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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종15

<조씨고아(趙氏孤兒)>이야기에 대한 고증과 역사복원 글: 사량소(史良昭) 는 경극(京劇)에서는 라고 부른다(고아를 찾아서 고아를 구한다는 의미임). 이 명칭은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보에 쌓인 사내아이가 아니라, 조씨와 아무런 현련관계도 없지만, 전력을 다해서 '고아를 구해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 올바른 일을 행하다)하고 한명은 인욕부중(忍辱負重, 치욕을 참고 견디다)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아갔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으며,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았고,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중에서 집착 이외의 모든 약점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2023. 5. 14.
문언박(文彦博): 북송 4명의 황제 아래에서 50년간 재상을 지내다. 글: 주효휘(周曉輝) 고대 왕조에서 제후나 재상에 오르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모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불가의 인과응보설에 따르면,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북송때 이런 명신이 있다. 일생동안 송인종, 송영종, 송신종, 송철종의 네 황제를 모시는 동안 전후로 여러번 재상을 맡았고, 재상을 맡은 기간이 50년에 이르며, 평생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일찌기 10만명을 모아 함께 염불한 바 있다. 그 외에, 아주 장수하여 91세에 좌화한다. 병없이 편안히 죽는다. 그의 이름은 바로 문언박이다. 문언박(1006-1097), 자는 관부(寬夫), 산서 분주(汾州) 개휴(介休) 사람. 그의 조상은 성이 경(敬)이다. 나중에 후진의 고조 석경당(石敬瑭)의 이름을 피휘하여 '경'에서 문(文)으로 성을 고친다. 후진이.. 2021. 9. 17.
사마광(司馬光): 완벽한 일생의 유일한 오점 글: 문재봉(文裁縫) 북송의 명상(名相) 사마광을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어렸을 때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항아리를 깬 것이라든지, 왕안석(王安石)의 변법에 반대한 것이라든지, 기년체사서인 을 편찬한 것등은 알고 있지만, 사마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아마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마광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다. 마치 동년이 없었던 것처럼. 사서기록에 따르면 그가 공부를 시작해서 글을 알면서부터 "성인과 같이 늠연했고, 를 들으면 대강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배고픔과 목마음 추위와 더위도 모를 정도였다." 19살에 진사갑과에 급제했고, 성격은 강정(剛正)했으며 사람됨은 집요(執拗)했고, 다른 사람들과 이치를 따지는 것을 좋아.. 2020. 8. 12.
아운(阿雲)사건: 한 살인미수사건이 부른 사법대논쟁 글: 오구(吳鉤) 오늘 얘기할 것은 형사사건이다: 한 민간여자가 남편을 모살한 죄로 기소당했다. 법률이 그녀의 운명에 대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사건의 내용은 그다지 복잡할 것이 없다. 범죄혐의자는 이름도 없는 보통 부녀이다. 그러나 사건의 판결을 둘러싸고, 여러 조정의 대신.. 2018. 12. 25.
3가지 붕당론(朋黨論) 글: 송지견(宋志堅) 사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결성된 집단을 "붕당(朋黨)"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는 포탄으로 상대를 처벌하는 도구로 삼았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각자 해석했고, 여러가지 서로 다른 '붕당론'이 나오게 .. 2018. 10. 26.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을 둘러싼 수수께끼 작자: 미상 왕방(1044-1076), 자는 원택(元澤), 왕안석의 아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왕안석이 변법을 추진할 때 힘이 되는 조수였다고 한다. 일찌기 신법의 기획과 제정에 참여하고, 신법의 추진과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그의 지력(智力).. 2018. 1. 13.
송영종(宋英宗) 조서(趙曙):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후궁 비빈이 3천에 이르는 황제는 아주 많다. 그러나,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는 보기 힘들다.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이렇게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송영종 조서이다. 송영종 조서와 황후 고씨(高氏)는 청매죽마(靑梅竹馬)의 서로 사랑하.. 2017. 10. 30.
송나라때의 도굴사건기록 글: 노채적채원자(老蔡的菜園子) 송나라때의 문인필기 <동헌필록(東軒筆錄)>과 <곡유구문(曲洧舊聞)>에는 모두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즉 원풍원년(1078년, 송신종연간) 도굴범이 하남 양적(陽翟, 지금의 禹州)에서 동시에 두 개의 묘를 발굴한 건이다. 도굴된 묘의 주인은 .. 2017. 6. 30.
송휘종(宋徽宗) 조길(趙佶): 어떻게 나쁜 아이로 성장했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삼세간소(三歲看小), 칠세간로(七歲看老). 세살을 보면 소년시절을 알 수있고, 일곱 살을 보면 노년시절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한 사람의 동년에서 그가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계심리학의 각도.. 2016. 9. 2.
송휘종(宋徽宗): 풍류오국(風流誤國) 글: 복녕객(福寧客) 1126년, 북송과 금이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자마자, 금나라는 맹약을 깨고, 침략자의 사나운 얼굴을 드러낸다. 곧바로 송나라의 동경 변량으로 쳐들어간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십년동안 풍화설월(風花雪月), 온유부귀한 생활을 즐겼던 송휘종은 놀라서 늙은 .. 2014.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