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사진의 유래
숭정17년(1644년) 오월 초구일, 용상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고, 여전히 감국(監國)의 신분이었던 주유숭(朱由崧)은 회의를 열고 군사상황을 검토하여 남명의 방어선을 건립한다.
비록 주유숭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군사상황검토와 방어선건립'이지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유숭이 하려는 일은 그저 논공행상이고, 그를 옹립하는데 공로가 있는 4명의 장군에게 상을 하사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주유숭은 그들의 관직을 올려주고, 그들에게 한 곳씩을 지키게 하였다.
군신간에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했다. 이 네 명의 장수들이 발탁되면서 그들은 각각 한 곳씩의 지방을 차지하여 한 지방의 패주가 된다. 이두 그들에게는 새로운 칭호가 붙는다. 바로 "사진(四鎭)"이다.
이 4진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진, 황득공(黃得功). 호는 호산(虎山)이고, 명말 개원위(開原衛) 사람이다. 군대에서는 황틈자(黃闖子)라 불렸다. 관직은 태부(太傅)에 오르고 정국공(靖國公)에 봉해진다. 황득공은 요동사람이고,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부친이 요절하여 홀어머니 서씨가 그를 키운 것이다.
12세 되던 해, 황득공은 모친이 잠들었을 때, 집안의 술을 모조리 마셔버린다. 모친이 일어난 후 술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때리려 했다. 그러자 황득공이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저 술 조금일 뿐이잖아요. 뭐 별 거 아닌데."
황득공의 말을 듣자 모친은 더욱 분노한다. 어쨌든 그들 집안의 경제상황으로 봐서 술은 사치품이다. 함부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친이 화를 내기도 전에 황득공은 칼을 들고 집을 나선다.
이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설마 나가서 강도짓이라고 하겠다는 건가. 그러나 황득공의 모친은 잘못 생각했다. 강도는 할 수 없다. 적을 죽여서 공을 세우는게 바른 길이다. 당시는 명나라와 여진족이 싸울 때였고, 황득공은 스스로 군대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서 적을 죽인다. 12살때 그는 두 명의 여진인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50냥의 상금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후 황득공은 돈을 모친에게 내놓으며 말한다. "아들의 술값입니다!"
어른이 된 후, 황득공은 정식 군인이 된다. 그는 대명의 병사가 된 것이다. 그는 용맹하게 싸웠고, 사람들은 '황틈자'라고 불렀다. 그 뜻은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무섭지 않으면서 그저 천애를 떠돌 뿐이다."라는 것이다. 황득공은 화살을 잘 쏘았다 역사서에서는 "졸병에게 쇠징을 이마에 차게 한 후에 화살을 쏘는데 백발백중이고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싸울 때 목숨을 거는 외에 화살도 잘 쏘았다. 그외에 황득공이 쓰는 무기도 남달랐다. 그는 쇠채찍을 잘 썼다. 이 채찍으로 천하를 돌아다닌 것이다.
황득공이 매번 적을 죽일 때면 죽인 사람이 많아서, 쇠채찍에는 피가 가득 묻고, 핏물이 마른 후, 그의 손이 손잡이에 붙어 버린다. 그는 물로 한참을 씻은 후에야 비로소 손잡이에서 손을 떼낼 수 있었다. 이를 보면 그가 전투를 얼마나 오래하고 적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쇠채찍 외에 황득공의 다른 병기도 괜찮았다. 심지어 병기뿐아니라 그의 손에 들어가면 뭐든지 살인도구로 바뀐다. 한번은 적이 쳐들어오는데, 황득공이 적당한 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두 개의 당나귀발굽을 집어들고 나가서 적을 무수히 죽였다.
황득공의 이 당나귀발굽을 들고 싸운 역사는 본인이 자랑한 것이 아니라,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손에 당나귀발굽을 들고 싸우니, 적은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용맹함을 원근에 떨친다."(소요기전.21권). 24사를 다 뒤져보아도 이런 병기를 들고 싸움에 나선 사람은 아마도 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뛰어난 무예와 용맹하게 싸우는데다가, 시대를 잘 만나서, 황득공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아주 짧은 기간내에 그는 여주총병(廬州總兵)에 오른다. 그리고 숭정제를 접견한다. 나중에 황득공은 강남으로 가서 봉양총독(鳳陽總督) 마사영(馬士英)의 부하가 된다.
