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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사마광(司馬光): 완벽한 일생의 유일한 오점

by 중은우시 2020. 8. 12.

글: 문재봉(文裁縫)

 

북송의 명상(名相) 사마광을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어렸을 때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항아리를 깬 것이라든지, 왕안석(王安石)의 변법에 반대한 것이라든지, 기년체사서인 <자치통감>을 편찬한 것등은 알고 있지만, 사마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아마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마광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다. 마치 동년이 없었던 것처럼. 사서기록에 따르면 그가 공부를 시작해서 글을 알면서부터 "성인과 같이 늠연했고, <좌씨춘추>를 들으면 대강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배고픔과 목마음 추위와 더위도 모를 정도였다." 19살에 진사갑과에 급제했고, 성격은 강정(剛正)했으며 사람됨은 집요(執拗)했고, 다른 사람들과 이치를 따지는 것을 좋아했고,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포기를 몰랐다.

 

사마광이 얼마나 강정했는가? 평생동안 눈썹찡그릴 일을 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단 한번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 거짓말은 그가 6살때의 일이다. 당시 사마광은 누나와 같이 호두껍질을 벗기고 있었는데, 둘이서 반나절동안 깠지만 일을 마치지 못했다.

 

누나가 일이 있어 먼저 떠났는데, 한 시녀가 와서 뜨거운 물에 불린 다음에 호두껍질을 쉽게 깔 수 있도록 도와주어 곧 일을 마치게 된다. 누나가 돌아와서는 깜짝 놀란다. "누가 도와준 거지?" 그러나 허영심으로 사마광은 본능적으로 대답한다: "아무도 안도와줬어 .모두 내 혼자 한 거야" 이 모든 것을 그의 부친이 보고 있었다. 부친은 사마광을 혼냈다: "어찌 거짓말을 하느냐!" 그 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른이 된 후에 이 일을 종이에 적어놓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소옹(邵雍)의 아들 소백온(邵伯溫)은 그 글을 직접 보았다. 청나라때 사람인 진굉모(陳宏謀)는 이렇게 말한다. "사마광의 일생은 지성(至誠)을 주(主)로 하고, 불기(不欺)를 본(本)으로 했다."

 

그리고 사마광이 말년에 말을 한 마리 팔게 되었다. 그 말은 털색깔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도 크고 허리도 두터웠으며 피부도 매끄러웠다. 분명히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사마광은 관가(管家)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계절성 폐병이 있다. 팔 때, 반드시 사는 사람에게 말해주어라!" 관가는 반대했다: "어르신같이 파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말을 팔 때 말의 문제점까지 얘기해주다니, 그럼 말값이 싸집니다." 사마광은 그 관가를 타이르며 말했다; "말값이 싸지는 것은 작은 일이다. 사실을 숨기고, 성실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기본을 버리는 것이다. 손해가 더욱 크다는 말이다" 관가는 그의 말을 들은 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사마광이 얼마나 집요한가?

 

송태조 조광윤은 자손들에게 사대부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사대부와 간언하는 신하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북송왕조는 사대부의 낙원이었다. 생몀이 날아갈 걱정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치의 풍속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은 축첩을 했다. 소동파(蘇東坡)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마광은 거기에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사마광이 결혼한 후 30여년동안 부인인 장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리고 첩을 들여서 자식을 낳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고 했다. 사마광은 급하지 않으나, 장부인은 급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미인을 사서 사마광의 침실에 들여보내고, 자신은 핑계를 대고 외출을 한다. 그렇게 하면 일이 성사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사마광이 침실로 돌아와서 낯선 사람이 있자, 바로 서재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장부인은 다시 다른 방법을 쓴다. 부인이 사마광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꽃구경을 한다. 암중으로 사온 미녀를 화원속에 있게 하여 사마광과 만나게 한다. 그러나 사마광은 미녀를 보자,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 부인이 없으니, 자리를 비켜주시오."

 

이렇게 하여, 장부인은 평생 자식을 낳지 못했고, 사마광도 평생 첩을 들이지 않는다. 나중에 친척의 아들인 사마강(司馬康)을 양자로 들인다.

 

사마광은 집요할 뿐아니라. '무료'했다.

