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만두설(饅頭說)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 6월에 "선전포고"를 하여, 조정을 뒤흔들었다. 7월, 천진이 함락되고, 8월 북경이 포위된다. 팔국연합군은 성밖에서 보무당당했다. 8만의 청군은 성안에서 싸울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당초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던 그 여인(서태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친다.
1
1900년 8월 14일 정오, 최옥귀(崔玉貴)는 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최옥귀는 궁내의 태감중 2인자였다. 원래 그는 밖에서 서태후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을 가시며 아편을 피우는 시간에 들어가서 "선패자(膳牌子)"를 청하는 일을 했다('선패자'는 태후 혹은 황제가 식사할 때, 접견을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패를 바쳐서 선택하도록 하는 일을 가리킴). 그런데, 서태후는 그에게 이런 분부를 내린다:
"미정시각(未正時刻)에 진비(珍妃)를 소견(召見)하겠으니, 그녀로 하여금 이화헌(頤和軒)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법도대로라면, 비(妃)를 소견하는 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최옥귀는 조금 고민한다.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이화헌의 관사태감 왕덕환(王德環)을 불러서, 함께 경기각(景祺閣) 북쪽의 단독 소원(小院)으로 간다.
이 소원은 "동북삼소(東北三所)"라고 불리는 곳이다. 자금성의 가장 북쪽에 있으며, 원래 명나라때 궁중의 유모들이 나이들고나서 거주하는 장소였다. 진비는 서태후의 진노를 사서 이곳에 거주하도록 명받은 것이다. 소원의 정문은 꼭 잠겨 있었고, 내무부(內務府)의 십자 봉조(封條)가 붙어 있었다. 진비는 북방(北房) 세 칸의 가장 서쪽에 있는 칸에 거주했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식사나 세숫물등은 모두 하인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넣어주고 있었다.
그렇다. 기실 진비는 바로 소위 "냉궁(冷宮)"에 갇힌 것이다.
최옥귀로부터 명을 전해들은 후, 진비는 단장을 마친 후, 최옥귀와 왕덕환을 따라 이화헌으로 간다. 비록 단장을 하기는 했지만, 진비는 분을 바르지도 않았고, 장신구를 하지도 않았다. 담청색의 비단치파오를 입고, 묵록색의 비단신(蓮花底는 허용되지 않았다)을 신었다. 완전히 죄를 진 비빈의 복장이었다.
이화헌에 도착하니, 서태후는 이미 거기에 좌정해 있었다. 곁에는 시녀가 한명도 없었다.
머리를 숙여 안부인사를 드린 후, 진비는 거기에 꿇어앉아 서태후의 훈시를 들을 준비를 했다. 방안에는 개미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바늘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서태후는 돌연 말을 꺼낸다.
"서양인들이 성으로 쳐들어 온다. 바깥은 어지럽고, 아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만일 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황실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고,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게 된다. 너도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진비는 멍했다. 그리고 말한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상들에게 면목없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서태후가 말한다:
"너는 젊어서, 일이 생기기 쉽다. 우리는 도망칠텐데, 너를 데리고 가기는 어렵다."
진비도 말이 세진다.
"당신은 피난가시더라도, 황상은 경사에 남겨서 대국을 주재하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서태후는 안색이 크게 변한다.
"너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직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비가 대답한다:
"저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서태후가 말한다:
"너에게 죄가 있든 없든, 너는 죽어야 한다!"
진비도 목소리가 올라갔다.
"전 황상을 한번 뵈어야겠습니다. 황상은 나를 죽게 하지 않을 겁니다."
서태후가 콧방귀를 뀐다.
"황상도 너를 구해줄 수 없다. 이 년을 우물에 던져 넣어라. 여봐라!"
곁에 서 있던 최옥귀와 왕덕환은 서태후의 명을 듣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함께 끌고 밀면서 진비를 정순문(貞順門) 안의 그 우물가로 데려간다.
최옥귀는 한편으로 밀면서 한편으로 말한다:
"소주인 먼저 내려가십시오. 저도 곧 당신을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진비가 노하여 소리친다:
"넌 자격이 없다!"
