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의 처첩과 자녀

중은우시 2015. 2. 23. 00:21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자고이래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 조조도 자연히 예외는 아니다. 그가 일생동안 가진 여인은 무수히 많다. 그중 처첩이 된 여인으로 기록된 사람만 15명에 이른다. 각각 정부인(丁夫人), 유부인(劉夫人), 변부인(卞夫人), 환부인(環夫人), 두부인(杜夫人), 진부인(秦夫人), 윤부인(尹夫人), 왕소의(王昭儀), 손희(孫姬), 이희(李姬), 주희(周姬), 유희(劉姬), 송희(宋姬), 조희(趙姬), 진씨(陳氏). 그중 2명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머지 13명은25명의 황자와 7명의 공주를 낳았다.

 

정부인은 자식이 없고, 유부인은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조앙(曹昻), 차남 조삭(曹鑠), 딸은 청하장공주(淸河長公主)이다.

 

조앙은 장남이고 자는 자수(子修)이다 일찌기 효렴이 되고, 나중에 조조를 따라 장수(張繡)를 정벌한다. 원래 장수는 이미 투항하였으나, 조조가 그의 숙모를 눈에 들어하여 억지로 군영으로 끌고와 간음한다. 장수는 분노하여 다시 조조에 반기를 들고, 조앙은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마필을 조조에게 양보한다. 그 결과 전위(典韋)와 함께 목숨을 잃는다. 이때 같이 죽은 자는 조조의 조카인 조안민(曹安民)도 있다.

유부인은 일찍 죽어서, 조앙은 정부인이 길렀다. 그래서 정부인은 화가난 나머지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조조는 비록 여러번 돌아오도록 청했으나, 정부인은 시종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조는 정씨집안에 이혼서를 써서 보낸다. 정부인의 부모는 감히 그녀를 재가시키지 못하고, 결국 정씨는 고향에서 늙어죽는다. 조조는 죽기직전에야 약간 후회한다.

조앙은 사후 풍도공(豊悼公)에 추봉되는데, 이는 그를 추도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조앙은 후손이 없어서, 이 일맥은 단절된다. 그리하여 동부이모의 동생인 조균(曹均)의 아들 조완(曹琬)으로 하여금 작위를 이어받게 한다.

 

조삭은 봉호를 받기 전에 죽는다. 조예(曹㪫)는 그를 상상왕(相殤王)에 추봉하고, 왕위는 두 아들이 차례로 승계하게 하나, 그 후에 후사가 없어서, 번국은 삭제된다.

 

환부인은 세 아들을 낳는다. 조충(曹沖), 조거(曹據), 조우(曹宇)

 

조충은 자가 창서(倉舒)이고, 아주 어려서 어른의 지혜가 있었다. 역사상 유명한 신동이다. 칭상(稱象)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현재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에 대하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기실 없다. 소위 귀인은 이상(異象)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조충은 말을 잘하고 마음이 인후하여 적지 않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조조는 이 아들을 아주 좋아했다. 아쉽게도 건안13년 13살에 병으로 사망한다. 조충이 죽기전에 화타를 죽였는데, 이때 조조가 후회했다고 한다: "내가 화타를 죽인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서 아들이 죽는구나." 조비가 그를 위로했으나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나의 불행이다. 그러나 너의 행운이다. 나중에 조비가 한나라로부터 나라를 빼앗은 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창서(조충)이 있었다는 나는 천하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에 조조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었다. 먼저 스스로 승상이 되고, 이어서 화타를 죽이고, 그후에 조충이 요절한다. 이어서 적벽에서 패배한다. 조충이 죽은 후, 등애왕(鄧哀王)에 봉하고 동모동생인 조거의 아들 조종(曹琮)(조충과 발음이 같다)으로 하여금 작위를 승계하게 한다.

 

조거는 환부인을 따라 거주한다. 건안16년에 범양후(范陽侯), 완후(宛侯), 장릉왕(章陵王)에 봉해진다. 남방은 습기가 많아서 환부인의 몸이 약했다. 환부인은 팽성 사람이다. 그래서 조비는 다시 팽성왕에 봉한다. 나중에 아주 사치하였고, 금지물품을 만들어, 조비에게 혼나고 삭현(削縣) 이천호의 처분을 받는다. 이 아들은 하마터먼 사마사에 의하여 황제로 추천될 뻔했다. 왜냐하면 조방(曹芳)이 사마사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거를 황제로 앉히려 한다. 그러나 황후가 허가하지 않았다. 조거는 나의 숙부인데, 그를 황제로 세우면, 나는 어떡하란 말인가.

