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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조씨고아(趙氏孤兒)>이야기에 대한 고증과 역사복원

by 중은우시 2023. 5. 14.

글: 사량소(史良昭)

 

<조씨고아>는 경극(京劇)에서는 <수고구고(搜孤救孤)>라고 부른다(고아를 찾아서 고아를 구한다는 의미임). 이 명칭은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보에 쌓인 사내아이가 아니라, 조씨와 아무런 현련관계도 없지만, 전력을 다해서 '고아를 구해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 올바른 일을 행하다)하고 한명은 인욕부중(忍辱負重, 치욕을 참고 견디다)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아갔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으며,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았고,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중에서 집착 이외의 모든 약점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소위 "연조지풍(燕趙之風)"의 선구, "충의문화(忠義文化)"의 대표등등. 모두 지나친 찬양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조씨고아도 단순한 도구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이야기의 성립과 보급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조씨"라는 두 글자이다. "조씨(趙氏)"는 춘추때 진(晋)의 정경(正卿) 조순(趙盾)의 가족이다.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은 주천자(周天子)와 마찬가지로 실행한 것은 가족제의 국가통치였다. 대소신료들은 이리저리 연결시켜보면 결국 어느 군주와의 친척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국군(國君)과 성이 같으면 공족(公族)이고, 인척이면 경족(卿族)이다. 공족의 발전맥락은 단일하다. 경족은 계속되는 정략결혼의 방식으로 눈덩이처럼 세력을 키우게 되고, 그 세력이 나중에는 국군을 압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명으로 암으로 권력이전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조순은 바로 춘추의 패주인 진문공(晋文公)의 동서인 조쇠(趙衰)의 장남이다(나중에 진문공은 딸 조희를 조쇠에게 시집보내어, 더욱 친척관계가 강화되고, 더욱 가까워진다). 그는 진문공, 진양공(晋襄公, 진문공의 아들), 진령공(晋靈公, 진양공의 아들), 진성공(晋成公, 진문공의 아들, 진양공의 동생)등 네명의 국군을 모신다. 그는 걸출한 치국의 재능이 있었고, 군정의 권력을 한몸에 집중시킨다. 그는 진나라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집정했고, 나중의 두 국군 진령공과 진성공은 그가 옹립했다. 그중 진령공은 황음무도하여 그의 당제(堂弟)인 조천(趙穿)에게 피살당한다. 조순은 진성공6년(기원전601년) 사망한다. 그가 사망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씨고아"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이는 분명 진성공의 후임국군인 진경공(晋景公)의 조씨세력에 대한 반격이다. 그릭 조씨고아 조무(趙武)는 겁난이후에도 살아남아서 다시 정치무대로 되돌아온다. 기실 이는 경족의 총체적세력이 강대하다는 일종의 방증이다. 결국 일백여년이후인 기원전453년, 그의 4세손 조무휼(趙毋恤)은 다른 경족들과 힘을 합쳐 "삼가분진(三家分晋)"하여, 조(趙), 한(韓), 위(魏)의 세 나라를 세운다. 조나라는 조무(趙武)를 선조로 모신다. 그 역사적의미로 보자면 "조씨"에 "고아"를 합친 것이 "조씨고아"의 완전판이다. 먼저 조순이 인심을 얻고, 나중에 조나라는 진(秦)에 멸망당한다. 이것은 모두 "고아"정서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에 대한 고증

 

