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 제1차북벌의 처참한 실패: 11명의 주요장수를 잃다.

중은우시 2023. 2. 28. 15:32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삼국을 얘기하려면 제갈량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을 얘기하려면 그의 북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은 일생동안 촉을 위하여 간뇌도지(肝腦塗地)했고,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세세한 일까지 직접 챙기는 그는 결국 제5차북벌의 길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렇게 촉한은 경천지주(擎天之柱)를 잃고 얼마후 촉한은 멸망하고 만다.

 

기실 제갈량의 수차례에 걸친 중원북벌중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것은 제1차이다. 마찬가지로 손실이 가장 참혹했던 것도 제1차북벌이다.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이 제1차북벌에서 11명의 장수를 잃은 것만 보더라도 제1차북벌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차북벌의 배경

 

관우가 맥성에서 패주하며 목숨을 잃은 후, 유비는 의형제의 복수를 위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수십만의 병력을 일으켜 동오를 친다. 그러나 육손의 화소연영(火燒聯營)에 당하여 일거에 유비의 전군이 몰살당한다. 이렇게 촉한의 마지막 희망도 먼지로 화한다.

 

2년후 유비는 병으로 죽는다. 임종전에 제갈량에게 만일 유선이 보좌할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보좌할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스스로 황제에 오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제성탁고(白帝城託孤)"이다.

 

유비가 이렇게 제갈량의 마음을 얻은 후, 제갈량은 더욱 충성을 다한다. 그리하여 '국궁진췌, 사이후이(鞠窮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유비의 사후, 제갈량은 먼저 휴식을 취하며 힘을 기르고, 오나라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이어서 남방의 맹획의 난을 평정한다. 이렇게 하여 후고지우(後顧之憂)를 모두 해결한다.

 

선주 유비의 삼고초려의 지우지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리고 백제성탁고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하여, 제갈량은 '극복중원'의 기치를 내걸고 제1차북벌을 개시한다. 당시는 조비(曹丕)가 죽고 새황제 조예(曹叡)가 등극했을 때여서, 위나라의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 때였다. 이러한 이유로 북벌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제1차북벌

 

제갈량의 제1차북벌의 행군노선은 촉의 마지막 오호상장(五虎上將) 조운(趙雲)과 양무장군(揚武將軍) 등지(鄧芝)로 하여금 포사도(褒斜道)로 북상하여 거짓으로 미성(嵋城)을 공격하는 척하여 위나라의 주력군대를 유인하고, 진정한 촉군의 주력은 제갈량이 지휘하여 기산(岐山)으로 북상하여 농서(隴西)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거짓공격계책은 성공적이었다. 위군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촉군은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의 세게 군을 연이어 함락시킨다.

 

원래 좋은 형세여서, 촉군이 농서의 5군만 점령한다면, 조위와 양주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었다. 위나라군대의 말을 공급하는 기지인 양주(凉州)는 아주 중요한 지역임을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馬謖)으로 하여금 가정(街亭)을 지키게 하는 실수를 범한다. 가정은 조나라군대가 농우로 원군을 파견하는 통로였다.

 

당시 조위의 대장 장합(張郃)이 원군으로 왔는데, 촉한에서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장수는 오직 조운이었다. 그러나 조운은 포사도로 거짓공격을 감행하는 중이어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의 참모장역할을 하던 마속이 스스로 나서서 가정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제갈량의 제1차북벌의 최종목표는 농우5군이었다. 만일 가정을 성공적으로 지켜 조위의 원군을 막았더라면, 마속은 이번 북벌에서 최고의 공을 세울 터였다. 이것이 아마도 제갈량이 마속에게 가정수비를 맡긴 개인적인 이유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속은 기회를 얻었지만, 그것을 살리지 못한다. 그는 그저 지상담병(紙上談兵)의 조괄(趙括)이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옆에서 헛점을 보완해주면 괜찮았지만. 진정 그가 혼자서 병력을 지휘할 때면 강퍅자용(剛愎自用)하며 스스로 병법의 대가라 여겨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것이다.

 

마속이 가정을 잃고, 제1차북벌은 실패로 끝난다.

 

제갈량은 마속이 떠나기전에 신신당부한다. 반드시 큰 길을 지키라고. 그러나 마속은 군대가 외지에 나가면 임금의 명도 듣지 않을 있다고 생각하여, 부장 왕평(王平)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대군을 산위에 주둔시켜버린다.

