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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151

두 "국사(國師)"의 타이완무력통일 선전선동: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글: 부란극림(富蘭克林) 옛날 단군왕(端郡王), 서동(徐桐), 강의(剛毅)같은 자들이 서태후를 선동하여 의화단(義和團)에 대한 요언을 믿게 만들어, 열국이 동교민항에 설치한 공사관을 공격하게 했으며, 더더구나 11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 우매함은 전세계가 깜짝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당연히 최종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국가의 손실이 4억6천만냥백은에 이르렀다. 그리고 외국에서 대량으로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중국은 철저히 반식민지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정치정확"을 주장하며 애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던 간신과 폭민들이 국가에 가져온 비극적인 결과이다. 중국은 여럽사리 여러 해동안의 .. 2021. 10. 25.
광서제의 죽음(3): 광서제와 서태후의 은원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대청의 첫손가락 꼽히는 권력자로서 국가관리층면이나, 개인은원이나 살인동기나 실행능력을 볼 때, 서태후가 최종집행자일 것이다. 그녀로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광서제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실패할 위험도 없다. 첫째, 국가관리층면을 보자. 광서제가 이끄는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그는 일찌감치 폐인이 되었다. 심지어 상징적인 대우마저도 크게 줄어든다. 백일유신시기에 그는 조조를 핍박하는 한헌제와 같았다. 힘이 없는 황제는 되지 않겠다고 물러나겠다고까지 밀어부쳤다. 서태후는 그러나 네가 황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열강이 막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황위를 바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을 때 부의를 황제로 결정했다. 국가관리층면에서 광서제가 할 일은 없었다. 살아남겨두어도..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2): 광서제는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 각종 광서제의 사망에 대한 전설중에서, 주류는 3가지이다. 이연영살해설, 원세개살해설, 서태후살해설. 어쨌든 그의 죽음은 너무나 기이하고 수수께끼였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전설중 신뢰도가 가장 낮은 이연영살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 전문적으로 소개할 필요도 없이, 청나라궁중드라마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이연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청나라의 스타태감이다. 그는 서태후 곁에서 잘나갔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오른팔 왼팔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서태후를 미워했던 광서제는 죽기 전에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행세하는 주구나 방흉이 더욱 미운 법이다. 그래서 자신의 흉험한 처지를 알게 된 이연영이 그 정보를 서태후에게 알리고, ..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2021. 9. 16.
누가 서태후로 하여금 서방열강에 선전포고하게 하였는가? 글: 후유(煦濡)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각국에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내린다. 서태후는 서방열강의 여러가지 죄행을 나열했다. "삼십년동안, 우리나라가 인자하고 후덕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빌미로 그들은 갈수록 발호하며 우리나라를 핍박하며, 우리의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이라고 하면서 예의없이 횡행하고 병력과 무기의 날카로움을 믿고 이렇게까지 했다." 서태후는 이렇게 분노를 표시한 후,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선전구호를 내놓는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기보다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아야 한다!" 이 선전포고를 전환점으로 하여, 청정부는 정식으로 서방열강과 갈라지고, 중국과 서방열강의 전.. 2021. 6. 22.
"팔국연합군": 중국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 글: 유기곤(劉淇昆) 팔국연합군의 전투는 중국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중국근대사이다. 팔국연합군이 왜 북경으로 진군했는가? 두 마디로 개괄할 수 있다: (1) 청나라조정이 서방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이 전쟁은 청나라조정이 일으킨 것이고, 서방각국은 응전했을 뿐이다), 외국연합군은 대고구(大沽口)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진격했다. 이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닌가. (2) 서방각국은 중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북경에 진군해서,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하는 외에, 주로 경성에 갇혀 있던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구했다. 글쓰는데 편의를 위해 먼저 이 전쟁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로 하자. "팔국연합군"은 전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팔국연합군침화전쟁"은 흑백이 전도된 말이고, 역사를 강간하는 것이니.. 2021. 1. 9.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올 때, 서태후는 왜 서안으로 도망쳤을까? 글: 장금(張嶔) "중국인들은 수도를 점령당하는 치욕과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경자국난(庚子國難)'때 서태후가 서안(西安)으로 도망친 것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안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서태후의 이번 소위 "서수(西狩)"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첫째는 서북대지는 사상유례없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서수"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산서(山西)는 '경자국난'전에 이미 여러 해동안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밭이 메말랐고' '보리싹이 시들었다' 산서의 전체 35개 주현(州縣)은 재해를 당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가 '도망쳐 숨은' 서안은 어떠했을까? 섬서는 재해를 당한 주현이 더욱 많아서 60여곳에 .. 2020. 12. 15.
사격격(四格格): 만청제일미녀(晩淸第一美女) 글: 독보심해유(獨步深海遊) 중국역사상의 미녀를 얘기하자면, 대다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대미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예뻤는지를 말하자면, 고대인들은 그저 구름잡는 표현을 썼다. 그녀들은 "침어낙안(沉魚落雁)"이라든지, "폐월수화(閉月羞花)"라든지. 이런 말은 현재인들이 보기에 약간 과장된 것같지만, 약간 상상을 해보면, 그래도 여전히 용모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여자의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문구를 얘기하자면, 조위의 문학가 조식의 그 를 꼽아야 할 것이다. 조식은 에서 낙신의 용모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모습(天人之姿)로 묘사했는데, 후세의 무수한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에게는 고대인들의 미녀에 대한 찬미가 과장된 점이 있다고 느낄 것이.. 2020. 10. 14.
중국 전외교관: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워서는 안된다" 글: 원남생(袁南生) (전 북경외교학원당위서기 겸 상무부원장, 주짐바브웨대사, 주수리남대사,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우지 않는다. 이는 중국 천년외교의 기본철칙이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사방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은 가장 멍청한 외교전략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역사적 사실은 증명한다. 여러나라와 동시에 싸우는 것은 국가외교의 재난일 뿐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재난이 된다. 여러 나라들과 동시에 싸워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심도있게 살펴보는 것은 이론적인 의미뿐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도 있다. 사방수적(四方樹敵) 루견불선(屢見不鮮) 외교적으로 사방에 적을 두고,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우는 현상은 중국고대외교사상에서 여러번 발생했다. 근대이래만 하더라도 여러번 나타났다. 1900년 6월 21일, .. 2020. 9. 13.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허수아비황제의 비참했던 동년시절 글: 지역사(知歷史) 나라의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덩달아 높아졌다. 여유시간도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이런 좋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 세대의 행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젊은이들은 인터넷드라마의 영향을 받아 고대인의 생활을 선망하기도 한다. 고대로 타임슬립해서, 지금 배운 학식을 가지고 고대에서 큰 뜻을 펼쳤으면 하는 것이다. 기실 우리도 고대영화드라마에 조금 속았다. 고대인의 생활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등급이 삼엄한 봉건통치사회하에서 사람의 생활은 비교적 힘들었다. 잘 살았던 것은 단지 일부 왕공귀족의 통치계급이었고, 평민백성의 생활은 힘들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고대로 타임슬립하여 왕자, 공주가 되었으면 한다. 심지.. 2020.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