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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해혼후(海昏侯) 유하(劉賀): 권신이 괴뢰황제를 고르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by 중은우시 2016. 3. 8.

글: 악치(岳峙)


한(漢)나라 400년 역사상, 겨우 27일간 황제를 지낸 해혼후 유하의 존재감은 아주 낮다. 그를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우연히 그의 이름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그저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혼후묘가 발굴되면서, 유하는 돌연 함어변신(鹹魚變身)한다. 그의 사적이 다시 하나하나 재검토대상이 될 뿐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평가를 뒤집는데 열중한다.


정사의 기재를 보면, 유하는 황위계승자로 선정된 후, 그의 봉지인 창읍(昌邑)에서 출발하여 그가 폐위된 후 장안을 떠나기까지, 앞뒤로 모두 1천여건의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그 중에는 경성으로 오는 길에 민간여인을 강간한 것부터, 경성에 들어온 후 한소제의 장례때 곡을 하지 않은 것이라든지, 즉위후에 황당한 명령을 내린 것등등이 있다.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왔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번안사학(飜案史學, 인터넷의 용어를 빌리면 역전사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의 방식에 따라, 어떤 사람의 말을 빌리면 모두 27일동안 황제로 있었던 사람이 1천여건의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면, 평균 매일 40건이 넘는데, 이것은 그가 황제로 있던 동안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한 게 없다는 말이고 한 일은 모조리 잘못되었고 황당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한 원인은 무엇일가? 번안사학에 따르면, 진정한 원인은 유하가 곽광(霍光)의 괴뢰(허수아비)가 되려 하지 않고, 원래 황제에 속하는 권력을 되찾아 오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곽광이 조종하여 폐위시켰다는 것이다. 소위 1천여건의 황당한 일은 기본적으로 곽광이 그를 폐위시키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해혼후묘에서 공자의 저작이 출토된 것을 가지고 유하는 생전에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터무니없이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기실, 최소한 현재는 증명할만한 상당한 증거는 없다. 유하가 폐위당한 진실한 원인은 곽광과 권력쟁탈전을 벌였기 때문이지 그가 황당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묘에서 공자저작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그가 공부를 좋아했고, 나아가 그가 그다지 황당하지않았다는 논리자체는 성립될 수 없다. 귀족이 경전저작을 부장품으로 넣는 것은 서적이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신분의 상징일 분이다. 이것으로 그가 공부를 좋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걸음 양보하여, 그가 공부를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그가 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남조 진후주 진숙보, 수양제 양광이다 모두 공부를 좋아했지만, 언행과 행동거지는 무척 황당했다.


그러나, 번안사학의 한가지 추측은 그래도 가치가 있다. 즉 유하가 즉위후 아마도 곽광과 권력을 놓고 충돌을 벌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기실, 상리로 추측하면 유하가 아무런 학문이나 능력이 없고, 사람됨이 황당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영명하고 신무한 한선제라 하더라도, 감히 즉위후 한달도 되지 않아서, 자신을 황위에 올려준 곽광과 권력을 놓고 다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누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그는 곽광과 충돌이 발생했을 것이다.


