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마의60

사마의(司馬懿) 자손3대는 어떻게 조조집안의 강산을 빼앗았는가? 작자: 미상 동한말기에서 위진때까지 정권은 분할되고, 번왕들이 난립하여 전체 정치국면이 아주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정권의 교체과정은 하나의 강물이 산길을 따라 여러번 굽어서 흘러가는 것같았다. 이때 자주 바다의 파도보다 더 미친 듯한 파도와 바람이 불기도 .. 2012. 8. 15.
모택동은 왜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진실한 제갈량은 업적이 출중한 정치가이다. 촉국을 다스리는데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점은 많지 않다. <삼국연의>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렇게 용병여신(用兵如神)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연의>는 민간에 영향이 아주 .. 2012. 1. 1.
채문희(蔡文姬): 동한의 재녀. 3번에 걸친 혼인 글: 장계합(張繼合) "혈전"이후, 저명한 도시 장안성이 무너졌다. 무고한 백성들은 그저 쇠말발굽아래 신음하고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장안이 함락된 약간 이후인 개략 한헌제 흥평연간(194-195년), 19살의 채씨소저도 난민대열에 휩쓸렸다. 그녀도 봉두난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 2011. 12. 28.
왕도(王導): 중국고대의 황상황(皇上皇) 글: 월초(越楚) 유우석(劉禹錫)은 일찌기 이런 시를 지었다: 구시왕사당전연(舊時王謝堂前燕)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姓家) 옛날에 왕씨,사씨같은 고관대작의 집앞에 둥지를 틀던 제비가 지금은 보통 백성들의 집으로 날아든다. 여기서 "사(謝)"는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 2011. 12. 28.
삼국시대의 사대은사(四大隱士) 글: 육기(陸棄) 역사상 제갈량만이 원래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라고, 제후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천고일상(千古一相)에 오르고 유방백세(流芳百世)하게 된다. 역사상 오직 유비만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삼고초려를 통하여 군신간의 아름다운 이야기.. 2011. 7. 13.
제갈량은 왜 사마의를 이기지 못했을까?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삼국연의>>를 본 사람들은 사마의를 제갈량에게 패배한 장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삼국연의>>를 읽어보면, 지혜로 보나, 병법으로 보나, 모략으로 보나, 제갈량이 사마의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는 아무도.. 2010. 11. 8.
방통의 양모(陽謀)와 제갈량의 음모(陰謀) (II) 3. 방통은 유비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현자에게 양보한다. 용봉의 의견차이로 유비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방통이라는 능력이 뛰어난 모사를 아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든 앞일을 신처럼 예측하는 제갈량도 믿는다. 만의 하나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유비는 형주로 물러.. 2008. 12. 8.
제갈량과 위연의 북벌방안 비교 글: 손옥량(孫玉良)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선제가 남긴 유훈에 따라, 일찌가 6번이나 북벌을 시도하여 중원을 통일하고자 했다. 당시 어떻게 병사를 진격시키느냐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제갈량의 계책으로 농우(隴右)의 평탄한 길을 따라 기산(祁山)으로 나가서, 진공하는 .. 2007. 11. 30.
유비가 와룡,봉추를 다 얻고도 천하를 얻지 못한 이유 글: 손옥량(孫玉良) <<삼국연의>>에는 유명한 말이 하나 있다: "복룡(伏龍), 봉추(鳳雛), 두 사람 중 하나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복룡이라는 것은 와룡선생으로 불리우던 제갈량이며, 그는 유황숙 유비의 삼고초려끝에 산을 나왔다. 봉추라는 것은 명사 방덕공의 조카인 방통이었다. 처.. 2007. 11. 26.
사마의(司馬懿) 가족은 어떻게 조위(曹魏)정권을 잠식했는가? 글: qinghuajijiao 삼국시대에 조조(曹操)와 조비(曹丕) 부자는 강권정치의 대표자들이었다. 조조는 이름없던 정객에서 점차 실력을 확보하여, 먼저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 천자를 끼고 제후에 명을 내리다)"를 통해 한헌제(漢獻帝)를 자기 수중의 허수아비로 만들고, 나중에 승상의 지위에 올라.. 2007.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