 

원소절(元宵節)이 되었다. 장부인은 등회(燈會)를 구경가고 싶었다. 사마광은 기이하다는 듯이 말한다: "집에도 등이 있지 않습니까? 왜 길거리로 가서 보는 겁니까?" 장부인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등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보는 겁니다" 사마광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한다. "사람을 본다구요? 집안에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설마 내가 귀신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사마광은 사람들과 이치를 따지기 좋아했다. 치평3년(1066년) 전국시대부터 진나라까지의 <통지(通誌)> 8권을 편찬하여 송영종(宋英宗)에게 올린다. 송영종은 이를 읽고서 크게 기뻐하며 국(局)을 만들어 속수(續修)하도록 한다. 그리고 비용도 주고, 인원도 증원해준다. 나중에 송신종(宋神宗)은 책이름까지 하사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그리고 친히 서문을 적어준다. 왕안석은 송신종의 지원하에 신정(新政)을 시작한다. 사마광은 그러나 조종의 법은 바꿔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송신종의 면전에서 왕안석과 계속 논쟁을 벌인다.

 

결국 황제의 뜻을 꺽을 수는 없었고, 사마광은 이로 인하여 송신종이 임명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의 직을 사임하고, 경성을 떠나 낙양(洛陽)에 은거하면서 <자치통감>을 편찬하는데 집중한다. 이번에는 15년이 걸렸다. 이 15년동안, 사마광은 입는 것과 먹는 것이 모두 누추했다. 장부인이 죽었을 때, 사마광은 처의 장례를 치를 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는 겨우 남아 있던 삼경(三頃)의 척박한 밭을 전당맡기고, 관을 사서 장례를 치른다. 이를 통해 남편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당시 대신 왕공진(王拱辰)도 낙양에 거주했고, 집이 호화스러웠다. 높고 웅장한 '조천각(朝天閣)'을 짓는다. 낙양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왕가찬천(王家鑽天), 사마입지(司馬入地)" <자치통감>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모두 사마광이야말로 송나라의 '진짜재상'이라고 칭송한다. 원풍8년(1085년), 송철종(宋哲宗)이 즉위하고, 고태황태후(高太皇太后)가 수렴청정한다. 사마광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임명되고, 신속하게 신당(新黨)을 몰아내고, 신법(新法)을 폐지한다. 역사에서 "원우갱화(元祐更化)"라 부르는 사건이다.

 

사마광은 집권한지 1년반만에 병을 얻어 사망한다. "경사(京師)의 사람들은 시장을 닫고 조문을 했으며, 옷감을 팔아 장사를 지내고, 골목에서 곡을 하는 사람이, 천명, 만명에 이르렀다." 영구가 하현(夏縣)을 갈 때는 "백성들이 곡하는 소리가 가족이 죽었을 때같았다. 사방에서 온 사람이 수만명에 이른다." "집집마다 그의 화상(畵像)을 걸어 제사시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에게 축원을 보냈다."

 

사마광의 일생을 돌아보면, 기본적으로 "질본결래환결거(質本潔來還潔去)" 깨끗하게 왔다가 깨끗하게 갔다. 풍광제월(風光霽月), 대공무사(大公無私)했다.

 

다만 그에게도 오점이 하나 있다. 천년이래로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일이다. 즉 사마광은 19년의 시간을 들여 농촌부녀 한명을 죽였다. 이 일은 <송사.왕안석>과 <송사.형법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역사에서는 "율사지쟁(律赦之爭)"이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내막은 이러하다. 산동(山東) 등주(登州)에 사는 여자아이 아운(阿雲)은 어려서 부친이 죽고, 13살때 모친도 병으로 죽는다. 가련한 아운은 고아가 된 것이다.

 

더욱 불행한 일은 아운의 모친 복상기간동안 돈에 욕심이 많은 숙부가 몰래 그녀를 위대(韋大)라는 노총각에게 처로 팔아버린 것이다. 위대는 나이가 마흔에 가깝고, 용모도 추악했다.