"조씨고아" 이야기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기.조세가>이다. 진경공3년(기원전597년), 사구(司寇) 도안가(屠岸賈)는 이미 죽은 조순에게 시군지죄(弑君之罪)를 물어 청산한다는 구실로, "여러 장수들과 조씨를 하궁(下宮)에서 공격하여, 조삭(趙朔, 조순의 아들),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모두, 조순의 이모(異母)형제임)를 죽여, 그 일족을 멸문시킨다. 조삭의 처는 진성공(晋成公)의 누나인데, 유복자가 있었다. 진성공의 궁으로 가서 숨는다." 이렇게 낳은 사내아이가 바로 조씨고아이다. 도안가는 소문을 듣고, 궁으로 들어가 수색하여, 참초제근(斬草除根)하고자 한다. 조삭의 문객인 공손저구와 친구 정영은 상황이 긴급한 것을 보자, 같이 모의하여 계책을 세운다. 그리하여, 방법을 강구하여 영아 한명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산 속에 숨겨놓고, 그후에 정영이 나서서 밀고를 하며, 도안가로 하여금 공손저구와 영아를 죽이게 한다. 이렇게 이대도강(李代桃僵)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조씨고아인 조무의 목숨을 살려낸다. 15년후, 진경공이 중병이 드는데, 대부(大夫) 한궐(韓厥)은 조씨의 원혼이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조씨고아의 행방을 얘기한다. 진경공은 깊은 산에서 정영과 조무를 불러내고, 그들로 하여금 도안가 일족을 멸족시키게 한다. 그리고 다시 조무의 작위를 회복시킨다. 정영은 뜻을 이미 이루었으므로, 자살로 공손저구에게 감사한다. 조무는 두 사람을 위하여 "삼년간 재쇠(齊衰, 상복을 입다)하고, 그들을 위하여 제읍(祭邑)을 마련해주고, 춘추로 제사를 모시며 대대로 끊이지 않게 했다." <조세가>의 기재는 천자가 넘는 긴 내용이고, 이야기에는 곡절이 많다. 그리하여 전설적인 색채가 넘친다. 그리하여 후세의 '수고장고'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더욱 이른 시기에 쓰여진 <춘추좌전>, <국어> 심지어 사마천 자신이 쓴 진나라의 정사 <사기.진세가>와 대조해 읽어보면, 여러 의문과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작은 부분부터 보자면, "조삭의 처가 진성공의 누나이다"라는 것이다. 조삭의 부인(역사에서는 조장희(趙莊姬)라고 부른다. '장(莊)'은 조삭의 시호이다)이 진경공의 부친인 진성공의 누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수는 아닌 것같다. 왜냐하면 <조세가>의 앞부분에 "진경공 3년,....(조)삭이 진성공의 누나를 부인으로 취했다."라고 명확히 기록해두었기 때문이다. 진성공은 진문공의 아들이고, 그렇다면 조장희는 진문공의 딸이 된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문공은 딸 조희(趙姬)를 조삭의 조부인 조쇠(趙衰)에게 시집보낸 바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배분의 자매를 각각 처로 취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가 되지도 않고, 정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진문공은 기원전628년에 사망했는데, 설사 말년에 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추산해보면 조장희는 최소 이미 30여세가 된다. 여자는 "15세가 결혼적령기"였던 춘추시대에, 국군의 궁중에 이처런 나이많은 '노처녀'를 남겨두었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고 할 수 있다.

 

한유(漢儒) 가규(賈逵)가 수정한 바에 따르면, "성공의 누나(成公姉)"를 "성공의 딸(成公女)"로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1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조장희는 마땅히 진경공의 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더라도 신혼인데, 진경공은 부친의 선택에 위배하여, 자신의 자매를 과부로 만들어 후대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통상적인 상식에 어긋난다. <조세가>의 글에서 진경공은 내용을 알지 못했던 국외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도안가에게 미루었다. 그가 "국군에게 말하지도 않고 임의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경을 이렇게 소개한다; "도안가라는 자는 진령공에게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진경공에 이르러 도안가는 사구가 되었다." 사구는 민간의 치안관리를 책임지는 관직이다. 조씨의 '하궁(下宮)'을 공격하였는데(<사기.진세가>: "성공원년, 조씨에게 공족(公族)을 하사하여, 조씨가 거처하는 저택을 '궁(宮)'이라 부르게 된다), 이것만 해도 이미 월권이다. 하물며, 조장희가 숨은 '공궁'을 수색하였다는 것인데, 거기는 진경공의 거처이다.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이처럼 대단하고 진령공부터 진경공까지 3대에 걸쳐 총애를 받았다는 권신에 대하여 <사기.진세가>에는 전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히 우리는 정영, 공손저구 및 '조씨고아'를 쟁탈한 것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심한 것은 조씨가 멸족된 시간이다. 소위 "그의 일족을 모조리 멸했다"는 진경공3년이후, <좌전>과 <진세가>에는 여러번 조동, 조괄, 조천, 조영제가 활동한 내용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조영제와 조삭의 미망인 조장희가 간통으로 축출되었다는 추문까지 기록되어 있다. <진세가>의 '멸족'에 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17년(기원전583년), 조동, 조괄을 주살하고, 그 일족을 멸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조쇠, 조순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제사를 끊으려 하십니까?" 그리하여 그리하여 다시 조의 서자(庶子) 무(武)를 조(趙)의 집안을 잇게 하고 그의 읍(邑)을 회복시켜준다."