사서에서는 모두 이윤곽광(伊尹霍光)을 나란히 부른다. 이윤은 상왕조의 재상으로 선왕이 붕어한 후, 그는 명을 받아 어린 군주 태갑(太甲)을 보좌한다. 그러나 태갑은 행위가 황당하여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을 유배보내고, <이훈(伊訓)>등 저작을 남겨 태갑에게 공부하게 한다. 유배기간동안, 태갑은 새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3년후 이윤은 다시 태갑을 맞이해 돌아온다. 그리고 그를 다시 상왕조의 왕위에 앉힌다. 태갑이 유배간 이 몇년동안 이윤은 무슨 신분으로 집정했을지에 대하여는 일찌기 논쟁이 있다. <죽서기년>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태갑을 유배보낸 후 스스로 왕이 되었고, 몇년후 태갑이 거병하여 이윤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일찌기 당나라때 공영달이 이미 반박한 바 있다. 맹자는 더욱 명확하게 말한다. 만일 이윤이 태갑을 유배보냈다면 그것은 태갑으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다시 권력을 태갑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다. "이윤의 뜻(伊尹之志)"이 있다. 태갑은 당연히 이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윤이 태갑을 유배보낸 후 아예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으면, 태갑이 능력만 있다면 이윤을 죽이고 왕권을 되찾을 것이다. 그래서, 맹자가 보기에, 태갑을 유배보낸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큰문제는 '이윤의뜻'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윤의뜻'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군주로 하여금 선행을 하고 인덕을 행하도록 교육하는 것이고, 만일 없다면 그것은 찬위이고 당연히 안될 일이다.


다만 문제는 '이윤의 뜻'이 있느냐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혹은 설사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반드시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조는 각종 명령을 여러번 반복하여 분명히 말했다. 그는 찬탈의 마음이 없다고. 그저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것처럼 충성심을 가지고 한헌제를 보좌할 뿐이고, 한황실을 도울 뿐이라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도 인정했다: "만일 하늘의 뜻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이 되기를 원한다." 즉, 찬탈하는 일을 내가 하지는 않겠지만, 아들에게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중의 사실은 확실히 그가 말한대로 되었다. 그는 한나라를 대신하여 새로 왕조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조비는 권력을 물려받은 후, 서슴없이 한왕조를 대체하여 왕조를 세운다. 당연히 같은 일막이 조씨집안에게도 일어났다. 사마씨가 사마의때부터 경영하여, 사마염에 이르러 마침매 조위를 폐출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곽광에게 "이윤의 뜻"이 있었을까? 그건 말하기 어렵다. 한소제와 한선제시기에, 곽광의 방식은 표준적인 권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어쨌든 한나라의 황위를 찬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찬탈하기도 전에 한선제에게 제거당했다. 즉, 곽광이 왕망이냐, 조조냐 아니면 제갈량이냐(왕망은 스스로 찬탈했고, 조조는 아들대에 찬탈했고, 제갈량은 재상으로 남았다). 그것은 지금은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백거이(白居易)가 시에서 말한 것처럼, "향사당시신변사(向使當時身便死), 일생진위부수지(一生眞僞復誰知)"(만일 진상이 드러나기 전에 죽어버렸다면, 일생의 진가를 누가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조조는 늦게 죽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변명을 하든지 간에, 그의 아들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은 바뀔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곽광은 너무 일찍 죽어서 한나라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이윤의 뜻'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곽광이 황위계승자를 고른 방식을 보면, 그는 젊고, 무능한 황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통제하기 편하고 오랫동안 최고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무제는 웅재개세(雄才蓋世)하였다. 그러나 그도 시종 후계자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먼저 적장자 유거(劉據)를 태자로 삼는다. 나중에 무고(巫蠱)사건이 벌어지면서 태자 유거는 핍박받아 자살한다. 그후 그는 이부인을 총애하고, 그래서 이부인의 아들 유박(劉髆)을 태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유박을 태자로 세우기도 전에, 이씨집안이 죄를 지어 주살당하고 만다. 유박은 자연히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창읍왕에 봉해진다. 바로 유하의 부친인 창읍애왕(昌邑哀王)이다. 그후, 다시 무고사건이 발생하고 태자 유거는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켜서 실패한 후 자결한다. 한무제가 죽을 때 구익부인(鉤弋夫人)의 아들 유불릉(劉弗陵)밖에 없었다. 한고조가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전횡했던 상황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무제는 구익부인을 사사한다. 그리고 곽광, 상관걸(上官傑)등에게 유불릉을 맡긴다.


