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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54

입헌파는 왜 혁명파에 패배했는가? 글: 뇌이(雷頤) 청나라말기 입헌과 혁명의 경주에서, 전자는 후자에 패했다. 아쉬운 일이다. 곧이어지는 것은 바로 재난이 끊이지 않는 사회의 대동란이었다. 소건(邵建)의 <<혁명이 입헌을 누르다>>와 <<입헌파의 민주노선도>>(각각 <<재경>>2010년 제5기, 제7기에 등재됨)를 읽.. 2010. 10. 7.
양계초(梁啓超)와 채악(蔡鍔): 원세개(袁世凱)를 잠못이루게 한 사도(師徒) 글: 고문기(高文麒) 2003년 4월, 천진의 마르코폴로광장의 북쪽에 두 동의 나란히 선 이탈리아식 서양건물이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북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중화민국초기의 대사상가 양계초의 주택이고, 남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그의 서재인 그 이름도 유명한 음빙실(.. 2009. 4. 20.
무창의거(武昌起義)의 전과정 글: 김만루(金滿樓) 1911년 9월 14일, 무창의 초망루(楚望樓) 10호에는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무한의 두 혁명단체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당시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이 이미 일어나서, 혁명세력이 전국을 석권하고 있는 상화이어서, 이 양파의 사람들은 .. 2008. 11. 14.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의 망명생활 1989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후, 청나라 정부는 전국에 유신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유신파의 지도자였던 강유위는 부득이하게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6년간 해외를 떠돌게 된다. 이 기간동안 그는 "몸은 외국을 떠돌지만" "마음은 중국의 땅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 자주 눈물.. 2006.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