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계(神啓)
위소제(魏少帝) 조방(曹芳) 가평(嘉平)원년(249년), 사마의(司馬懿)는 조상(曹爽)이 천자와 백관을 데리고 선제(先帝)의 고평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 틈을 타서, 낙양성(洛陽城)에서 정변을 일으킨다. 역사에서는 이를 고평릉사변이라고 부른다. 사마의는 조상의 삼족을 죽이고, 조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위종실(曹魏宗室)의 조정내 세력을 제거한다. 이를 통해 조위의 정국을 장악한다. 고평릉사변은 조위역사의 중요전환점이고, 사마씨가 위를 찬탈하여 진을 세우는 시작점이 된다.
1. 총호칩복(塚虎蟄伏): 사마의의 계획
위명제(魏明帝) 경초(景初)2년(238년), 위명제의 병이 위중해지고, 임종전에 총신 유방(劉放), 손자(孫資)의 건의를 받아, 대장군 조진(曹眞)의 아들 조상과 사마의를 보정(輔政)으로 삼는다. 조상은 대장군으로 수석보신이고, 사마의는 태위(太尉)로 조상과 함께 국정의 논의했다. 조상과 사마의는 각각 3천 갑사를 지휘하여 내궁을 숙위(宿衛)한다. 조상은 처음에 사마의의 의견을 존중했고, 모든 일을 사마의와 의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상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면서, 하안(何晏), 등양(鄧颺)의 말을 듣고 천자에게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봉하도록 주청한다. 이는 명승암강(明昇暗降), 겉으로 승진인 것같지만 실제로는 좌천이다. 사마의의 실권을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사마의는 이퇴위진(以退爲進)하여, 겉으로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권력을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집행한다.
위명제때, 사마의는 명을 받들어 병력을 이끌고 옹량(雍凉)을 지키면서, 제갈량의 북벌대군과 맞서 싸웠다. 사마의는 오랫동안 옹량지역에서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아, 그 지역의 기반이 탄탄했다. 관농(關隴, 섬서 및 감숙)의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사마의의 옛 부하들이었다. 조상이 정권을 장악한 후, 그의 사촌동생 하후현(夏侯玄)을 정서장군(征西將軍), 가절도독옹량제군사(假節都督雍凉諸軍事)로 임명하고, 하후패(夏侯覇)를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으로 임명한다. 이에 대한 교환으로 사마사(司馬師)를 중호군(中護軍)에 임명하여, 일부 금군(禁軍)의 임면권과 지휘권을 갖도록 한다. 비록 조상도 상응한 조치를 취하여 금군의 중루영(中壘營), 중견영(中堅營)을 폐지했지만, 사마사가 중호군을 맡은 후, 여전히 금군에 댛나 정돈과 관리를 크게 강화한다. 사마사는 무관선발권을 가졌다. "선발기용에 있어, 공로만큼 기용하고, 사적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사마사는 이전에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던 기풍을 크게 정돈한다. (태위 장제(蔣濟)가 호군으로 있을 때, 뇌물받기를 좋아하여, 사마의가 이렇게 놀린 바 있다; '장중은 낙양의 길거리에서 사고파는데, 한푼이라도 부족하면 안되었다')
무관이 승진하려면 반드시 일정한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사마사는 상벌이 분명했고, 금군의 장병들 사이에 위신을 세운다. 금군병사를 훈련하는 외에, 사마사는 암중으로 3천명의 훈련된 결사대를 양성한다. "산재인간(散在人間)" 3천의 결사대가 어느 날 집결하여, 사마씨정변의 중요한 역량이 된다.
사마소(司馬昭)의 정변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위소제 정시(正始)초년, 사마소는 낙양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을 맡아, 낙양주변의 군둔(軍屯), 민둔(民屯)을 책임진다. 위명제는 말기에 호화사치를 즐겼고, 백성의 둔전에 부담이 가중된다. 사마소는 둔전의 가혹한 잡세를 폐지하고, 농사시간을 뺏지 않아, 민심을 크게 얻는다. 사마소는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긴 후, 황제고문의 역할을 맡지만, 실제로는 태후와 황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는 이목이 된다.
2. 낙양성의 풍운변환: 사마의의 반격
가평원년(249년) 정월, 조상 형제는 천자와 선제의 고평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 여러 해동안 칩거하고 있던 사마의는 돌연 정변을 일으킨다. 사마의의 태부부와 동생 사마부(司馬孚)의 상서령부(尙書令府)의 천여명에 이르는 가병(家兵), 금군 오교영(五校營)의 2,3천명의 병사 그리고 사마사가 일찌감치 양성해놓은 3천명의 결사대가 사마의의 지휘하에, 신속히 낙양성의 각 전략요충지를 점거한다.