한무제 재위때, 권력은 그의 한 몸에 집중된다. 권력집중의 장점은 당연히 분명하다. 권력이 집중되었으므로, 권력을 장악한 자가 영명신무하면, 쉽게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권력집중의 폐해는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으므로 일단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돌연 사망하면, 이 권력중심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약간의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무제가 사망하기 전에, 어린아들을 맡기면서, 권력이 대신의 손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자신의 아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권력을 모조리 곽광에게 맡기지 않고, 상관걸, 상홍양(桑弘羊), 김일제(金日磾)의 세 사람을 더 두어 서로 견제하게 했다.


그러나, 한무제가 죽은 후, 상홍양이 먼저 쫓겨나고, 김일제는 일찍 죽는다. 상관걸과 곽광만이 권력을 장악한다. 금방, 곽광은 상관걸이 "곽광을 죽이고, 한소제를 죽이며 연왕 단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명목으로 상관걸을 죽이고, 대권을 독점한다.


기실, 같은 상황은 나중에도 여러번 나타난다. 강한 군주는 왕왕 권력의 고도집중을 가져오고, 왕왕 그가 너무 강세이므로 아들은 항상 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항상 후계자를 교체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은 젊고 유약하며 말을 잘듣는 막내아들이 황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대신들에게 아들을 보좌하라고 맡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동시에 여러 명의 대신에게 같긴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결말을 하나의 예외도 없이 금방 정치투쟁이 벌어지고, 권력은 마지막에 한 명의 대신에게 집중된다. 예를 들어, 유비가 임종때 제갈량과 이엄에게 탁고(托孤)하지만, 결과는 제갈량이 금방 정치투쟁애서 이엄을 타도하고 권력이 조야를 흔드는 권력핵심이 된다. 단지 제갈량은 시종 한황실에 충성심이 있고, 다른 개인적인 사욕이 없어, 개인세력을 따로 키우지 않았다. 당태종 이세민의 상황도 한무제와 같다. 태자 승건과 차남 이태가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유약하고 무능한 진왕 이치가 의외로 황위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이세민의 탁고대신은 금방 정치투쟁에 휘말려서 서로 싸우게 되고, 결국은 무측천이 최고권력을 빼앗아 간다.


곽광은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킨 후, 한소제시기에는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이는 당연히 한소제가 일찍 죽어서 곽광과 권력충돌이 벌어질 시간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티벳에서 5세 달라이라마 이후 역대 달라이라마중에서 제7대달라이라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달라이라믄 모두 친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요절했다. 만일 개별적으로 달라이라마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면 의외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5세달라이라마부터 12세 달라이라마까지 중간에 단지 7세 달라이라마의 예외를 제외하고 나머지 달라이라마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친정을 하기도 전에 요절했다. 그렇다면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어쨌든 섭정이 가장 큰 혐의를 받게 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한소제가 나이 겨우 21살로 돌연 붕어한 것은 곽광에게 어느 정도 혐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상관걸은 일찌기 연왕 단과 결탁하여 한소제를 폐위시키고 연왕 단을 황제에 앉히려 한 적도 있다. 사서의 기재를 보면, 한소제는 비록 한무제처럼 영명신무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중간정도의 자질은 갖추었다. 일단 나이가 들면, 곽광은 당연히 핵심권력을 계속 장악하기가 그다지 순조롭지 않게 될 것이다.