진비는 우물에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한마디는 이러했다:
"황상, 내세에 다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2
8월 15일 새벽 3시경, 하영아(何榮兒)는 고양이소리를 듣는다.
하영아는 서태후를 모시는 시녀이다. 그날 저녁은 마침 그녀가 당번이었다. 자금성안에는 들고양이가 많았다. 밤에 고양이울음을 듣는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영아는 오늘 저녁의 고양이울음은 아주 특별한 것같았다.
먼저, 고양이울음의 끝이 매우 길었다. 일반적인 들고양이들은 그렇게 긴 울음을 내지 못한다. 다음으로, 처음에는 정동쪽에서 고양이소리가 들렸는데, 어마 지나지 않아, 동남쪽에서도 들려왔다. 다시 시간이 조금 지나니 동북쪽에서도 고양이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면팔방이 모두 고양이울음소리같았다.
낮에 진비가 우물에 떨어져 죽은 일은 이미 궁안에서 비밀리에 소문이 돌았다. 하영아는 담량이 적었고,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비가 억울하게 죽었으니, 원혼이 흩어지지 않고, 누군가를 찾아서 복수하려고 한다고 여겼다.
4시경, 하늘이 천천히 밝아왔고, 서태후는 잠에서 깼다.
이때, 고양이울음은 약해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사방팔방에서 나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마리의 들고양이가 쉬지 않고 울부짖는 것같았다. 서태후고 기괴하다고 여겼다. 사람을 시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한다. 그러나 나간 사람은 고양이 그림자도 보지 못한다.
이때. 이연영(李蓮英)이 급히 뛰어들어왔고, 서태후를 보자 바로 소리친다:
"귀자(鬼子)가 성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서태후도 깜짝 놀란다. 이연영에게 자세히 말해보라고 한다. 이연영은 자신이 들은 보고내용을 하나하나 노불야(老佛爺, 서태후)에게 아뢴다:
"독일 귀자가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왔고, 일본 귀자가 동직문(東直門)으로 쳐들어오고, 러시아 귀자가 영정문(永定門)으로 쳐들어왔으며, 천단(天壇)이 포위되었습니다. 모두 자금성을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총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때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밤중의 소위 '고양이울음'은 기실 각종 총알이 발사되어 자금성의 상공을 날아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전에도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은 계속 전해졌지만, 서태후를 포함한 궁내의 사람들은 그래도 전황에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환상은 이날 마침내 깨지고 만다.
이연영의 보고를 듣고, 서태후는 얼굴이 굳어진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이리저리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노불야가 말을 하지 않으니,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모두 숨을 멈추고 거기에 서 있었었으며, 어떻게 해야좋을지 몰랐다.
순식간에 아침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노불야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아마도 심정이 조금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이때 돌연 '펑'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 유탄이 낙수당(樂壽堂) 서편전(西偏殿)의 지붕에 떨어진 것이다. 포탄에 맞아 지붕의 기와들이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지붕을 쳐다 보았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연영이 돌연 소리쳤다:
"노불야! 빨리 떠나시지요!"
만일 그 유탄이 서태후의 마지막 구명도초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면, 이연영의 외침은 서태후가 결심을 내리게 하는 집합나팔이었다.
서태후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황상을 불러라. 황후를 불러라. 태비, 소주, 거거(格格)들에게 말을 전해서, 모두 낙수당으로 모이라고 해라. 그리고 원래 황저(皇儲, 후계자)로 앉히려고 했던 대아거(大阿哥) 부준(溥儁)에게도 전해서 보따리를 싸라고 해라."
서태후는 마침내 결정한 것이다. 도망치기로.
3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서제(光緖帝)가 묵묵하게 태감을 따라 이화헌으로 온다.
광서제가 아직 황제의 복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서태후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급히 이연영에게 몇 벌의 옷을 가져와서 황상을 갈아입히게 한다. 이연영은 즉시 부하를 시켜 가져오게 하고, 그후 자신이 붉은 색의 보따리를 꺼내와서 연다. 그것은 서태후가 갈아입을 옷이었다.