강남에 있으면서, 그는 노구덕(盧九德), 유량좌(劉良佐)등과 협력하여, 함께 장헌충(張獻忠)을 막아낸다. 그리하여 장헌충은 황급히 도망친다. 당시 농민군은 황득공의 이름만 들으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도망치자, 도망치자 황가병이 왔다." 이를 보면 황득공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한 후, 황득공은 노구덕의 말에 혹해서 마사영을 핍박하여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주유숭을 옹립한 공신이 된다.
사진 중에서 황득공의 병마는 가장 적었다. 그러나 그는 정충보국의 장수이다. 청군이 침입했을 때, 나머지 3진은 모두 투항했지만, 황득공만이 최선을 다해서 싸우면서, 이 왕조를 위하여 마지막 피까지 흘린다.
제이진, 고걸(高傑)
고걸은 자가 영오(英吾)이고 섬서 미지(米脂) 사람이다. 그는 이자성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리고 이자성의 중요한 장수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여자 하나때문에 대순을 버리고 대명에 투항한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장수가 된다.
원래 이자성의 처인 형씨(邢氏)는 대단한 여자였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아니라, 회계도 뛰어났다. 형씨는 이자성을 대신하여 재산관리를 했고, 이자성의 모든 군수물자를 관리했다.
고걸은 매일 형씨에게 가서 양식을 받아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눈이 맞았다. 고걸은 이자성의 부인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고나니 고걸은 겁이 났다. 그는 이자성이 자신을 죽일까봐 겁이 났다. 결국 고걸은 형씨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들은 명나라에 투항하고, 이자성과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되고, 이자성과 원수지간이 된다.
고걸은 명나라에 투항한 후, 즉시 명나라의 선봉장이 된다. 고걸의 진격에 이자성은 반격을 못했고, 대패한다. 하마터면 죽임을 당할 뻔했다.
나중에 이자성이 발전하고 난 후에 심시도세(審時度勢)하는 명나라장수들은 이자성에 투항한다. 유독 고걸만 죽어라 투항하지 않았다. 당연히 고걸은 투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이자성을 피하기 위해 고걸은 도망을 선택한다. 그는 섬서에서 산서로 도망치고, 다시 산서에서 산동으로 도망친다. 마지막에는 산동에서 계속 남하하여 남쪽으로 간다.
주둔지를 함부로 벗어났으므로 고걸은 군량공급을 받지 못한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고걸은 약탈방화를 선택한다. 당연히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고걸은 자신을 농민군으로 위장했다. 나중에 이런 일을 너무 많이 벌이다보니 고걸의 일은 들통난다. 그는 남방백성들의 원성을 산다.
원래 고걸과 같이 살인방화에 적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장수를 평상시라면 엄히 징벌해야 마땅했다. 그래야 일벌백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천하가 대란에 빠져있고, 여하한 정권도 모두 고걸같이 병력과 장수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그래서 누구나 회유하고자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고걸이 남방에 도착한 후, 마사영은 그의 방력이 강한 것을 보고(병력3만, 말,당나귀 9천), 그를 회유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게 한다.
서로 협상을 거쳐, 고걸은 마사영에게 투신한다. 그는 남명의 장수가 된 것이다. 명을 받아 서주(徐州)에 주둔하며 북방의 적을 방어한다.
나중에 황득공과 마찬가지로, 노구덕에게 혹해서 고걸은 마사영을 핍박하여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또 한명의 옹립공신이 된다.
남명에 투신한 후, 황득공과 생각이 달라서, 두 사람은 서로 미워한다. 약간의 문제만 터져도 둘은 싸움이 붙을 상황이었다. 이 두 사람때문에 사가법(史可法)은 골치가 아팠다. 사가법은 큰 노력을 들여 겨우 두 사람간의 갈등을 잠시 봉합할 수 있었다.
사가법을 골치아프게 하였지만, 그래도 4진중에서 고걸은 유일하게 사가법의 명령을 듣는 장수였다. 그래서 사가법은 고걸을 아주 중시한다. 그는 남명의 대들보가 된 것이다.
아쉽게도, 청군이 남명을 공격하기 전날, 고걸은 적의 계책에 속아 전장터에서 전사한다. 고걸이 죽은 후, 그의 부대는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어, 결국 모두 청군에 투항하게 된다. 고걸의 부하들은 청군에 투항한 후, 사가법에게는 더 이상 쓸 군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양주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제삼진, 유량좌
유량좌는 자가 명보(明輔)이고, 산서 대동(大同)사람이다. 전투때 그는 잡색마를 한 마리 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화마류(花馬劉)"라고 불렀다.