 

조우는 자가 팽조(彭祖)이고, 건안16년에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지고 나중에 연왕(燕王)에 봉해진다. <삼국연의>에서는 그를 조비의 아들이며, 조우와 조예는 관계가 긴밀하여 조예가 등극한 후 조우는 한때 총애를 받았으며, 대장군을 내리고, 위명제는 장군의 권한을 조우에게 넘기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맡겨서는 안될 사람에게 맡겼다. 조우는 고사하고 이를 받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는다. 그 결과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들 조환(曹奐)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이고, 사마염에게 선양한다.

 

두부인은 2남1녀를 낳는다. 조림(曹林), 조곤(曹袞), 금향공주(金鄕公主)

이 두부인은 원래 관우가 보고 마음에 들어했던 미인이다. 당시 조조와 유비는 여포를 하비(下邳)에서 포위할 때, 두부인은 여포의 수하 진의록(秦宜祿)의 처였다. 관우는 성이 함락될 때, 두부인을 취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조조는 먼저 허락하였는데, 나중에 두부인의 미색을 보고 미혹되어 자신의 것으로 삼아 버린다. 진의록의 아들 진명(秦明)은 조조의 양자가 된다.

 

조림은 조표(曹豹)라고도 한다. 건안16년에 요양후(饒陽侯)에 봉해지고 그후에 여러번 분봉된다. 조예는 그를 패목왕(沛穆王)에 봉하고, 사후에 아들 조위(曹緯)에게 작위를 승계하게 한다.

 

조곤은 건안21년 평향후(平鄕侯)에 봉해지고, 나중에 동향후(東鄕侯), 북해왕(北海王),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진다. 이 아들은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할 뿐아니라, 조심스러웠다. 그는 조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전과정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저 작은 집에 틀어박혀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이 바뀌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서로 뜻과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좋은 글을 많이 썼다. 전해지는 바로는 매번 형제들이 놀러가고, 모일 때면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입으로는 경전을 외웠다고 한다. 어떤 대신이 글을 올려 그를 칭찬했으나, 그는 황공해 하며 말했다. 내가 글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단지 수신양성(修身養性)할 뿐이고, 아주 정상적인 행위이다. 여러분은 나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주십시오. 그외에 그는 처첩들에게 옷을 아껴입고, 먹는 것을 줄이며, 옷을 직접 기워서 입도록 요청했다. 그는 정치투쟁이 날카로울 때, 시종 자신의 언행을 자제하였다. 나중에 그는 임의로 경성에 들어가서 금지규정을 어겨 2개현 750호를 삭감당한다. 이번 처분은 그를 적지 않게 놀라게 했고, 얼마후 큰 병이 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후사는 모두 황상의 재가를 받아서 처리해주고, 임의로 처리하지 말라. 그는 단지 한가지만 요청했는데, 자신을 복양위대부(濮陽衛大夫) 거원(蘧薳, 춘추시대의 인물)의 묘옆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 조부(曹孚)가 작위를 승계한다. 조곤의 재능은 조식의 바로 다음이었다.

 

진부인은 두 아들을 두었다. 조현(曹玹), 조준(曹峻)

 

조현, 건안16년에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지고 얼마후 요절한다. 자식은 없었다. 조예는 그를 제양회왕(濟陽懷王)에 추봉한다. 조림(曹林)의 아들 조찬(曹贊)으로 하여금 그의 작위를 승계하게 하나, 얼마후 요절한다. 그러자 조찬의 동생이 다시 승계한다. 이 지계는 약간 이상했다. 본인도 일찍 죽었지만, 승계받은 자들도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그리고 승계받은 자들은 모두 조림의 후손이다. 무슨 법칙이 있는 것처럼.

 

조준, 자는 자안(子安), 건안21년에 미후(郿侯)에 봉해지고 나중에 진류왕(陳留王)에 봉해진다. 다른 사적은 불분명하다.

