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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60

촉한(蜀汉) 후기에 인재가 없게 된 근본 이유는...? 글: 역사대작회(历史大炸烩) 촉중무대장(蜀中无大将) 요화충선봉(廖化充先锋) 촉은 왜 후기에 인재가 결핍되었을까? 촉은 삼국정립시기 비교적 특수한 정권이었다. 유비는 당시 18로제후들 중에서 명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어떻게 보더라도 조역이었으며, 언제든지 원소나 황건적에게 소멸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똑똑해지고, 살아남은 자가 왕이 되는 법이다. 손권, 조조등 세력이 강력한 자들을 모두 제거한 후, 귀퉁이에서 발전하고 있던 유비도 마침내 세력을 이루게 된다. 촉한의 굴기는 유비가 남의 것을 훔쳐서 이룬 것이다. 동시에 유비는 스스로 유황숙으로 칭하면서,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일한 정통혈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인재들이 그에게 의탁하게 되었.. 2024. 1. 2.
제갈량 제1차북벌의 처참한 실패: 11명의 주요장수를 잃다.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삼국을 얘기하려면 제갈량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을 얘기하려면 그의 북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은 일생동안 촉을 위하여 간뇌도지(肝腦塗地)했고,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세세한 일까지 직접 챙기는 그는 결국 제5차북벌의 길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렇게 촉한은 경천지주(擎天之柱)를 잃고 얼마후 촉한은 멸망하고 만다. 기실 제갈량의 수차례에 걸친 중원북벌중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것은 제1차이다. 마찬가지로 손실이 가장 참혹했던 것도 제1차북벌이다.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이 제1차북벌에서 11명의 장수를 잃은 것만 보더라도 제1차북벌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차북벌의 배경 관우가 맥성에서 패주하며 목숨을 잃은 후, 유비.. 2023. 2. 28.
조조(曹操)의 종묘에 배향(配享)된 26명의 위나라 개국공신은...? 글: 심멱역사적인적(尋覓歷史的印迹) 위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인 조조는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영웅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조의 휘하에는 정상급의 문신무장들이 운집해 있었다. 조조는 죽은 후, 위나라의 종묘에 모셔진다. 위나라의 개국공신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위명제 조예(曹叡)때부터 시작하여, 일부분 사망한 공신을 조조의 종묘에 배향하기 시작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모두 26명의 위나라공신들이 조조의 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은 이 26명의 조조종묘의 개국공신들은 5차례로 나누어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들이 배향된 시기는 서로 다르다. 모사 곽가(郭嘉)는 제일 늦었다. 그렇다면, 이 26명의 조조의 종묘에 배향된 개국공신들은 각각 누구였을까? 제1차: 3명(하후돈, 조인, .. 2023. 2. 27.
우계마후(牛繼馬後): 사마예(司馬睿)는 우예(牛睿)였을까? 글: 사해심진(史海尋珍) 서진(西晋)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간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부른다. 거듭되는 혼전속에 동한말기이래 원래 심각하게 손상입은 국력이 더욱 소모된다. 북방이 머물던 유목민족은 그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고자 한다. 사마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의 보호하에, 남방의 건업(建鄴, 지금의 남경)으로 내려가 동진(東晋)을 세운다. 다만, 사마예의 즉위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후손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우계마후(牛繼馬後)"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계마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서 전파된 것일까? 우리는 먼저 시간을 삼국시대 후기로.. 2022. 10. 6.
고평릉사변(高平陵之變): 사마의는 어떻게 성공했는가? 글: 신계(神啓) 위소제(魏少帝) 조방(曹芳) 가평(嘉平)원년(249년), 사마의(司馬懿)는 조상(曹爽)이 천자와 백관을 데리고 선제(先帝)의 고평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 틈을 타서, 낙양성(洛陽城)에서 정변을 일으킨다. 역사에서는 이를 고평릉사변이라고 부른다. 사마의는 조상의 삼족을 죽이고, 조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위종실(曹魏宗室)의 조정내 세력을 제거한다. 이를 통해 조위의 정국을 장악한다. 고평릉사변은 조위역사의 중요전환점이고, 사마씨가 위를 찬탈하여 진을 세우는 시작점이 된다. 1. 총호칩복(塚虎蟄伏): 사마의의 계획 위명제(魏明帝) 경초(景初)2년(238년), 위명제의 병이 위중해지고, 임종전에 총신 유방(劉放), 손자(孫資)의 건의를 받아, 대장군 조진(曹眞)의 아들 조상과 사마의를 보정(輔政.. 2022. 8. 30.
제갈량은 제1차북벌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패배했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삼국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로서 유비가 전투,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다. 제갈량을 얻은 후, 유비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했고, 속이 좁은 관우의 불만을 초래하게 된다. 유비는 임종때 탁고(托孤)할 때, 제갈량은 여전히 그를 위해 촉국을 지켜줄 유일한 후보자였다. 비록 그는 제갈량에 대하여 마음을 높지 못하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조정과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겨야 했고, 여기에 이엄과 조운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감시하여 유선과 촉한강산을 보호하게 했다. 다행히 제갈량은 확실히 그가 유비에게 약속한대로 일을 했다. 충성을 다하면서, 유비가 실현하지 못한 이상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유선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자신이 죽은 후 능력이 부족한 유선.. 2022. 8. 18.
"이사쟁공(二士爭功)": 위나라가 촉과 오를 멸망시킨 후 왜 두 공신의 다툼이 일어났을까?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삼국시대 말기에 사마소(司馬昭)가 주도한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공신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이사쟁공'의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아니라, 사마소의 아들인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주도한 서진(西晋)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성공한 후, 다시 한번 두 공신 왕혼(王渾), 왕준(王濬)간에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다시 '이사쟁공'의 일막이 벌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마씨가 주도하는 촉과 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항상 공신.. 2022. 7. 26.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 2022. 3. 9.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 2022. 3. 7.
사마의(司馬懿)의 스승은 누구일까? 글: 위문한사(魏門寒士) 삼국시대의 사마의는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삼국시대에 사마씨가족은 최대의 승리자이니까. 이는 사마의가 지닌 능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마의는 분명 명사(名師)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같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 방통의 두 천재는 모두 사마휘(司馬徽)의 제자이다. 사마휘는 사마의와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사마의는 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사마의의 스승은 누구일까? 기실 사마의의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의의 가장 유명한 두 아들은 바로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둘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적출이면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치면 "사소(師昭)"이다. 그렇다고 사마의의 .. 2022.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