 

사마천은 여기에서는 '하궁지변'을 14년이나 뒤로 밀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정확하다. 왜냐하면 경전의 내용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춘추> 노성공8년(기원전583년) <경(經)>: "진(晋)에서 대부 조동, 조괄을 죽이다." <좌전>: "진의 조장희는 조영제가 죽자, 진후에게 참소해서 말하기를, "원(原, 조동), 병(屛, 조괄)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고, 란(欒, 欒書), 극(郤, 郤錡)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육월, 진은 조동, 조괄을 토벌한다. 조무는 희씨가 공궁에 숨겼다."

 

"조씨고아" 조무는 <좌전>의 이후 기록을 보면 그의 연령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는 기원전543년에 "오십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두예(杜預)의 주석에서는 "개략 사십칠,팔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조무는 기원전590년 혹은 589년에 태어났고, "하궁지변"때 이미 7,8세이다. "영아"라는 말과는 차이가 크다. <국어.진어>에 "옛날 선주(先主) 문자(文子, 조무의 시호가 문자이다)는 어려서 어려움을 당해, 희씨를 따라 공궁으로 갔다."는 기록도 하나의 방증이다. 이런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후인들이 <조세가>의 기록이 "황당하여 믿을 수 없다. 소위 도안가, 정영, 공손저구는 아마도 그런 자가 없었던 것같다"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청나라 양옥승의 <사기지의>)

 

이를 보면, <조세가>와 <진세가>는 내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마치 한 사람이 아니라 딴 사람이 적은 것처럼. 이전에 이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표시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모기령(毛奇齡)은 <진세가>는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이 썼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무릇 <사기>의 여러 설은 서로 모순되는 곳이 있는데, 모두 사마담이 쓰고 사마천이 고쳤기 때문이다"(<경문(經問)>. 최동벽(崔同壁)은 유향(劉向) 부자의 증보(<사기탐원>)라고 보았다. 이건 모두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한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좌씨> <국어>에 근거하여, <세본> <전국책>, <초한춘추>을 채택하여 그 뒷 일을 이었다."(<한서.사마천전>). 이를 보면 그가 널리 자료를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중 <세본(世本)>은 조나라 사관이 작품이다. 진시황의 분서때 완전히 태워버리지 못해서, 태사공이 조나라의 다른 국사나 야사기록을 읽어보았을 수도 있다. 그중 "조씨고아"이야기는 너무 생생하여,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조씨고아이야기는 <조세가>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아주 두드러져서, 이미 누군가가 완성해놓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사마천이 사망한지 사십년후에, 유향은 명을 받아 내각비서를 정리하여, <신서(新序)>를 쓴다. 그중에도 대동소이한 조씨고아이야기를 수집했다. 이를 보면, <조세가>에 기록된 것은 전국시대 조나라사람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역사복원

 