곽광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가 시종 최고권력을 장악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년황제로 정무를 모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황제가 유약하고 무능한 것이다. 사서의 기재를 보면, 곽광은 정치투쟁에서 승리한 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된다. 한소제는 바로 "망자재배(芒刺在背)"를 느끼고 불편해 한다. 즉, 한소제는 이미 깨달은 것이다. 곽광이 그의 권력 내지 인신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느낌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한소제가 이런 느낌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기회를 보아 원래 자기의 것이었던 권력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가능하다면 또 다른 나이가 어린 황제로 바꾸어서 자신이 최고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곽광으로서는 이성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한소제가 신비롭게 돌연 붕어한 후, 대신들이 누구를 황제로 세울지 토론할 때, 광릉왕 유서(劉胥)가 가장 먼저 배제된다. 이유는 그가 한번도 황위계승자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무고사건이후 원래 광릉왕 유서를 후계자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어린 한소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이유는 사실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왜냐하면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독단했다. 주발등이 여씨세력을 몰아낸 후, 대왕(代王)을 황제로 앉힌다. 그런데 대왕의 보친인 박희는 일찌감치 총애를 잃었고, 대왕을 따라 봉지로 가서 생활했다. 유방은 한번도 대왕에게 황위를 잇게 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주발등은 여전히 대왕을 황제로 선택하여 앉힌다. 당연히, 주발등이 대왕을 황제로 앉힌 이유는 아마도, 한고조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당시 대왕이 나이도 많고 명성이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확실히 유방이 한번도 대왕을 황위계승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박희도 미천한 집안출신이어서, 대왕은 조정내에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를 황제로 앉히면 주발등은 계속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곽광이 광릉왕 유서가 황위계승자가 되는 것을 반대한 것도 하나의 주요한 원인은 바로, 그의 나이가 많고, 심지가 이미 성숙하여 일단 황위에 오르면, 쉽게 곽광과 충돌이 일어나고, 곽광의 지위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곽광은 결국 창읍왕 유박의 아들을 선택한다. 즉 황위를 승계한 창읍왕 유하이다. 그의 이유는 이러하다. 유하는 배분상으로 말하자면, 한소제의 다음 배분이다.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아마도 당시 창읍왕 유하가 황당한 짓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고, 이런 정치적으로 거의 백치에 가까운 행동에 곽광은 안심하고 그에게 황위를 승계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곽광이 계속 최고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테니까. 생각해보라. 경성으로 들어가서 황위를 승계할 사람이, 도중에 민간여자를 강간하고, 조심할 줄 모른다면 정치적으로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다만 곽광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창읍왕 유하는 비록 봉지에서는 황당한 일을 벌이고, 조그만치도 정치적 능력이 없는 것같았지만, 황위를 계승한 후, 금방 조치를 취하여 자신의 심복이 핵심부문을 장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곽광은 입장이 난감해 진다. 급류용퇴하고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줄 것인지, 아니면 반격하여 이 조정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황제를 페위시켜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이런 상황하에서, 유하 본인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치투쟁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필요로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권신이 장악한 여론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곽광은 신속히 조치를 취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젊은 황태후 즉 그의 외손녀에게 상소를 올려 유하를 탄핵하고 나아가 황태후의 명의로 유하를 폐출시키고, 다시 태자 유거의 손자 유순(劉詢)을 황제에 올린다.


무고사건이후, 태자 유거와 아들 유진(劉進)은 같이 죽는다. 유진의 아들인 유순은 민간으로 흘러 들어가서 조모인 사(史)씨집안에서 자란다. 나중에 한무제가 조서를 내려 유순을 입궁시켜, 궁에서 부양한다. 그러나, 아마도 민간에서 생활한 경험이 유순에게는 재미있었는지 그는 여전히 자주 궁을 나가 교외에서 놀았다. 확실히 광릉왕 유서와 마찬가지로, 유순은 죄인 유거의 손자이니, 한무제는 그를 황위계승자의 고찰범위에 넣지 않았다. 그는 권세가 있는 친척도 없고, 조정에는 당연히 확실한 지지자가 없다. 심지어 창읍왕 유하는 황위를 승계한 후, 조정에 자신의 심복을 심으려 해도 심을 심복이 있었다. 유순은 이런 심복조차 몇 명 되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곽광이 그를 통제하기 좋은 상황이다. 유순은 창읍왕 유하보다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황위계승자이다.