한 세트의 짙은 남색의 괘자(褂子), 옅은 남색의 고자(褲子), 새 방퇴대(綁腿帶), 새 백색 양말과 한쌍의 흑포 신발. 의복은 서태후가 살짝 살이 쪄서 몸에 끼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몸에 잘 맞았다.
이연영이 보자기를 여는 찰나 방안의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있었다: 서태후는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이연영이 어떻게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겠는가?
사실은 확실히 그랬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모두 이연영이 궁밖에 살고 있는 자신의 누나를 통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의복만 갈아입는 것으로는 안된다. 머리모양도 바꿔야 한다. 관건적인 순간에, 이연영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서태후의 머리를 만져준다. 비록 이연영은 생긴모습이 거칠지만, 서태후를 모시는데는 경교영동(輕巧靈動)했다. 모든 일을 아주 적절하게 처리했다.
그는 서태후의 머리카락을 푼 후에, 뜨거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데운 후, 뒤로 보낸 다음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묶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비녀를 꽂고, 변발모양으로 틀며, 머리모양을 갖춘다. 순식간에 서태후는 한족 중년부녀의 머리모양으로 바뀐다.
광서제는 이때 옷을 다 갈아입었다. 짙은 남색의 의삼, 검은 바지, 작은 삿갓, 겉으로 보기에는 장사하는 일꾼같아 보였다.
준비를 마친 후, 서태후는 돌연 한가지 중요한 일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시녀 하영아를 부른다.
"가위를 가져와라!"
그리고 등을 돌려, 왼손을 탁자의 모서리로 뻗은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손톱을 잘라라!"
서태후는 그때 매우 신경써서 그녀의 손톱을 길렀다. 특히 그녀의 왼손 무명지와 소지의 손톱은 이미 양촌(兩寸)여의 길이로 자랐다. 원래 그녀는 이것이 태후의 부귀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지금 그녀는 이런 손톱은 도망치는데는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톱을 자르다. 서태후는 결연한 마음으로 떠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한가지 중대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어싿.
누가 그녀와 함께 가고, 누가 남을 것인가?
4
수행인원에 대하여, 서태후는 일찌감치 계획이 있었다.
광서제와 융유황후(隆裕皇后)는 분명히 같이 간다. 한 무리의 소주와 거거들도 불려왔으니 함께 갈 것이다. 그러나 불러서 옷을 갈아입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의 며느리, 동치제의 유귀비(瑜貴妃)와 진귀비(瑨貴妃).
서태후가 두 귀비에게 내린 임무는 그녀가 떠난 후 자금성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 이건 서태후가 그녀들을 신임해서 맡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절대로 좋은 임무도 아니라는 것을. 당시 모든 사람의 예상대로라면, 서양인들이 자금성으로 쳐들어온 후에는 방화약탈강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두 귀비는 아마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던지, 아니면 구차하게 살아남아 서태후에게 "황실을 욕보였다"는 이유를 들어 죽임을 당하던지.
서태후는 그녀의 곁을 지키는 시녀 하영아와 연아(娟兒)는 모두 데려간다. 이 두 시녀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감격하여 통곡을 한다. 다만 적지 않은 시녀와 태감들은 따라가지 못했다. 예를 들어 장복(張福)이라고 부르는 늙은 태감같은 경우이다. 그는 외랑(外廊)에서 건물안으로 기어들어와 서태후의 발아래 엎드려 있는 힘껏 머리를 조아리면서 울면서 호소한다:
"노재(奴才)는 늙어서 쓸모가 없어, 노조종의 외순을 모실 수 없습니다. 먼저 노조종께 절을 드려 노조종의 만사여의를 축원합니다!"
장복이 이런 행동을 하자, 건물안의 모든 사람들이 장복을 따라 통곡하기 시작한다.