 

윤부인은 아들 하나가 있었다. 조구(曹矩). 어려서 요절하여 봉호도 없었고, 나중에 범양민왕(范陽閔王)에 봉해진다.

윤부인은 원래 대장군 하진(何進)의 며느리이다. 남편이 죽은 후 아들 하안(何晏)을 데리고 혼자 살았는데, 조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그녀에게 빠진다. 그리하여 하안과 함께 취해서 집으로 데려온다. 조조는 비수불류외인(肥水不流外人)이라고 금향공주를 하안에게 시집보낸다. 하안이 조상(曹爽)의 일당으로 사마의에 의하여 삼족이 멸해진다. 다만 공주는 살아남는다.

 

조간(曹幹)은 내력이 재미있다. <삼국지>에는 왕소의의 소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략>에서는 진씨의 소생이라고 되어 있다. 진씨는 그를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조조는 그를 왕소의에게 기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 조간이 아니라 조량(曹良)으로 불리웠다. 조간은 건안20년 막 출생하자마자 고평정후(高平亭侯)에 봉해진다. 그는 3살때 모친이 죽고, 5살때 부친이 죽었으므로 조비가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조비는 그보다 28살이 많아서, 그는 조비를 아버지로 알고, 조비를 '아옹(阿翁)'이라고 불렀다. 조비는 화가 났으나, 그가 나이가 어리고 가련하다고 여겨서 계속하여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너의 형이다" 조비는 조식과 후계자 다툼을 벌였고, 왕소의는 조비를 적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조비는 죽을 때 특별히 유조를 남겨서 후계자에게 이 어린 동생모자를 잘 돌봐주라고 말한다. 나중에 조간은 '사통빈객(私通賓客)'의 금지법규를 어겼는데, 선황의 유조도 있고, 조예의 황숙이었으므로 조예는 그저 혼을 심하게 내고 구두징계로 그친다.

 

손희는 조상(曹上), 조근(曹勤), 조표(曹彪)의 세 아들을 낳는다.

 

조상, 조근의 두 형제는 일찍 요절한다. 그래서 봉호도 없었다. 조예때 임읍상공자(臨邑殤公子), 강상공자(剛殤公子)로 추봉된다. 이 시호만 보더라도 요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표는 자가 주호(朱虎)이고 조간보다 20살이 많았다. 건안21년에 수춘후(壽春侯)에 봉해지고, 나중에 오왕(吳王), 초왕(楚王)에 봉해진다. 일찌기 금지규정을 어겨서 3현 1500호를 삭감당하기도 한다. 조표는 약간의 위명이 있었던 것같다. 조방이 재위할 때, 연주자사 영호우(令狐愚), 태위 왕준(王浚)은 조방을 몰아내고 조표를 황제에 앉힐 밀모를 하나 나중에 누설되어 피살당한다. 조표도 사사당한다. 죽을 때 나이가 57세였다. 그의 아들 며느리는 모두 서인(庶人)이 된다. 조표의 속관도 치죄를 당한다. 다행히 몇년후에 그의 후손들은 작위와 녹봉이 회복된다. 어쨌든 황실종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희는 조승(曹乘), 조정(曹整), 조경(曹京)을 낳는다.

 

조승, 조경은 요절하여 생전에 봉호를 받지 못한다. 죽은 후에 곡성상공(谷城殤公), 영상공(靈殤公)으로 추봉된다.

 

조정은 하마터면 원담(袁譚)의 사위가 될 뻔했다. 원담과 조조는 강화때 혼약을 맺는다. 그러나 나중에 성혼되지는 못한다. 건안21년에 미후(郿侯)에 봉해진다. 다음해에 사망하고, 후사가 없었다. 대공(戴公)으로 추봉된다. 작위는 조거의 아들이 승계한다.

 

주희는 조균(曹均)을 낳는다. 조균은 어려서 조조의 동생 조빈(曹彬)의 양자로 간다. 건안22년 조빈이 죽고, 조균은 작위를 승계받아 번후(樊侯)가 된다. 그러나 2년후에 죽는다. 안공(安公)에 추봉된다. 그의 아들 조항(曹抗)이 작위를 승계하나, 시종 왕에 봉해지지는 않는다.