사마의는 장남 사마사, 동생 사마부에게 사마문(司馬門)을 점령하도록 명하여, 낙양성 내외의 연락을 끊어버린다. 사마문은 진나라때부터 명실상부한 '천자지문(天子之門)'이다. 천자 혹은 천자를 알현하는 제후, 사신들만이 사마문을 출입할 수 있다. 배인(裴駰)의 <사기집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릇 사마문이라는 곳은 궁궐내에 병력이 소재하는 곳이며, 사방에 모두 사마가 있고, 무(武)의 일을 관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외문이 사마문이다." 사마문은 규모가 크다. 사마문은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어, 황궁 금군역량의 주요집결지점이다. 황성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고, 천자를 지키는 중요한 문호이다. 조위때는 두 개의 군대가 각각 황성내외를 경계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마문의 내외소통의 기능이 더욱 중요했다. 사마의가 사마문을 장악했다는 것은 황성내외의 연락을 끊었다는 뜻이다. 황성밖의 금군은 황성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잘못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황성안의 금군도 성밖의 금군과 연락할 수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진행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 정변군대가 낙양성을 통제하는 것을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마의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낙양의 무고(武庫)를 점령한다. 무고는 무기를 보관하는 국가의 무기창고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진한 두 왕조때 낙양에 무고, 오창(敖倉)을 설치하여 무기와 식량을 보관했다. 이를 통해 동쪽지방을 통제한 것이다. 동한에 이르러, 낙양무고는 정권의 상징이 된다. 황제, 황후의 의장 및 황실이 수장하고 있는 각종 기진이보도 모두 무고에 보관했다. '제왕의 위어지기(威御之器)를 보관하는 곳으로 건물은 깊숙했다."
위진시기의 금위군은 비전쟁시기에 모두 차마치중(車馬輜重), 공성무기를 무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금군이 평소에 순찰하거나 황제의 순행을 호위할때는 단지 경량무기만을 지녔다. 예를 들면, 도창검극(刀槍劍戟)등이다. 금군의 보통사병은 평상시에 수중에 무기를 들지 않는다. 전시에 비로소 무기가 배급된다. 전후에는 다시 무고에 보관한다. 만일 규정을 어기고 임의로 무고에 들어가서 무기를 꺼내면, 참형에 처할 죄였다. 사마의의 가병도 그다지 많은 무기를 지니고 있을 수 없었다. 사마의는 신속히 낙양의 무고를 점령한 후, 그를 따르는 칠천여명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일단 무고를 통제하자, 이는 사마의가 금군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은 보여준다. 사마의는 무고를 통제하고난 후, 황제의 조칙으로 금군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명한다.
그외에 사마의는 차남 사마소에게 병력을 이끌고 곽태후(郭太后)가 거처하는 영녕궁(永寧宮)을 통제하도록 명령한다. 사마의, 사마부와 장제는 영녕궁으로 들어간 후, 곽태후의 면전에서 조상이 집권한 기간동안 저지른 각종 악행을 거론하고, 이어서 사마의는 곽태후에게 조상형제의 병권을 박탈할 것을 요구한다. 조상, 조희(曹羲), 조훈(曹訓) 삼형제는 "자택으로 가서 대기하고, 황제를 행차에 남아 있지 말라" 곽태후는 이것이 조위강산에 위협이 되는 정변이라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곽태후는 궁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정치사무에 대하여는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사마의의 뜻에 잠시 따라주게 된다. 사마의는 적시에 곽태후를 장악하여, 곽태후의 이름으로 조상에 대항하여, 피동적인 입장에서 주동적인 입장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여러번 황태후의 명의로 명령을 내려 정변을 발전시킨다. 사마의가 황태후의 조서로 사도(司徒) 고유절(高柔節)을 대장군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조상의 군영을 점거하게 하고, 태복(太僕) 왕관(王觀)을 행중령군사로 조희의 군영을 점거하게 한다. 사마의는 다시 태위 장제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가, 낙수부교에 주둔하게 하여 천자의 행차를 맞이하도록 한다.
3. 조씨종실은 정치핵심에서 쫓겨난다: 조상은 투항한다.
