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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의 망명생활

by 중은우시 2006. 4. 23.

1989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후, 청나라 정부는 전국에 유신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유신파의 지도자였던 강유위는 부득이하게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6년간 해외를 떠돌게 된다. 이 기간동안 그는 "몸은 외국을 떠돌지만" "마음은 중국의 땅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 자주 눈물을 머금고 중국땅을 돌아보며 중국의 운명을 걱정했다.

 

1898년 10월 27일, 강유위는 영국의 여객선 "중경"호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간다. 그가 일본땅에 내리려고 할 때, 일본정부로부터 거절을 당한다. 이것은 그가 유신시절에 일본정계로부터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광경이었다. 일본의 산현유붕 내각은 중국의 유신운동은 이미 실패했고, 유신파는 이미 중국의 정치무대상에서 활동하기 힘들다고 보았으며, 그리하여 강유위에 대한 태도도 냉담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강유위가 고베에서 하선하는 것도 거절했다. 어쩔 수 없어, 강유위는 자기의 일본에 있던 제자인 구거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이 때, 청나라의 주일공사인 이성택은 이미 강유위가 일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즉시 청나라 정부에 전보를 쳤다. 서태후는 즉시 이성택에게 명령하여 밀정을 비밀리에 강유위를 쫓게 하고 기회를 봐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험악한 상황하에서 일본정부가 강유위를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청나라정부를 도와 강유위를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품천미이랑등 일본인사들이 적극 도와서 강유위는 일본에 결국 입국할 수 있게 된다. 강유위가 일본에 막 도착했을 때, 손중산도 바로 일본에서 사람을 모으고 있었고, 혁명을 일으켜 청나라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기회에 혁명파와 개량파간의 협력을 촉진시키고자 한다. 손중산은 인원확충을 위하여 개량파의 지지를 받는 것을 매우 희망했다. 그래서 일본인 궁기도천, 평산주거의 연락하에 손중산은 여러차례 강유위와 협력을 협의하고, 강유위로 하여금 보황개량(保皇改良)의 주장을 버릴 것을 요구하며, "혁명적인 방법"으로 중국을 구하자고 요청하며, 손을 잡고 함께 청왕조를 전복시키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강유위는 "광서황제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완고한 입장을 견지했고, 혁명파와 협력하여 청왕조에 대항하는 것은 거절했으며, 담판은 무위로 끝났다.

 

일본에 있는 기간동안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외에, 강유위는 자주 친구들의 집을 돌아다녔고, 친구들과 교류하는 중에 그의 유머있는 모습은 마음껏 표현되었다. 한번은 그가 화교 양위의 집의 혼례에 초대를 받았다. 화촉동방을 밝히는 날에, 흥취가 오른 강유위는 하나의 사를 짓는다. "사월이대단우주료(司月二大旦牛住了)"라고 큰 글자로 썼다. 그리고는 화촉동방에 들어가는 친구부부에게 글자마다 한 획씩을 더하게 해서 하나의 축하글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나중에 강유위의 암시하에 신부는 '사월이대"의 네 글자에 한 획씩을 추가했고, 신랑은 "단우주료" 네 글자에 한 획씩을 추가했다. 신랑신부는 글자를 추가한 후에 그들로 하여금 큰 소리로 읽게 하였다. 신랑신부는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내어 읽지를 못하였다. 강유위가 큰 소리로 읽었다. "동용공부조생가자(同用工夫早生佳子, 같이 노력해서 빨리 아들을 낳아라)" 결혼식에 참여했던 하객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였다. 나중에는 강유위도 스스로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어, 한 일본처를 취하였다.

 

1899년 봄, 강유위는 일본을 떠나 카나다의 벤쿠버로 간다. 이후 그는 카나다, 멕시코와 미국에 2년을 머무른다. 화교 마준경이 그를 도와 카나다에 집을 사고, 인테리어를 하며, 집에는 옛스러운 이름인 "요천실(廖天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곳에는 섬이 많았고, 주변에는 흰눈이 덮인 설산이었다. 강유위는 매일 섬에 놀러가서 배를 타며 노래를 불렀고, 북아메리카의 풍광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고향과 고국에 가 있었다. 이 기간동안 손중산등이 여러차례 접촉했고, 협력에 관해서도 계속하여 협의하였지만, 강유위가 '보황'의 입장을 견지하여 담판은 성공하지 못했다.