현재 우리가 <좌전> <진세가>에 근거하여, 최대한 '조씨고아'와 관련한 역사를 복원하려먼 당연히 '조씨'의 대표인물인 조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기원전621년, 진양공은 중군장(中軍將, 正職) 가계(賈季)와 중군좌(中軍佐, 副職) 조순의 직위를 서로 바꾼다. 이때부터 조순의 권력농단이 시작되고, 조씨가족이 일지독대(一枝獨大)하는 서막을 열게 된다. 조순은 그때 집정대부를 겸임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동시에 한 사람이 군대와 정부(軍政)의 일인자를 겸임하는 "정경(正卿)"이 나타나게 되었다. 같은 해 진양공이 사망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고(夷皋)를 조순에게 정중히 부탁한다(托孤). "이 아이가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면 그대의 공이고, 만일 인재로 성장하지 못하면, 내가 그대를 원망할 것이다."같은 감동적인 말을 덧붙이면서. 이고는 즉위하여 진령공이 된다. 불행히도 그는 '인재가 아닌' 유형이었다. 국사에서 자주 조순의 뒷발을 잡았을 뿐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향락을 추구하며 잔학하기 그지없었다. 한번은 웅장(熊掌, 곰발바닥)을 제대로 삶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방장의 두 발과 두 손을 잘라버리기도 했고, 궁녀를 대나무바구니에 담아서 문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조순은 그런 모습을 보면 항상 정색을 하고 간언했다. 기원전607년, 진령공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 눈엣가시인 조순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는 먼저 자객 서예(鉏霓)를 보내어 야밤에 조순을 암살하려 한다. 서예는 차마 손을 쓰지 봇하고, 홰나무에 부딛쳐 자살한다. 구월이 되어, 진령공은 조순에게 술을 마시자고 청한다. 술자리에 병사를 매복시켰다. 조순의 거우(車右)인 제미명(提彌明)이 이를 발각하고, 주인을 호구에서 구해낸다. 진경공은 '영오(靈獒)'를 풀었다. 이 개는 높이가 네치이고 서융(西戎)에서 도입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장오(藏獒, 티베트 마스티프)와 유사한 품종이다. 그런데 제미명이 발로 걷어차 죽여버린다. 병사들이 모두 몰려나왔고, 중과부적으로 제미명은 죽고 만다. 위급한 순간에 돌연 영첩(靈輒)이라는 병사가 반기를 들고 조순을 보호하여 물러났다. 원래 그가 예상(翳桑)에서 굶주리고 있을 때, 조순이 도와준 적이 있었다. 진령공은 주방장을 대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조순을 도륙낼 수 없었다. 어쨌든 춘추시대의 국군은 "예(禮)"의 제약을 받았고, "형부상대부(刑不上大夫, 형벌은 대부에게 적용하지 않는다)"였다. 그는 드러내놓고 형벌을 내리거나 공개적으로 토벌할 수 없어서, 결국 이런 하삼람(下三濫)의 수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것도 측면에서 당시 진나라 군권의 쇠락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순은 도망을 선택한다. 그러나 국경을 넘기 전에 다시 고개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그달 말에 진령공은 도원에서 놀다가 조순의 당제이자, 진양공의 사위인 조천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좌전>에는 "진령공을 도원에서 공격했다"라고 적었다. 이를 보면 정정당당하게 토벌한 것이다. 조천의 거사가 조순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여부는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령공이 조씨가족을 적으로 삼은 것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조순은 고귀했고, 백성들과 잘 화합했다" 진령공은 "백성들이 따르지 않아서 결국 시역된다" 이렇게 하여 유명한 "동호필(董狐筆)"사건이 벌어진다. 사관 동호는 크게 "조순이 국군을 시해했다(趙盾弑其君)"이라고 적어 조당에 공표한다. 조순은 이에 불복한다. 동호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정경인데도, 도망가서 국경을 넘지 않았고(亡不越境), 되돌아와서는 국왕을 시해한 적을 토벌하지 않았다(返不討賊). 그럼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조순은 그의 이 기록을 용인한다. 아마도 그는 사관의 직책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조씨가족에게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망불월경"(월경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표지임)의 죄명은 아마 조순에게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반불토적"했다. 토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조천을 사절로 주(周)나라로 보내 진양공의 또 다른 동생인 공자흑둔(公子黑臀)을 모셔오게 해서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진성공이다. 그는 고의로 시위한 것이 아니라, 국군이 죽었고, 아들을 두지 못했으면 마땅이 빠른 시간내에 빈 국군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야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이 보장될 수 있다. 진성공이 즉위한 해, 즉 기원전606년, 기이한 법령을 내린다: 공족대부제도(公族大夫制度)를 회복하고, 각경(各卿, 집정대부, 상중하삼군의 육경)의 적자(嫡子, 정실부인 소생의 아들. 특히 그중 법정후계자를 가리킴)는 모두 이 직작(職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원래 진나라는 진헌공때부터 시작하여, 태자를 제외하고 국군의 다른 아들 및 상대 국군의 혈족은 모두 국외에 기거해야 했으며, 부르지 않으면 함부로 귀국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진나라에는 공족이 없다(晋國無公族)"라는 말이 나왔다. 공족대부라는 직은 원래 공족사무를 관장하고 경족도 함께 관장했다. 이제 교묘하게 개념을 바꾸어서, 경족도 국가의 제사와 추천활동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족의 지위와 권력이 크게 올라간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는 조순의 주장이다. 이 법령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이 주목할 뿐아니라, 그것은 나중에 "조씨고아"의 비극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순은 진문공(晋文公) 중이(重耳)가 19년간 망명하고 있던 시기에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적(狄)의 땅에서 살았다. 조쇠가 망명후에 진나라로 돌아오고, 진문공의 딸 조희를 취하여, 조동, 조괄, 조영제를 낳았다. 조희는 현숙했다. 그리고 정실부인의 지위를 조순의 생모인 숙외(叔隗)에게 양보한다. 조순은 그리하여 조씨의 적자가 될 수 있었고, 종족을 거두는 직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공족대부가 설치되니, 그는 자신의 아들 조삭을 천거하지 않고, 조괄을 천거했다. 그리고 조동, 조영제, 조삭은 한등급 낮은 "공족여자(公族餘子)"로 천거한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진심으로 조희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지만, 그가 조씨가족내에서 여러 해동안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현실과 전도에 대하여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조괄이 종주권을 장악한 후 교만해지면서, 조괄,조동과 조삭, 조영제와의 감정이 나빠지고 서로 세불양립하는 국면이 된다. 이것도 물론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기원전601년 조순이 병사한다. 다음 해, 진성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거(據)가 즉위하니 그가 진경공이다. 이전에 잠복하고 있던 위기가 마침내 하나하나 폭발하게 된다.