서태후도 얼굴에 비통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다잡고 사방을 둘러보며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궁안의 일은 유귀비, 진귀비 두 황귀비의 말씀을 들어라. 장복, 진전복(陳全福)은 낙수당을 지켜라. 장복, 잘 들어라, 많은 곤란한 일이 닥치더라도 마음을 좁게 먹지 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마지막 당부를 마치고, 서태후는 사람들을 이끌고 이화헌을 돌아 정순문(貞順門)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진비가 빠져죽은 그 우물을 지나간다.
청나라조정의 법도대로라면, 궁안의 비빈은 정순문을 한걸음도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정순문의 문턱앞에 이르면 배웅하는 궁녀, 태감들은 모두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일시에, 곡성이 사방에서 울린다. 떠나고 남은 궁녀와 비는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 영아와 연아 두 시녀는 다른 자매들이 준 7,8건의 선물을 받는다. 그녀들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사람들은 마치 죽기 전에 유물을 건네주는 것과 같았다.
오전 8시경, 서태후와 광서제의 가마들이 덕승문(德勝門)을 나선다. 이 문의 원래 의미는 이 성을 나서서 전쟁을 벌이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자금성안에 남은 궁녀와 태감들은 비록 아주 불안했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기실 남은 것이 행운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자금성밖의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일찌기 8월 13일, 왕의영(王懿榮)은 죽을 준비를 마쳤다.
왕의영은 광서6년의 진사(進士)이고, 저명한 서예가이며 금석학자이다. 8국연합군이 북경을 포위했을 때, 그의 직위는 "경성단련대신(京城團練大臣)"으로, 경성의 동편문(東便門)의 방어를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그가 가진 것은 나이들고 병약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부족한 무기뿐이었다. 왕의영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사수했고, 결국 성문은 함락된다.
8월 14일, 왕의영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한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후 처와 자식들과 함께 탄금(呑金)자살하려 한다. 그러나 독성발작이 늦자, 아예 독약을 직접 마신다. 그래도 죽지 않자, 세 사람은 결국 우물에 몸을 던진다.
만일 이번 사변만 아니었다면, 왕의영은 중국의 상고문화연구에 더욱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는 최초로 갑골문을 발견하고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8월 16일 오전 보풍(寶豊)도 이미 세상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보풍은 종실 정남기(正藍旗) 제8족 재(載)자 배분이다. 광서15년의 진사로 한림원 서길사의 직을 받았다. 그가 그후 주목을 받은 것은 '대아거'로 임명된 부준의 스승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태자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직위였다.
8월 15일, 부준이 서태후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쳤으며, 자신은 그 대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보풍은 비분한 나머지 죽을 생각을 한다. 다음 날, 보풍은 "충효절염(忠孝節廉), 본호천성(本乎天性).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오호보풍(嗚呼寶豊), 부실기정(不失其正)"이라는 24자의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당시 나이 53세였다.
보퐁과 같은 종실로 수부(壽富)도 있다. 그는 광서24년 진사였고, 역시 한림원 서길사를 받았다. 그는 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8월 17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킨 다음 날, 수무는 동생 수번(壽藩) 및 두 여동생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당시 서양인들이 이미 부근까지 쇄도해 들어왔고, 수부는 약효가 늦게 발작할까 우려하여,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수부는 체중이 많이 나가서, 밧줄이 끊어져 버린다. 나중에 동생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매어 자결한다. 동생 수번은 형을 보낸 후, 다시 두 여동생을 도와 밧줄을 매어 자살한다. 그리고, 함께 죽기를 원하는 노비 융아(隆兒)를 도와 밧줄의 매듭을 매어주고, 그녀들이 전부 자살한 후, 자신도 목을 매어 자결한다.