 

아운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두 손으로 이 모든 것을 바꾸려 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과일깍는 칼을 들고 위대가 잠을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위대를 칼로 찔렀다. 그런데 위대가 갑자기 깨어나는 바람에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다음 날, 위대는 관청에 아운을 고발한다. 그녀가 남편을 모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아운은 갈 곳이 없어서, 스스로 자수하고,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한다. 지현(知縣)은 이 사건을 심리한 후, 아운의 "남편모살"죄가 성립한다고 보았고, 상부인 지부(知府)인 허준(許遵)에게 보고한다. 대송율법에 따르면, 남편을 살해하려는 것은 중죄이고, 사형을 내려야 한다. 사람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고, 백성을 아꼈던 허준은 사건기록을 진지하게 읽은 다음 아운의 죄는 사형까지 받을 정도가 아니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대송율법에 부모의 복상기간중에 이루어진 혼약은 무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운은 숙부에 의하여 강제결혼을 한 것이고, 그녀 자신은 이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운은 위대의 부인이 아닌 것이다. 소위 '남편모살'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허준은 아운에게 고의상해죄로 보아야 하고, 위대의 상처도 크지 않다고 보아, 아운에게 3년유기징역형을 내리면 족하다고 보았다.

 

허준은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적어 대리시(大理寺)와 심형원(審刑院)에 올린다.

 

대리시와 심형원에서 내놓은 결론은: 아운이 비록 위대의 처가 아니지만, 그녀의 행위는 모살임에 분명하다.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

 

마침 그 얼마 전에 송신종이 영을 내린 바 있다. 만일 범인이 자수를 하면, 두 등급을 낮추어 형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 조문에 따른다면, 아운은 다시 사형에 처할 죄는 아니게 되는 것이다. 허준은 다시 이 칙령을 근거로 형부(刑部)에 상소한다. 다만 형부는 황제의 칙서를 무시하고 원판결을 유지한다. 아운은 죽음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이때 허준은 승진을 해서, 대리시로 가서 대리시경(大理寺卿)이 되어 있었다. 그리도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운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아운에 대하여 다시 유기징역으로 형을 고친다.

 

허준이 이렇게 하자, 조정내의 어사(御史)는 허준이 직무를 이용하여 권한을 남용했다고 여긴다.

 

금방 어사대(御史臺)는 허준을 직무의 편의를 이용하여 권한을 남용했다고 허준을 탄핵하며 사직을 요구한다.

 

허준은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송신종에게 이 사건의 내막을 설명하고 이 사건을 한림학사들로 하여금 토론하게 할 것을 청한다.

 

송신종도 아운의 처지를 듣고, 연민의 정이 일어, 사건을 한림원(翰林院)으로 보낸다.

 

한림원에서는 왕안석과 사마광이 양파로 나뉘어 있었다. 왕안석은 황제의 '칙서'를 우선해야 하고, '칙서'에 따라 유기징역에 처해야 한다고 보았고, 사마광은 법률이 모든 것이 위에 있으니, 황권도 마음대로 법률을 바꿀 수 없다고 보았다.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보았다.

 

두 사람은 조정에서 서로 논박하며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원래 두 사람은 대문학가로, 모두 문인이다. 그런데 왜 조정에서 얼굴을 붉혀가면서 서로 싸웠을까?

 

기실, 그들의 다툼은 각자의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었다.

 

송신종은 마침 왕안석의 변법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법률을 바꾸는 것이 변법의 중요내용이다. 그리고 반드시 시행해야 했다.

 

왕안석은 황제의 '칙서'로 법률을 누르려 했고, 그것은 변법을 위해 사전조치를 하는 것이었다.

 

사마광은 '조종의 법은 바꿀 수 없다"는 완고파이다. 극력 변법에 반대했다. 황권도 마음대로 법률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랜시간의 다툼끝에 송신종은 점점 그들이 다투는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확실하게 왕안석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 조서를 내려 아운의 죄는 사형에 처할 정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기징역으로 고친다.

 

이렇게 하여 행운의 신은 아운의 편이었고, 아운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송신종은 천하에 대사면령을 선포하고, 아운은 자유의 몸이 되어 출옥하고 다시 개가해서 자식을 낳는다.

 

이치대로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야 한다. 누가 알았으랴 17년후 송신종이 사망하고, 송철종이 즉위한다. 사마광은 다시 집권한다. 사마광은 기억력이 너무 좋은 게 탈이었다. 취임한 후 처음 한 일이 바로 아운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모살'죄로 참수한다. 사마광의 이런 조치는 정적들에게 나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절대로 변법에 찬동할 수 없다는 결심을 알리는 셈이다. 동시에 자신은 변법을 페지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약한 여자의 생명으로 정치적 신호를 삼다니, 천하인들에게 욕을 얻어먹어 마땅한 일이다.

 

사마광은 이렇게 악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