 

진경공은 진성공처럼 명철보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대응방법은 경족들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그가 즉위한 삼년째 도는 대인 기원전597년, '조순시기군'이라는 옛날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이 일은 도안가가 꺼낸 것이 아닐 것이다(직무로 추정해보면, <조세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경공3년'은 순림보(荀林父)가 정경으로 승진했다. 순림보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또한 무슨 실질적인 제재조치를 취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조씨일가에 심리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고, 그때부터 조씨일가는 저자세로 변하게 되었다. 삼조정경(三朝正卿)의 후계자인 조삭은 비록 여전히 '경(卿)'의 직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하군장(下軍將)에 남아 있었고, 서열은 5위였다. 기원전589년의 명단을 보면 그의 직위는 이미 난서(欒書)로 대체되고, 조삭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이를 보면 이때 그는 이미 사망한 것같다.

 

기원전587년, 조영제는 조삭의 미망인 조장희와 간통했다고 고발당한다. 그리하여 종주(宗主) 조괄에 의해 진나라에서 축출된다. 조영제는 자신이 떠나면, 두 형이 정경 난서에게 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나, 조괄, 조동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좌전>에 기록된 인물의 대화는 왕왕 예언의 의미가 있다. 과연 몇년이 지나지 않아, 기원전583년, 조장희가 나서서 조동, 조괄이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하며, 난서, 극기가 즉시 나서서 증인을 선다. 조동, 조괄은 과연 광망자대(狂妄自大)했다(<좌전>은 기원전594년 '조동이 적(狄)의 포로를 주(周)에 바치면서 불경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두 사람은 안목이 좁아서, 당장의 안락에 만족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진경공은 조장희의 고발을 듣고 즉시 조동, 조괄을 토벌하도록 명한다. 경족중 한궐을 제외하고(한궐은 어려서 조순이 키워주었다), 모두 하궁에 대한 공격에 참가한다. 그 결과 조동, 조괄은 멸족당하고, 조씨의 종사(宗祠), 채읍(采邑)은 모조리 몰수된다. 조장의는 고발인으로서 그리고 진경공의 자매로서, 자연히 평안무사하게 아들을 데리고 '공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2년후, 한궐이 청함에 따라 진경공은 다른 경족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서자 조무를 후계자로 삼아, 채읍을 복원해준다."