수부는 자살전에 3수의 절명시를 남긴다. 그중 한 수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곤곤제왕담기조(衮衮諸王膽氣粗), 경장혈기상홍도(竟將血氣喪鴻圖)
청간국파가망후(請看國破家亡後), 도저서생시장부(到底書生是丈夫)
'서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어전시위(御殿侍衛) 혁공(奕功, 건륭제의 17째아들 영린(永璘)의 손자)은 북경성이 함락된 후, 일가족 처첩자녀 10명을 데리고, 후원에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자결하려 했다. 두 여성은 불에 타서 죽지 않자, 불구덩이에서 뛰쳐나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당연히 모든 귀족대신들이 '순절'을 하려 하지는 않았다.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 서동(徐桐)은 이전에 서태후에게 선전포고를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북경성이 함락될 때, 그는 스스로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면목이 없다고 여겨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자결할 준비를 한다. 자진하기 전에 그는 그의 셋째아들인 형부좌시랑 서승욱(徐承煜)을 골라 그와 함께 죽자고 한다.
서동은 '무술변법'때 유신파를 공격함으로써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고, 그는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시키도록 주장했고, 나중에는 의화단의 힘을 빌어 외국에 선전포고하도록 강력히 주장했다.
부자 두 사람은 모두 밧줄을 목에 매었고, 바닥의 등받이없는 의자를 밀려고 할 때, 돌연 서승욱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곡을 하며 말한다:
"만일 제가 먼저 죽으면 부친꼐 효도를 다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 다시 죽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들은 절대 살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서동은 안심하고 의자를 밀었다. 그런데, "충효양전'을 약속했던 서승욱은 부친을 급히 매장한 후, 일반백성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도망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일본인에게 체포되어 다음 해에 채시구에서 참수당한다. 서승욱은 1년간 구차하게 더 살았는데, 이를 통해 "효경(梟獍)"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효"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이다.
이들 만청의 귀족과 관리들은 순절했건 변절했건, 혹은 도망갔건 숨었건, 그리고 경성의 백성들이 팔국연합군에게 어떻게 살인약탈방화강단을 당하건, 서태후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가마행열은 이미 순조롭게 북경성을 빠져나왔다.
6
8월 17일 오영(吳永)은 연경주(延慶州)의 주인(州印)이 찍힌 공문을 받는다.
그는 하찮은 회래현(懷來縣)의 지현(知縣)이어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일생에 '공영성가(恭迎聖駕)'할 자격을 갖게 될 줄은. 통보에 따르면, 서태후와 광서제 '양궁'의 가마행렬이 그가 다스리는 북경에서 100킬로키너 떨어진 회래현에 도착하니 접대할 준비를 잘 해놓으라는 것이었다.
더더욱 오영을 황공하게 만든 것은 그 공문에서, 접대의 식사기준을 쓰여 있다는 것이다:
서태후, 광서제, 경친왕, 예친왕은 반드시 만한전석 1탁, 이어서 각종 왕야, 패자(貝子), 군기대신등은 모두 일품과(一品鍋)를 준비할 것.
자그마한 회래현에 전란의 고통과 흉년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가를 맞이할 때 오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가 준비한 자신이 거처하는 소박한 거처에도 서태후는 아주 만족했던 것이다. 그가 준비한 이미 세상을 떠난 모친이 입었던 의복으로 서태후가 갈아입은 후 아주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저녁으로 그저 향신(鄕紳)들이 보내온 닭고기 ,오리고기를 준비했다. 그런데도, 서태후, 광서제와 왕공귀족들은 모두 맛있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오영은 모르고 있었다. 북경성을 빠져나온 후 며칠동안, 서태후 일행은 저녁에 그저 낡은 집에서 자야 했고, 모기에 물리고 무더위에 고생했다. 비옷등 도구는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에 젖은 후에도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먹을 것을 발견하지 못해 서태후가 먹은 것은 밭에서 가져온 옥수수와 감자들로 겨우 끓인 죽이었다. 젓가락도 없었다. 그래서, 보리대를 꺾어서 대신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서태후부터 왕야까지 그리고 지방관리들까지 모두 마음 속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체면만 최대한 충족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종이위에서만이라 하더라도.
회래현에 도착하고부터, 서태후 일행은 마침내 황실의 위엄과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가 이끄는 5개월에 이르는 "서도(西逃)"(아니 "서수(西狩)"가 공식명칭이지만)는 이렇게 시작된다.
8월 14일 한밤중에 북경성은 비가 내렸다.
