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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금융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by 중은우시 2022. 8. 22.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을 때,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거의 동시에 근대화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문명개화'의 종을 울렸고, 대청의 양무운동도 이때 막 일어나고 있었다. 병기공장, 민용공장이 이 오래된 나라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이 심도있게 진행되자, 공업건설의 자금조달문제가 점점 공장건설, 철로건설의 발목을 잡았다. 전장표호(錢莊票號)를 지주로 하는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으로는 갈수록 근대공업의 대량의 자금수요를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행정기관의 집단적인 부패도 자금운용의 효율을 저하시켰다. 이때 서양인들은 조약에 따라 통상구안(口岸)에 신식 은행을 설립하고, 높은 효율과 청렴한 금융운용방식으로 양무운동의 지도자인 이홍장의 주목을 받는다.

 

광서11년(1885년) 팔월, 이홍장은 서태후에게 관영은행을 시험운영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관영은행은 호부(戶部)와 지방관청의 재정권과 관련되므로, 이홍장도 이 일은 반드시 반대에 부닥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미리 순친왕 혁현(奕譞)과 소통하여 관영은행을 설립하는데 대한 의견일치를 이룬다. 두 사람은 이 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이홍장은 대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양무지도자이자 봉강대리(封疆大吏)의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황제의 생부인 순친왕 혁흔은 이때 인생의 최고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청의 최고의사결정권자인 서태후도 관영은행에 대하여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홍장과 순친왕이 손을 잡고, 서태후가 지지한다면, 관영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때 경성에는 관영은행의 설립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났고, 관영은행의 전망은 어두워진다.

 

2. 호부와 어사(御史)가 관영은행에 반대하다.

 

서태후의 뜻을 받들어, 이홍장과 순친왕은 호부의 관리들과 관영은행 설립건을 상의한다. 그런데, 숭기(崇綺), 액륵화포(額勒和布), 염경명(閻敬銘)을 대표로 하는 호부가 결사반대한 것이다. 쌍방의 이견은 주로 관영은행에 서양인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냐의 점에 있었다.

 

서양인이 관영은행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확실히 민감한 이슈였다. 다만 이홍장은 청나라의 관료는 부패가 심각하고, 중국의 관료나 상인은 모두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관영은행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신용이라고 여겨, 서양인의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부관리들은 관영은행은 반드시 호부가 주재해야 하며, 서양인의 참여는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실, 호부도 완전히 관영은행설립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관영은행을 설립한 후, 자신들의 재정권이 침해받을까 우려한 것이다.

 

호부와 타협점을 얻어내기 위해, 순친왕은 호부에 절충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호부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서태후가 직접 액륵화포, 염경명을 불러 그들에게 은행을 설립하는 것의 유리한 점을 말해주면서 다시 한번 신중하게 고려해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호부는 절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12가지 목록을 올리면서 관영은행의 폐단을 제시한다.

 

호부의 목록을 보면, 그들이 관영은행의 설립에 반대하는 이유는 서양상인들이 현물은량을 받고, 종이돈을 발행하여, 은량을 외국으로 빼내가는 것을 우려하는 것등등이었다. 이홍장과 순친왕은 정면으로 호부의 주장과 우려에 대응했다. "각성의 세수를 관영은행을 통해서 받을 것인지는 각 성이 각자 알아서 결정하면 된다" 그리고 관영은행이 "은정을 받더라고, 서양돈은 받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말했지만, 호부는 죽기살기로 반대했다.

 

호부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문해(文海)를 대표로 하는 어사들도 관영은행을 결사반대한다. 조정의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서태후도 동요한다. 중국최초의 관영은행 시범사업은 이렇게 흐지부지된다.

 

3. 이홍장은 다시 상업은행을 추진하다.

 

이홍장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관영은행이 실패하자, 즉시 지방상업은행설립으로 전환한다. 이전에 관영은행은 조정의 지지즐 받지 못했으므로, 그는 이번에는 국외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선회한다.

 

광서13년(1887년), 미국 필라델피아재단이 미건위(米建威)를 중국으로 보내 미중합작은행건을 논의한다. 쌍방은 화미은행(華美銀行)에 대한 의향서를 채결한다. 회담이 끝난 후 중국측은 마건충(馬建忠)을 미국으로 보내 상세한 정관을 논의하고, 관련건을 처리한다.

 

얼마 후, 이홍장은 사적으로 서양상인과의 합자은행건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경성에 전해진다. 일시에 경성의 상하에서는 의론이 분분했고, 이홍장이 권력을 남용하고 국가이권을 팔아먹는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중 이홍장에 대한 비판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은 바로 어사를 위시한 소위 청류(淸流)들이었다.

 

"인민무외교(人民無外交)" 인민은 외교권한이 없다. 봉강대리로서 조정의 비준을 받지 않고 외국인과 교류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월권행위였다. 이는 관료로서의 금기였다. 그리하여, 이 일은 즉시 조정의 주목을 끌고, 이홍장에게 사실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간다.

 

어사들의 탄핵은 서태후의 입맛에 맞았다. 신하들이 부정부패하는 것은 괜찮지만, 월권은 절대 안된다. 그리하여 군기처에 사백리가급(四百里加急)으로 이홍장에게 통지하여 은행설립건을 중단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서태후의 태도는 이미 확고했다. 이홍장은 그저 "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상업은행도 이렇게 도중에 중단되고 만다.

 

4. 자체은행설립의 후속: 물시인비(物是人非)

 

청류들이 은행설립을 반대하고 이홍장을 탄핵한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근거가 있는 것일까?

 

원래, 그들이 탄핵한 근거는 상하이에서 전해져온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은행설립계약의 문제점들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문제점리스트와 화미은행의향서의 조항을 비교해보면, 이 리스트중 많은 것은 사실을 곡해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사들은 은행을 설립함으로서 이익을 취하려 했다고 주장한 "북양대신이 차입할 때는 이자가 없다. 중국국가가 차입할 때는 이익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 의향서에는 국가차입부분은 없다. 유사하게 사실을 왜곡한 내용이 아주 많다. 어사는 진위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공격한 것이며, 서태후도 그들의 말을 믿고, 이 일을 중단시킨 것이다. 1897년 성선회(盛宣懷)가 주청을 올려 통상은행을 개설할 때까지, 거의 10년간, 자체은행설립건은 다시 논의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의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했고, 동광중흥으로 가져온 회광반조도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후, 은행을 포함한 외국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대청은 자체은행설립의 절호기회를 놓치고 만다. 3년후, 팔국연합군이 중국으로 쳐들어오고, 청나라조정은 마침내 신정(新政)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1904년 최초의 관영중앙은행인 호부은행을 개설한다. 이때는 이홍장이 관영은행설립을 주장한 때로부터 이미 20년이 지난 때였다. 이웃나라인 일본은 이미 중앙은행, 지방은행, 상업은행등을 포함한 완비된 은행시스템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당시 거의 같은 출발점에 서서 근대화의 꿈을 꾸었던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이때 그 차이가 이미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1904년 호부은행이 설립되는데, 이홍장은 이미 사망한지 3년이 지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