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천사재화패(天賜才華牌) 사마휼편외

by 중은우시 2015. 10. 11.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은 비록 조위(曹魏)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위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지만, 황위의 승계에 있어서 하늘이 그에게 점지해준 적장자 즉, 나중의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은 조부 사마의(司馬懿)나 부친 사마염을 닮지 않고, 일반인의 아이큐에도 못미쳤다. 쌀보리와 고기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비싸고 구하기 힘든지도 알지 못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사마염은 그를 태자로 놔둘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사마충과 재인(才人) 사구(謝玖)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마휼(司馬遹)은 여러 황손들 중에서 가장 똑똑했다.

 

사마휼이 5살 되던 해, 밤중에 궁중에 화재가 발생한다. 일시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무제 사마염도 사람들과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화재가 얼마나 심각한지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때, 사마휼이 사마염의 소매를 잡아끌며 이렇게 말한다: “한밤중에 돌발사태가 벌어졌으니 이는 비상상황으로 보고 처리해야 합니다. 군주는 이런 때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어린 사마휼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 말에 사마염은 깜짝 놀란다. 그리고 나중에 대신들에게 사마휼의 재지를 칭찬하고, 조부 사마의에 비견할 만하다고까지 말하며 그를 황태손(皇太孫)에 앉힌다. 이를 보면 사마염이 사마휼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혜제가 즉위한 후 사마휼은 황태자에 오르나, 이어 발생한 팔왕의 난으로 사마휼은 황제의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수양제 양광의 처지는 조식과 비슷했다. 같은 적자(嫡子)이지만 형이 있었다. 그러나 양광은 승리자가 되어 제왕에 올랐고, 조식은 실패자가 되어 간녕반역(奸佞叛逆)의 류에 들어갔다. 수양제 양광은 진왕으로 있을 때, 태자 양용과 마찬가지로 수문제 양견과 독고황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동모형제였다.

 

그러나 양광은 뛰어났다. 당당한 풍모를 지니고, 준수한 용모를 가진 미남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다식하여 형제들 중에서 양견과 독고황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양광은 바로 이 구명도초(救命稻草)를 꽉 움켜쥐었다. 생모 독고황후의 앞에서 온갖 사랑받을 짓은 다한다. 그리하여 독고황후는 모든 사랑을 양광에게만 쏟고 다른 자식은 거들떠보지 않을 지경에 이른다. 황태자의 문제에서도 양용을 폐위시키고 양광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요구했다. 양견이 죽기 전에 양광의 악행을 보고 “독고가 나를 망쳤구나”라고 탄식했다는데서도 그녀가 양광이 황태자에 오르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양용과 비교해보면, 양광의 총명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얻는데 애를 쓰는 한편, 후궁들에게도 수시로 선물공세를 펼쳐 부친이 총애하는 선화부인 진씨와 용화부인 채씨를 자기 편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수시로 양견에게 양광을 좋은 점을 거론하며 극력 칭찬한다. 그러나, 결국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양견이 죽는 날 밤에 양광에게 증(烝)당한다. 증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간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만 보더라도 양광의 남다른 총명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조식의 실패와 양광의 성공을 비교해보면, 양광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한편,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효성과 근검을 가장하는데 성공했지만, 조식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데는 성공하지만, 자신과 처첩의 행실을 감추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조식의 적수인 조비는 노련하고 헛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양광의 적수인 양용은 생활에 절제가 없어 헛점을 많이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