당시 순천부윤(順天府尹, 북경시장에 상당함)이던 진변룡(陳變龍)은 나중에 그의 <몽초정잡기(夢蕉亭雜記)>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것은 의화단(義和團)의 한 "대사형(大師兄)"이 한 말이다:
"우리들은 착한 백성이다. 만일 하늘이 반달만 먼저 비를 내려주어서, 온 들판에 물이 충분하면, 일찌감치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농사일을 해아지, 어디 북경으로 와서 이런 짓을 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진변룡의 말에 따르면, 의화단이 북경으로 온 것은 대체로 가뭄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멀리 북경까지 와서 "멸양부청(滅洋扶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진변룡은 당연히 의화단의 동기를 단순화했다. 의화단의 구성원은 아주 복잡하다. 소위 "위로는 왕공경상(王公卿相)부터 아래로는 창우예졸(娼優隸卒)까지 거의 의화단에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동기도 단순히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충군' '배외' 미신'등 사상외에 대다수의 의화단원들의 소박한 애국사상도 무시할 수 없다.
당연히, 의화단운동은 마지막에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한 소동"으로 끝난다. 확실히 여러가지 반성해야할 부분들이 많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해야 한다: 의화단폭동을 종용하고 격려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청정부였다.
직접 북경성에서 외국사절들을 죽이고, 사람들에게 외국의 공사관을 포위공격하도록 호소하고, 서양인과 부녀자 아동을 죽이는 댓가까지도 공개할 때, 전면에 나선 것은 의화단이었다. 그러나 배후에서 밀어준 것은 청정부였다.
팔국연합군은 당연히 지금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의의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이 보호한 "서양인"은 이전에 여러 분야에서 중국의 주권을 짓밟은 사람들이다. 그후 연합군이 북경성에서 범한 여러가지 죄행은 그들 본국의 매체들조차도 보도와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반드시 인정해야할 것은, 원래 우리가 당당하게 방망이를 들었지만, 나중에는 어찌된 일인지 칼을 건네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판도라의 상자가 일단 열리자, 연 사람도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의화단이 북경으로 들어와 서양인을 죽이면서 동시에 일부 의화단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기도 하고, 자기들까지 서로 죽였으며, 나아가 부녀자를 간음하고, 상가를 약탈하며, 도처에서 방화를 저질렀다. 한 서양약방을 불태워버리기 위하 북경전문의 4000여개의 상점이 모조리 의화단에 의해 불타버린다.
일이 터지자 서태후는 도망쳐 버린다. 명목상으로는 "서수"이고, 가는 도중에 지방관아에 "만한전석"을 준비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녀의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북경성이 있었다.
오늘날로 돌아와보자.
오늘이 8월 15일이다. 역시 중요한 기념일이다. 77년전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만일 각도를 바꾸어 되돌아보면,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당초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한 내각이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국내의 열광적인 군국주의분자들에 의해 영향받고, 움직이고, 무너지게 되었는지. 결국 일본의 전체 국민이 브레이크없는 풍광전차에 올라타게 되어,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며 만장절벽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다.
지금의 중국은 일찌감치 외국에 괴롭힘을 당하던 그 중국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은 사상유례없는 대결이다. 필자는 우리가 더욱 담담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이런 국면에 대응해야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우위를 점하던 일을 논리적으로 열세에 처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헤겔은 말했다. 인류는 역사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역사는 많은 경우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러나 나는 시종 이렇게 생각한다. 절대로 간단한 재연은 아니라고.
아마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좀 더 공부해야하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무기황(丁戊奇荒)": 양무파(洋務派)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다. (2) | 2022.10.27 |
---|---|
청말(淸末) 혁명당은 왜 암살에 열중했을까...? (1) | 2022.09.07 |
천리교(天理敎)의 난: 자금성까지 쳐들어가다. (0) | 2022.06.20 |
아편전쟁(阿片戰爭)때의 중국인 (0) | 2022.06.10 |
"동치회란(同治回亂)"의 진상 (0) | 202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