지자천려일실(智者千慮一失)이라고, 곽광은 거의 모든 문제를 고려했는데, 유독 고려하지 못한 것은, 민간출신의 유순은 비록 조정에는 지지자가 없고, 무슨 세력이랄 것도 없지만, 그의 최대 장점은 젊다는 것이다. 그리고 곽광은 이미 늙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곽광의 건강상황이 아직 좋을 때는 한선제가 시종 절제했고, 곽광과 정면충돌은 하지 않았다. 곽광이 시종 최고권력을 장악하게 해주었다. 병으로 죽을 때까지. 유일한 한번은 곽광이 자신의 딸인 곽성군을 황후로 삼자고 했을 때 한선제는 자신의 하급관리집안 출신의 처인 허평군을 황후로 삼은 것이다. 이번에 곽광이 양보했지만, 얼마 후 곽광의 처는 어의를 시켜 허황후를 독살한다. 이때 한선제가 직면한 상황은 아주 명확했다. 명목상으로 황후가 후궁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지만, 곽씨집안은 황후까지도 독살할 수 있다. 당연히 황제도 독살시킬 수 있다. 그래서 한선제는 양보를 선택하여, 곽성군을 황후로 삼는다. 다만 우리는 알 수 있다. 한선제 당시의 심정을. 비록 반항할 힘은 없지만, 곽광에 대한 원한은 뼈에 새겼을 것이다.


한선제가 황위를 계승한 5년후, 곽광이 병사한다. 다음 해, 한선제는 곽광의 딸 곽성군을 황후에서 폐위시키고, 이어서 곽씨집안을 제거한다. 거의 뿌리를 뽑는다. 그리고 한선제가 집권할 때, 서한은 한무제가 사망한 이후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관료들의 부패를 잘 다스렸고, 대외적으로 반격하여 흉노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서한 역사상 업적이 한무제 바로 다음가는 일대웅주로 성장한다.


이 각도에서 보면, 권신으로서 자기가 오랫동안 통제하기 좋은 괴뢰황제를 선택하는 것은 기술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곽광은 원래 유하가 멍청하여 통제하기 좋다고 여겼지만, 유하는 정치적으로 멍청하지 않았다. 원래 한선제는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선제는 은인자중하면서 시기를 기다렸고, 그가 죽은 후에 전면적이고 철저한 복수를 한다. 그래서, 곽광은 시종 이윤의 뜻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한제국을 위하여 적합한 황위계승자를 고른 것이 아니라, 시종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한 때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집안을 보전할 수는 없었다. 즉, 결국, 곽광의 자기가족에게 닥친 불행은 그가 스스로 판 것이었다. 미처 메우기도 전에 후손들의 피로 메워지게 된다.


그러나, 일대웅주로서, 한선제도 나중에 한무제말기와 유사한 상황을 맞이한다. 그는 유가경전을 독실하게 믿어 유약한 한원제를 후계자로 삼는다. 그리하여 결국 한원제의 황후 왕씨가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한원제, 한성제, 한애제, 한평제 4대를 걸쳐 최종적으로 힘이 커져서 왕망에 이르러 결국 한나라를 찬탈하고 스스로 신왕조를 세운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후계자를 선택하는 자체는 아주 어렵다. 비교적 강경한 황제가 자신의 기준에 맞는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최종적으로 왕왕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는데, 참새가 뒤에서 보고 있다"는 상황이 돈다. 한무제는 강경했고, 결국 곽광이 권력을 독점한다; 한선제도 강경했고, 왕씨가 찬탈한다; 당태종은 영무했지만 나중에 무측천이 황제에 오른다. 전대와 제왕이 영명한 경우 진정한 후계자는 왕왕 선출되거나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인연이 교묘히 얽혀서 나온다. 그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황위계승자를 선택할 때, 거의 누구도 그들에게 뛰어난 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고권력을 장악한 후 골연 살벌하고 과단해지고, 생사여탈은 모두 내 손에서 나와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반격의 여지를 근본적으로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