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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입헌파는 왜 혁명파에 패배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0. 7.

글: 뇌이(雷頤)

 

청나라말기 입헌과 혁명의 경주에서, 전자는 후자에 패했다. 아쉬운 일이다. 곧이어지는 것은 바로 재난이 끊이지 않는 사회의 대동란이었다. 소건(邵建)의 <<혁명이 입헌을 누르다>>와 <<입헌파의 민주노선도>>(각각 <<재경>>2010년 제5기, 제7기에 등재됨)를 읽고는 얻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입헌은 왜 혁명에 눌렸는가? 아름다운 '노선도'는 왜 실현될 수 없었는가?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무창(武昌)에서의 두 발의 총성이 대청왕조를 무너뜨리게 될 줄은. 멀리 미국 콜로라도에 있던 손중산은 다음날 신문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 우연한 '두 발의 총성'이 한 왕조를 멸망시켰다는 것은 청왕조의 통치기반이 이미 뿌리째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손중산은 1894년 여름 이홍장에게 글을 올려 개혁개념을 제기하나 거절당한 후부터, 즉시 급진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1895년말 그는 '광주의거'를 일으키나 실패한다. 1900년말, 그는 다시 '혜주의거'를 일으킨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첫번째는 거국적인 여론이 '온통 욕과 저주를 해대었고,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5년후에는 '일반인들이 욕하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고, 의식있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우리가 실패한 것을 아쉬워했고, 거사가 성공했어야 한다고 한탄했다" 이 5년동안, 청나라정부는 갈수록 개화되고 관용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갈수록 우매하고 독재적으로 되어 갔다. 먼저 온화한 유신변법을 피바람으로 진압하고, 다시 서태후의 이기심으로 전민족의 재난을 댓가로 하는 '만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거대한 압력하에서, 청나라조정은 마침내 1906년 9월 1일 예비입헌단계에 진입함을 선포한다. 이 때늦은 민의를 쫓은 조치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일부 대도시에서는 오색등을 걸었고, 북과 징을 쳤으며, 학생, 시민, 상인들이 집회, 행진, 강연등을 벌여서 축하를 표시했다. 이는 많은 민중들 특히 신상(紳商)계층은 근본적으로 혁명을 원하거나 좋아하지 않았고, 입헌을 지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민중의 뜻을 중시하지 않았다. 입헌원칙에서, 권력에 대한 독점이 일본의 메이지헌법보다 심했다. 그 결과 온화한 입헌파들까지도 극력 반대하게 된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1척의 공문(空文)을 줄지언정, 1촌의 실사(實事)는 주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인민들이 다투려면, 실사를 다투어야지, 공문을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호소한다. 1910년 1월부터 11월까지, 1년도 안되는 기간내에 지방의 신사들을 위주로한 '입헌파'는 4번의 대규모 국회청원운동을 일으킨다. 그 기세는 대단했고, 전국에 번져갔다. 그래도 청나라조정은 전혀 타협하지 않는다. 약간의 권력도 내놓고자 하지 않는다. 국회개회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욱 격렬한 수단으로 입헌운동을 진압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입헌'과 '혁명'의 경주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 원래 순수한 이치대로라면, 입헌파가 더욱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그 이론의 전제는 청나라조정이 압력을 받으면 '양보'를 하고, 입헌을 실행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전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리 이치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모두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이 점에 대하여 혁명에 반대하는 양계초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많은 일본유학생들이 청나라조정의 '가짜입헌'으로 '입헌'을 지지하던 태도를 바꾸어 '혁명'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보게 된다. 확실히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청년들로 하여금 혁명파의 선전을 믿게하는데 충분했다. 그리하여 1907년초 그는 <<현정부와 혁명당>>이란 글을 발표한다: "혁명당이라는 것은 현정부를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현정부라는 것은 혁명당을 만드는 큰 공장이다" 그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신해혁명전야인 1911년 5월초, 청나라조정은 권력을 독점하는 "황족내각'을 발족시킨다. 실제로 세상사람들에게 청나라조정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 결과 통치기반이던 신상계층이 신속히 멀어져가고, 결국은 청나라조정을 버리고 떠난다. 청나라정부는 정치적으로 변혁을 거부했을 뿐아니라, 경제정책도 시대를 역행했다. 바로 1911년 5월에 발족한 '황족내각'은 원래 주식제의 민영철도를 국유로 회수해버린다. 자신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하여, 신상을 위주로 한 몇 개 성의 주주들은 자연히 '보로운동(保路運動)'을 벌이게 된다. 사천의 보로풍조는 상대적으로 격렬했고, 결국은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그러나, 사천의 보로운동의 신상의 우두머리들은 처름부터 전혀 과격하지 않은 '문명적인 철로쟁취'노선을 견지한다. 그들은 광서제의 패위를 놓고, 이전의 유지에서 '서정공제여론(庶政公諸輿論)'과 '천로준귀상판(川路準歸商辦)'이라는 두 마디말을 곳곳에 붙이고 향을 올렸다. 이러한 것들은 문명적이 아니거나, 온화하지 않거나, 이성적이 아니거나, 절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9월초에 보로운동을 이끌던 신상(紳商)의 우두머리를 체포한다. 그후 성도에서 발포하여 30여명의 아무런 무기도 없는 평화로운 청원자들을 죽인다. 이런 상황하에서, 입헌파도 혁명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은 바로 '숙명'이 되어버린다.

 

"입헌'이 '혁명'에 패배한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감정으로 이성을 대신하여 분석하게할 수는 없다. 이성적으로 보아야 한다. 입헌파의 '노선도'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결국 이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입헌은 청나라정부에서 누른 것이다. 근대중국의 급진은 청나라정부의 극단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혁명파가 급진적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통치자들이 완고하게 극단적이었다고 비판하는 편이 옳다. 민중들에게 급진적인 혁명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 보다는, 청나라통치자들에게 극단적이고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개혁을 계속하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바로 '급진'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