조상의 집권기간동안 추진한 일련의 개혁은 조위노신들의 기득권을 크게 손상시켰다. 조위의 원로들은 사마의가 일으킨 이번 정변을 주발(周勃)이 여씨(呂氏)를 제거하여 유씨(劉氏)를 지키는 식의 행위로 보아서 지지하거나 혹은 동정했다. 많은 정도로 대장군 조상의 독단적인 난정행위를 끝내고 다시 이전의 종실과 외신이 서로 제약하고 균형을 이루는 국면으로 되돌려,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들의 기득이익을 지키자는데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다. 사마의는 조위 원로들의 이런 불만정서를 이용하여 '제여안류(除呂安劉)'를 정신적인 호소내용으로 삼아 많은 원로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 최소한 자신의 정변에 반대하지 않도록 만든다.
태위 장제는 조상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스스로 병권을 포기하면 부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도잇에 장제는 정치균형을 이룰 필요에서, 다시 사마의에게 정변성공후 조상을 주살하지 말고, 조신의 혈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외에 허윤(許允)과 윤대목(尹大目)도 사마의를 도와 조상에게 저항하지 말고 자진해서 투항할 것을 권한다.
사실상 당시 조상형제와 성을 나와있는 금군병사의 가족은 모두 성안에 있었다. 성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모르는 상황하에서 이 금군의 전투력은 이미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상의 곁을 지키는 소수의 금군, 임시로 모집한 낙양전농둔 전병의 수중에는 그럴 듯한 무기도 별로 없었다. 단지 허창별고(許昌別庫)로 가야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상일행은 서둘러 나섰기 때문에 충분한 방한용품이나 양식도 준비하지 못했다. 비록 환범(桓范)이 대사농인(大司農印)으로 전국에서 물자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당장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고평릉에서 정변이 발생했을 때, 지방의 각군진에서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비록 정동장군(征東將軍),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 왕릉(王凌)은 수중에 많은 병력을 가지고, 회남(淮南)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사마의는 여러 해동안 군대를 지휘했고, 말년에는 더더욱 병법이 출신입화하여, 이미 후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전략가, 군사가가 되어 있었다. 지방군진은 절대로 사마의의 적수가 못되었다.
환범은 조상에게 천자를 끼고 제후를 명령하는 방식을 건의하며, 황제 조방을 모시고 허창으로 간 다음 천하의 병마를 모아 사마의를 토벌하자고 권한다. 이건 확실히 좋은 계책이다. 황권전제시대에 군왕은 국가의 최고상징이고, 무상의 권위이다. 다만 사마의가 사전에 조방의 양모인 곽태후를 장악했고, 이효치천하(以孝治天下)의 한위시대에 곽태후는 위명제의 황후이고, 조방의 양모이며, 심지어 황제보다도 더욱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봉건도덕의 법리로 보자면, 천하지모는 부도덕한 천자를 폐위시킬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나중에 권신 사마사가 곽태후의 명을 빌어 조방을 폐위시킨 것이 그 예이다.
조상은 본질적으로 그다지 재능은 없었다. 게다가 환고자제(紈絝子弟)였다. 손자, 유방 덕분에 대장군으로 보정하게 된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사마의가 신속히 고평릉사변을 일으킨 것은 조상의 예상밖이었다. 이렇게 불리한 조건에서 재능이 평범한 조상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고, 게다가 장제등이 그에게 제안한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아름다운 약속에 조상은 결국 대장군의 병권을 내놓기로 결정한다.
사마의가 고평릉정변을 일으킨 것은 본질적으로 조위원로들의 지지와 묵인하에 일으킨 권력탈취정변이다. 조위의 원로들은 이를 통해 원래의 정치질서로 회복되기를 희망했고, 자신의 기득이익이 보호되기를 기대했다. 사마의는 노련하고 심계가 깊다. 주도면밀하게 조치를 취하여, 이퇴위진하면서 정변을 일으키자마다 신속히 무고와 사마문을 점령하여, 낙양성내외의 연락을 끊어버린다. 영녕궁의 곽태후를 통제하여 조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치적우세를 점한다. 조상은 본질적으로 환고자제로, 그다지 재능은 없었다. 그는 결국 병권을 내놓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도 있지만, 그의 성격때문이기도 하다. 조상은 병권을 내놓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반죄로 삼족이 멸해진다. 조씨종실을 마지막 반항할 역량조차 잃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의 사마씨가족에 대한 평가는 왕왕 일부 역사상의 '정통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만일 우리가 그런 관념을 버린다면, 조씨집안의 시비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아마도 객관적으로 사마씨부자의 이번 정변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력, 수단 심지어 개인능력에서 전면적으로 압도하는 좋은 형세하에서, 왜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우리같은 후인들이 보기에 권력이전과정은 비록 피비린내가 나긴 했지만,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수십년동안, 확실히 역사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이미 몰락한 조씨의 훈구귀족들이 통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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