 

유희는 조극(曹棘)을 낳는다. 어려서 요절하고, 광종상공(廣宗殤公)에 추봉된다.

 

송희는 조휘(曹徽)를 낳는다. 자는 자준(子雋)이다. 건안21년에 역성후(歷城侯)에 봉해지고, 나중에 여강왕(廬江王), 수장왕(壽張王),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진다. 이 아들은 약간 권세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고, 자신이 왕야라고 하여 지방관리들을 눈아래 두지 않았다. 부하를 종용하여 수장현리를 때려서, 1현 500호를 삭감당하기도 한다. 정시3년(243년) 사망한다. 아들 조흡(曹翕)이 승계한다. 나중에 잔(晋)에서 늠구공(廩丘公)에 봉해진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휘는 일찌기 본국군대를 이끌고 사마의를 토벌했는데, 결과 여남에게 격패당한다. 조휘는 몸에 화살 3발을 맞고, 촉한으로 가서 의탁한다. 촉주 유선은 강유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친(背親)의 죄명으로 조휘를 거열지형(車裂之刑)으로 사형에 처한다. 사마의는 이전의 원한을 따지지 않고, 조휘의 시신을 만금을 주고 서촉에서 운반해오고, 영왕(靈王)에 추봉한다.

 

조희는 조무(曹茂)를 낳는다. 건안22년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조무는 아주 완열(頑劣)한 자였다. 어려서부터 '예교를 롤라" 조조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 커서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아" 조비가 싫어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왕에 봉해질 때 그는 봉지를 받지 못한다. 조비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요성왕(聊城王), 곡양왕(曲陽王)에 봉해진다. 그래서 조무는 조씨종족에 대하여 일종의 반감이 있었다. 조휘의 장례식에 그는 병을 핑계로 참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집안에 있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상소를 받고 하마터면 번국을 박탈당할 뻔한다. 제왕 조방은 그가 태조의 아들인 것을 고려하여 삭현의 처분만을 내린다.

 

변부인은 조비(曹丕),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雄)의 네 아들을 낳는다.

변부인은 원래 연예가무에 종사하던 창기(倡伎)였다. 공연을 하다가 조조와 알게 된다. 그때는 아직 정부인이 있을 때였다. 그녀는 조조에게 시집가면 첩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차라리 영웅의 첩이 될지언정, 평범한 자의 처가 되지 않겠다(寧爲英雄妾, 不做庸人妻)"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조비는 여기서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창은 자가 자문(子文)이다. 자에 비록 '글월 문(文)'이 있기는 하지만, 일생동안 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조가 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마도 깊은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가 시경,서경을 더많이 읽어서 문무를 겸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조창은 '어려서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고, 팔힘이 남달랐다. 손으로 맹수를 잡을 수 있었다." 조조는 그에게 장래포부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그는 말한다. 대장부라면 위청, 곽거병과 같이 전쟁터를 누비면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나머지는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오환(烏丸)을 북정할 때, 그는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이겨서 가비능(軻比能, 선비족 수령)의 수만군대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의 수염이 노란 색이어서, 조조는 그를 "황수아(黃鬚兒)"라고 부른다. 조창은 말을 처첩보다 사랑했다.

조조는 죽기 전에 조창을 부른다. 그러나 장안을 지키고 있어서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었다. 조비는 그를 중모(中牟)에 봉하고, 돌아가도록 한다. 조창은 약간 불만을 가진다. 나중에 백마왕(白馬王)에 봉해진다. 황초3년(223년) 임성왕(任城王)에 봉해진다.다음 해에 경성에 들어와 조현(朝見)한 후 급사한다. 그의 아들 조해(曹楷)가 작위를 승계한다. 조창의 죽음은 아주 신기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비가 그를 만날 때, 바둑을 두면서 독있는 대추를 먹여서 독살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식은 <증백마왕표>라는 시를 쓴다. 시에서 조창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데, 이를 통하여 조비가 골육을 죽인 행위에 항의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조창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서, 조조가 자신을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조조를 보기도 전에, 조비가 승계해버렸다. 그래서 원한과 두려움속에서 신비스럽게 급사할 것이다. 조창은 비록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손자 조방(曹芳)은 의외로 그의 바램을 실현하게 된다.

