의 발에 그렇게 관심을 두었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유신의 지사들이 내세운 당시의 이유는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다. 왜 전족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직업을 가진 사람을 배가시킨다' 그리하여 '토산물의 생산이 배로 늘고, 세금도 배로 는다."(<상보> 제53호); 전족을 하지 않으면, 국난이 닥쳤을 때 여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다"(<상보> 제66호)는 것인데, 당시 사람들이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현재의 사람이라면 그다지 믿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하층노동계층의 부녀는 비록 절대다수가 전족을 했지만, 논 적은 없고, 안팎으로 바쁘게 살았다. 심지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근대방직업의 국내외자본가들이 고용한 여성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전족한 중국부녀들이다. 낭자군(娘子軍)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있었다. 화목란(花木蘭)의 이미지는 모두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자고이래로 전쟁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국난이 닥치더라도 여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전족의 악습은 중국남자들의 기형적인 성심리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전족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남당의 이후주로부터라고 한다. "이후주의 빈(嬪) 요낭(窅娘)은 예쁘고 춤을 잘 추었다. 비단으로 발을 감싸서 발을 작고 구부러지게 해서 초생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본받았다."(송나라때 장방기 <묵장만록>). 나중에 이학(理學)의 영향을 받아 사회의 유행이 된다. 근대에 접어든 이래로 중국인들이 중국전람을 할 때면 항상 전족과 수혜(繡鞋, 수놓은 신발)를 가장 두드러진 위치에 전시했다. 이를 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깊은지 두려울 정도이다.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중 중국에 오는 유학생중에는 아직도 여자들이 전족을 하는지 묻기도 한다. 체두변발을 하는 것은 청나라의 '국체(國體)'이므로 건드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족을 개혁하여 없앨 수 있었다. 오천년문명의 중국인들에 있어서 가장 참기 어려운 점은 서방인들에게 미개한 '토인'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야만적이라고 이웃나라들에게 욕을 얻어먹는"(강유위의 말) 것에 부끄러워 했다. 그러나, 온 천지에 널려 있는 '전족'을 한 여인은 바로 이런 '서방의 말'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중국인들이 변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고홍명과 같이 전족을 칭송한 철면피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