 

이렇게 본다면, 정영, 공손저구가 무슨 '수고구고'했다는 류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던 일이 아닌가?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같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이다. 즉 <조세가> "삼년간 상복을 입고, 그들을 위하여 제읍(祭邑)을 마련해주고, 춘추로 제사를 모시며 대대로 끊이지 않게 했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조나라사람의 기록이다. 당나라때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하동의 조씨사당에는 별도로 한 곳을 마련하여(別舒一座) 두 사람을 제사지니고 있다." 조나라사람들이 다른 것은 거짓으로 조작했더라도, 조상의 제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집안의 제사에 혈연관계가 없는 외성인을 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상의 혈식을 박탈하는 것이니, 가장 큰 불경이 되기 때문이다. <오례통고>에는 정영, 공손저구에 대하여 '월족이사(越族而祀)'한 것에 대한 합법성을 다투는 변론이 나온다. 만일 '별서일좌'가 사실이라면, 그거은 분명 종족을 보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외인이기 때문이다. 조씨에 있어서, 조무의 대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존고(存孤, 고아를 보존하다)'라는 행위야말로 가장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다.

 

조무의 생년을 고찰해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조무는 "하궁지변"이전에 출생했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저 조장희가 간통한 기원전587년을 좌표로 하면, 간통에는 그것이 발전하고 들통나는데 일정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을 반년이라고 치자. 이전에 조장희는 조무와 함께 '삼년간 상복을 입었다(齊衰三年)' 이는 '참쇠삼년(斬衰三年)'의 바로 다음가는 등급의 복상이다. 조장희도 최소한 앞의 2년동안에 경거망동할 담량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합쳐보면, 윗글에서 언급한 기원전590년, 기원전589년이 조무의 생년이라고 보더라도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시 <조세가>의 '유복자'라는 글을 보면 조삭은 조장희가 임신했을 때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추리하면 유일하게 낼 수 있는 결론은 이러하다: 조장희는 가족내부에서 조동, 조괄의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조삭이 사망한 것을 이용하여 조무의 생명을 빼앗고자 했다. 그리하여 조삭의 명의로 되어 있는 채읍과 권력을 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영, 공손저구가 힘을 쓸 여지가 생겼고, 고아를 궁밖에 숨겨두고, 다른 영아로 바꿔치기해서 위험을 막았다는 것도 모두 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영아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에서 민간의 송사가 되고, 그리하여 사구 도안가가 관여할 여지가 생겼을 것이다(<국어>에 따르면 진문공때 도안이(屠岸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안가는 그의 후손일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조영제의 알선이다. 공손저구가 생명을 댓가로 내놓고 조씨고아는 마침내 평안하게 모친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정영은 자살로 친구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조삭의 갈래는 이 두 사람을 제사대상으로 삼았다. 반란은 멸문의 죄명이다. 조장희가 거짓으로 조동, 조괄을 고발하였다면 그것은 두 사람을 사지로 모는 것이다. 단순히 애인과 갈라놓았다는 것때문이라면 그렇게까지 심한 독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심구대한(深仇大恨)'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송신종(宋神宗)은 조씨가 대송의 국성이므로, 정영, 공손저구에게 공로가 있다고 보아, 산서 태평(지금의 양분)에서 두 사람의 묘를 찾아내어 그들을 후(侯)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준다. 지금 고아를 숨겼다고 알려진 곳은 천리가 떨어진 우현(盂縣)이다. 우현은 진나라 동부의 변방읍이고, 당시에는 적(狄)인들이 거주했다. 적인은 바로 조삭의 외가이다.  이렇게 보면 정영은 확실히 아이를 산에 숨겼을 수 있다. 다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되돌아와서, 조장희가 숙백과 간통하고, 무고를 한 것은, 조씨가족 내부의 피비린내나는 다툼이다. 이건 어쨌든 집안을 망신시키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감추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추측이 성립한다면, 우리가 보는 <조세가>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