 

조식은 자가 자건(子建)이다. 그의 이야기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 대재자(大才子)는 후세의 문학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는 비록 권력 쟁탈전에서는 패배했지만, 영원불멸의 문학상 지위는 얻었다. '새옹지마'라고 할 수 있다. 기실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해보면, 조식은 황제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41살에 병사한다. 그의 정실부인 최씨는 의복이 화려하여 조조에게 사사당한다. 아들 조지(曹志)가 작위를 승계한다. 진무제(晋武堤)때 박사제주(博士祭酒)를 지낸다. 그러나 간언하다가 파면되고, 나중에 정신이상이 된다.

 

조웅은 요절하고, 소회왕(蕭懷王)에 추봉된다. 아들 조병(曹炳)이 작위를 승게하나 얼마후에 또 요절하고 후사가 없었다. 봉국은 폐지된다.

 

조조에게는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딸이 7명이다. 위에서 언급한 청하장공주, 금향공주외에 나머지 5명은 조헌(曹憲), 조절(曹節), 조화(曹華), 안양공주(安陽公主), 임분공주(臨汾公主)로 생모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청하장공주는 하후돈의 아들 하후무(夏侯楙)에게 시집간다. 안양공주는 순욱의 아들 순운(荀惲)에게 시집가고, 임분공주의 사적은 불분명하다. 조헌, 조절, 조화의 세 자매는 조조에게 한덩어리로 묶여서 한헌제(漢獻帝)의 후궁이 된다. 이렇게 하여 조조는 국장(國丈)이 되고, 출근할 때는 조조가 한헌제에게 선물을 바치지만, 퇴근 후에는 한헌제가 조조에게 배로 돌려주어야 했다.

 

조조의 25명의 아들중 문채가 가장 뛰어난 아들은 조식이다. 그 다음이 조비이고 그 다음이 조곤이다. 무공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용맹한 자는 조창이고, 그 다음이 조앙, 조표, 조휘이다. 가장 지혜로운 아들은 조충이다. 아들중 자는 일반적으로 모두 "자X(子X)"였다. 유독 환부인 소생의 조충, 조우, 손희 소생의 조표만 다르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25명의 아들 중에서 누가 첫째이고, 누가 둘째인가? 적출로 따지자면 조비가 첫째이고 조창이 둘째, 조식이 셋째이다. 적출,서출을 모두 포함한다면, 조앙이 첫째이고, 둘째, 셋째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삼국지>에서는 순서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조조차도 잘 모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관료사회에서 많이 쓰는 말로 하자면, 서열은 선후를 따지지 않는다.

 

조조는 건안25년(220년)에 사망한다. 향년 65세이다. 그의 20살때부터 따지면 45년동안 모두 32명의 자식을 낳았다. 정말 "성과가 크고 풍성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을 낳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조조는 행군시에도 부인 한 명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자류지(自留地)'를 경작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처첩을 차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후대를 많이 복제해놓기 위해서였다. 바로 '사람이 많으면 담량이 커지고, 땅이 많으면 생산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다만, 생산량이 많다고 하여 반드시 품질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이들 아들의 운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절한 자가 절반이상이다. 후대의 권력다툼으로 서로 구심투각(勾心鬪角)하고, 많은 처첩들은 서로 질투한다. 조조는 이들을 다독이면서 단속해야 했다. 협조하면서 살펴봐야 했다. 생각해보라, 처첩, 자시들을 합쳐서 매일 한 사람이 한 건씩 일이 생긴다고 치더라도 하루에 사십여건이다. 그것만해도 조조는 귀찮아 죽었을 것이다.(당연히 자잘한 일은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하루에 정무를 보살펴야 했다. 안으로는 대신의 '문공무위'가 있고, 밖으로는 유비, 손권과의 '계급투쟁'이 있다. 정말 국가일, 집안일, 천하일로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웃음소리 욕소리 칼소리로 정신이 피곤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가 두통을 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대주당가(對酒當歌), 인생기하(人生幾何), 비여조로(譬如朝露), 거일고다(去日苦多)..."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