 

"거고임하자(居高臨下者), 세여파죽(勢如破竹)"이라는 뜻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에 있는 적을 공격하면 파죽지세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위나라의 노장 장합이었다. 그는 용맹하면서도 계모가 뛰어났다. 장합은 마속의 수원(水源)을 차단해 버린다.

 

수원이 차단되자 촉군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순식간에 대패하고 만다. 마속은 황급히 도망쳤고, 위군은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의 주력부대와 조운의 편군(偏軍)이 모두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농서에 있으면서 상황을 좋게 보고 있던 제갈량은 마속이 가정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력부대가 곧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막 손에 넣은 농서의 3개군을 포기하고, 철군하여 촉으로 돌아온다.

 

사마의의 추격에 대하여는 역사상 유명한 공성계를 써서 벗어난다.

 

어떤 사학자들은 기실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계를 알아차렸지만, 만일 사마의가 제갈량을 없애게 되면 조위에서 자신의 병권을 회수하고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을 우려해서 고의로 제갈량을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제갈량의 처지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하마터면 제1차북벌에서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힐 뻔한 것이다.

 

조운과 등지도 가정을 빼앗긴 후, 대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원래 보조전장이던 곳을 주전장처럼 싸워야 했다.

 

조운은 이로 인하여 힘을 다 쏟다보니 회군하는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촉한은 오호상장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제1차북벌은 조운의 사망만으로도 비극적인 색채를 띈다. 이는 촉한, 한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장인 마속은 일찌기 군령장을 썼기 때문에 스스로를 묶어서 군장으로 간다. 제갈량은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을 참수하여 군기를 지켜야 했다. 마속과 함께 참수된 것은 마속의 두 부장 장휴(張休)와 이성(李盛)이다.

 

촉의 장수손실이 침중했다.

 

제1차북벌에서 마지막 오호상장 조운만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언급된 장수들만 하더라도, 양군(陽群), 마옥(馬玉), 염지(閻芝), 정력(丁力), 백수(白壽), 유합(劉頜), 등동(鄧銅)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무명지배가 아니다. 그중 양군은 천중도왕(川中刀王)으로 불리던 인물로, 일찌기 조운과 수십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보지 못했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났다.

 

제갈량은 양군이 이처럼 용맹한 것을 보고 시간을 들여서 그를 거두었다. 

 

염지도 마찬가지로 능문능무(能文能武)의 장수였다. 이릉지전때 유비가 수십만대군을 이끌고 의형제를 위해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섰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육손이 화소연영 칠십리로 대군이 궤멸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중요한 순간에 염지가 5천병마를 이끌고 적시에 달려와서, 국면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그도 얻기 힘든 장수였다.

 

등동은 사료에 기재가 많지는 않지만, 등동이 사용한 무기는 쌍추(雙錘)이다. 쌍추를 휘두르면 살아날뛰는 호랑이같아서, 적수가 드물었다고 한다. 군대내에서 그는 "천중무적장(川中無敵將)"으로 칭해졌었다.

 

백수, 유합, 마옥, 정력의 네 사람은 상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양군, 염지등과 나란히 제갈량의 출사표에 언급될 정도라면 역시 촉한의 최고수준의 무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조운과 참수당한 마속등 3명까지 합하면, 제1차북벌에서 모두 11명의 장수를 잃게 된다. 이는 촉한에게는 궤멸적인 타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론

 

제1차북벌이 이렇게 끝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실패하여 퇴각한 것이지만, 기실 원기를 크게 상한다. 천군이득(千軍易得), 일장난구(一將難求). 천명의 병사를 얻기는 쉬워도, 한명의 장수를 얻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제1차북벌에서 11명의 장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촉한후기에 쓸만한 장수가 없게 되는 난감한 국면을 가져온다. 아마도 이후 이어진 몇 차례의 북벌이 모두 실패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마속이 가정을 지켜냈다면, 1달만이라도 버텼다면, 아마도 제갈량의 대군은 농서5군을 모두 점령하여, 양주와 조위와의 연결을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위의 호표기는 탈 수 있는 말이 부족했을 것이고, 제갈량의 중원회복의 큰 뜻도 혹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