 

강유위의 미국생활은 다채로왔다. 한번은 그가 북미화교들에게 강연을 할 때, 나이 겨우 17살된 화교 아가씨 하금란(何金蘭)이 그의 재주에 반하였다. 당시 강유위는 영어를 아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가 각지를 방문하여 유세하는 것을 도와줄 사람으로. 친구의 부추김에 따라 49세인 강유위는 하금란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후 두 사라믄 1남1녀를 낳는다. 나중에 그들은 함께 유럽각국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하금란이 통역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하금란은 1914년 성홍열로 사망한다. 나이 겨우 24세때였다. 이것은 강유위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강유위는 멕시코에서 반년을 거주하면서, 그 곳의 풍토와 지리를 열심히 연구하고, 그는 인디안문화에 매우 흥미를 가졌다. 연구를 통해 그는 대담하게 인디안은 아마도 중국인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측하여, 역사학자들의 주의를 끈다.

 

1902년, 강유위는 다시 인도북부의 산성 대길령으로 옮긴다. 여기는 히말라야산으로부터 8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는 딸 강동벽과 함께, 말을 타고 히말라야산 남쪽산록을 오르고, 세계의 척추에서 9일을 걸으며, 비범한 탐험을 경험한다.

 

세계의 다른 대륙에서의 활동과 비교하면, 강유위의 유럽에서의 활동은 매우 풍부했다. 그는 일곱번 프랑스를 가고, 8번 영국을 여행하였으며 11번 독일을 들어간다. 그리고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그리스등의 국가를 여행한다.

 

강유위는 이탈리아와 스웨덴을 여행할 때 가장 감명을 받는다. 1904년 6월, 강유위는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로마에서, 그는 웅장한 고대건축과 현대화된 공장을 참관한다. 그가 보고들은 것은 그로 하여금 자본주의경제와 문화가 선진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동시에 보았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거지, 주민의 빈부격차가 엄청난 것등이었다. 1904년 말에, 강유위는 스웨덴을 간다. 가자마자 그는 그 곳의 풍경에 반해버린다. 그는 스톡홀름의 동남연해에 있는 작은 섬을 사고, 섬에 중국식의 정원을 꾸미고, "북해초당(北海草堂)"이라고 이름붙인다. 1907년까지 그는 매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이제는 근 100년이 지났고, 강유위가 섬 위에 만든 북해초당은 이미 피요르드의 해풍에 침식되어 없어졌지만, 현지의 화교들은 아직까지도 그 섬을 강유위섬이라고 부르고 있다. 강유위는 세계유람을 하면서도 계속하여 광서제를 구하려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해외에 "대청광서황제를 보호하고 구하는 회"를 결성하였고, 심지어 "보황군"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강유위는 영국, 미국 등지에서 유세하며 자금을 모아서 "보황회" 본부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보황군"을 더욱 정규적이고 전투력있게 하기 위하여 미국인인 리햄을 초청하여 보황군을 훈련시켰고, 중국황제를 대리하여 리햄에게 대장군을 봏하였으며, 그에게 대청제국의 장군복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리햄은 돌연 손중산을 지지하고, 손중산의 군사고문이 되어, 청나라를 전복하고자 한다.

 

세계여행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강유위는 여행하고 고찰하는 동시에, 상업활동에도 종사했고, 부동산사업도 하였다. 1906년 봄에, 강유위는 멕시코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멕시코는 자금을 모아 궤도전차를 건설하고 있었다. 강유위는 각지 화교들이 모아준 돈으로 전차궤도가 지나가는 곳의 부동산을 샀다. 얼마되지 않아, 이 부동산의 가격은 몇 배로 뛰었고, 그는 10여만은원을 번다. 강유위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일부 공익활동을 통하여 경비를 모았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 자신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주었을 뿐아니라, 친구를 도와줄 수있게까지 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매년 양계초와 그의 가족들에게 5000은원을 보내주었다.

 

신해혁명후, 중국의 황권은 철저히 폐지되었다. 강유위에 대한 체포령도 자연히 해제되었다. 그는 국내로 돌아가서 황제를 보호하고, 다시 황제를 옹립하는 활동을 벌인다. 장훈과 공동으로 청왕조를 복벽하려는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다. 여러차례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중국의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강유위는 귀국후, 일찌기 유명한 전각가인 오창석에게 인장을 판 적이 있다. "유신백일, 출망십육년, 삼주대지, 유편사주, 경삽십일국, 행육십만리(유신은 백일, 망명은 16년, 세번 세계를 돌고, 사대주를 돌아다니며, 31개국을 가고, 60만리를 갔다)" 이 27자는 그의 생애를 잘 표현한다고 볼 수 있고, 중국인이 세계유람을 하는 데 있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강유위는 중국근대사상 세계각지를 가장 많이 돌아다녔고, 가장 많은 사람을 접촉한 여행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