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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법8

건륭제(乾隆帝):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 글: 인신공분(人神共奮) 1. 당신과 '지도자의 사고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양주(揚州)에는 "사가법기념관(史可法記念館)"이 있다. 해방전에는 "사공사(史公祠)"라고 불렸다. 그 안에는 항청명장(抗淸名將) 사가법의 의관총(衣冠塚, 시신이 묻힌 것이 아니라 옷과 갓을 묻은 곳)이 있으며,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만든 것이다. 건륭제는 사가법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서하고, 사가법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찬양했다. 이 시호는 흥미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사가법은 항청민족영웅이다. 1645년, 청나라군대가 양주성으로 쳐들어오자, 회양독사(淮揚督師)인 사가법은 청나라에 투항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성이 함락된 후 자결한다. 청군은 양주에서 중원으로 쳐내려온 후에 가장 강력한.. 2022. 2. 23.
남명(南明)의 강북사진(江北四鎭): 이겨도 져도 강북사진때문이다. 글: 문재봉(文裁縫) 사진의 유래 숭정17년(1644년) 오월 초구일, 용상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고, 여전히 감국(監國)의 신분이었던 주유숭(朱由崧)은 회의를 열고 군사상황을 검토하여 남명의 방어선을 건립한다. 비록 주유숭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군사상황검토와 방어선건립'이지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유숭이 하려는 일은 그저 논공행상이고, 그를 옹립하는데 공로가 있는 4명의 장군에게 상을 하사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주유숭은 그들의 관직을 올려주고, 그들에게 한 곳씩을 지키게 하였다. 군신간에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했다. 이 네 명의 장수들이 발탁되면서 그들은 각각 한 곳씩의 지방을 차지하여 한 지방의 패주가 된다. 이두 그들에게는 새로운 칭호가 붙는다. 바로 "사진(四鎭)"이다. 이 4진.. 2020. 7. 13.
염민(冉閔): 그는 한족의 대영웅일까? (1) 글: andy 염민의 자는 영증(永曾)이고, 소자(小字)는 극노(棘奴)이며, 원명은 석민(石閔)이며 한대 이민(李閔)이라고 하기도 했다. 위군(魏郡) 내황(內黃, 지금의 하남성 안양 내황 고제향 채외촌) 사람이다. 그는 1600여년전의 동진 및 남북조시대에 살았던 명장 중 하나이다. 갈호조(羯胡趙, .. 2018. 10. 31.
남명(南明)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도화선(桃花扇)>에서 공삼임(孔尙任)은 마사영(馬士英)의 입을 빌어 아주 정확한 시세판단을 한 바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어야, 우리같은 자들이 뜻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일찌기 여러 사적(史籍)을 살펴봤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분석이 어떤 때는 희극가가.. 2018. 7. 14.
공리주의역사관: 악비와 문천상을 민족영웅에서 몰아내다. 글: 조아도(趙亞濤) 1 12세기, 금나라군대가 황하를 넘고, 대송왕조는 순식간에 역사존망의 벼랑끝에 섰다.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는 왕공귀족을 이끌고 망국노(亡國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황하양안의 인민대중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대송왕조가 있었다. 상주부(相州府) 탕음현(湯陰縣)의.. 2018. 1. 23.
손중산과 강호은원 글: 남신(南晨) 19세기말 20세기초 비록 청나라정부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날로 커져갔지만, 손중산이 사방으로 혁명을 부르짖고 다닐 때, 각종 반청활동은 대부분 홍문(洪門)등 회당(會黨) 조직이 벌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손중산은 회당과의 연합부터 그의 혁명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손중산.. 2011. 9. 7.
중국인은 왜 극단과 편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글: 해새장(解璽璋) 내가 받은 교육에서, 한가지 점에 대하여 최근 들어 새로 인식하게 된 것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모두가 타협해야할 것인가 아닌가로 논쟁을 크게 벌인 적이 있다. 결국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밀리고 말이 궁색해지게 되었다. 끝까지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2010. 3. 18.
남명(南明)은 왜 동진(東晋), 남송(南宋)처럼 지속되지 못했을까? 서기1644년(명숭정17년, 청순치원년) 3월 19일, 이자성이 대순군(大順軍)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했다. 명나라 숭정황제 주유검은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지금의 선무문) 밖의 만세산(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러나, 숭정제의 죽음이 명나라 276년의 통치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 2008.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