유량좌는 원래 비적(匪賊)이었다. 사는게 곤궁하여 농민군에 가담한다. 나중에 유량좌는 농민군에서 있다가는 앞날이 밝지 않다고 생각하여, 명군에 가입한다.
명군에 가입한 후, 유량좌는 농민군의 무서움을 깊이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아예 농민군과는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농민군이 될지도 모르는 백성들만 괴롭히며 자신의 정치업적을 쌓는다.
최종적으로 '적군을 죽인' 공로로 유량좌는 빠르게 승진한다. 숭정말년에 그는 이미 총병에 올라 고위장수가 된다. 당연히 관직이 오르면서, 유량좌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괴롭혀서 농민군에 가담하게 했을까? 아마 그 자신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숭정말년, 경성으로 진격하는 이자성의 군대를 보고, 숭정제는 유량좌에게 북경으로 와서 황제를 호위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 성지를 받은 후, 유량좌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즉시 깔아뭉개고 따르지 않는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반대로 남하하여 피난한다. 당연히 고걸과 마찬가지로, 그는 가는 길에 계속 약탈을 한다. 그래서 그는 강남백성들에게 원성이 높았다.
나중에, 황득공과 같이 전투를 한 바 있어서(그들은 함께 장헌충을 막았다), 황득공의 도움하에 유량좌는 마사영의 부하가 된다. 그는 이렇게 남명의 장수가 된 것이다.
<남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량좌는 남명에 투항한 후, 마사영이 그에게 임회(臨淮)를 지키게 한다. 결과 현지백성들은 유량좌의 죄행을 알게 되었고, 성문을 걸어잠그고 유량좌의 입성을 거부한다.
이를 듣고는 유량좌가 대노한다. 그는 명을 내려 성을 공격한다. 남명의 장수가 남명의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것이다. 나중에 일이 커지게 되니, 마사영이 친히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유량좌에게 수현(壽縣)에 주둔하도록 명령하고, 나중에 군대를 다시 봉양으로 옮기게 한다. 그렇게 하여 유량좌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더 이상 사건을 벌이지 않게 된다. 사진이 된 후, 유량좌의 유일한 '업적'은 토목공사를 벌인 것이다. 왕궁을 만들었다.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은게 없다. 거의 모든 나쁜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는 다 했다. 동생 유량신(劉良臣)이 송금전투에서 청군에 투항했고, 이로 인하여 그와 청군의 관계는 애매했다. 그는 자신에게 살길을 마련해 두었다. 나중에 청군이 남하하자 류양좌는 두말도 하지 않고 청군에 바로 투항해버린다. 그후 유량좌는 스스로 나서서, 황득공의 부장 전웅(田雄), 마득공(馬得功)을 설득하여 청군에 투항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황득공의 세력은 철저히 와해되고, 청군을 위해 큰 공을 세운다.
사진 가운데, 유량좌는 충군애국사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사상은 젖을 주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이다.
제사진은 유택청(劉澤淸)이다.
유택청은 자가 학주(鶴洲)이고, 산동 조현(曹縣) 사람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고, 시정의 무뢰배였다. 나중에 고향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쫓겨난다. 고향을 떠난 후, 유택청은 갈 곳이 없어 군대에 들어간다. 그는 용맹하고 잘 싸워서 우수한 장수로 성장한다. 등주 공유덕(孔有德)의 난을 평정한 후, 유택청은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명나라의 산동총병(山東總兵)에 임명되어 고위장수가 된다.
숭정말년,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으로 밀려올 때, 숭정제는 유택청에게 북경으로 와서 황제를 호위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유택청은 고의로 말에서 떠어져 '말에서 추락하여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핑계로 명을 받들지 않는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유택청은 이자성이 자신을 공격하러 올 것을 겁내어, 주둔지를 떠나 남으로 도망친다. 그는 회안(淮安)일대에 주둔하며 군벌이 되고자 했다.
그이후 남명이 황제를 선택할 때, 유택청은 동림당에 잘 보이기 위해 노왕(潞王)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삼진의 움직임을 보고는 즉시 복왕(福王) 주유숭을 옹립하는데 참가한다. 그리하여 그도 옹립공신이 된다. 이 4진 가운데, 유택청은 가장 원칙없는 장수이다.
사진중 하나가 되어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방어대책을 묻는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복왕을 등극하게 옹립한 것은 그저 내가 쉬려는 것일 뿐이다. 만일 일이 터지면, 나는 강남의 한개 군을 정해서 거기로 갈 것이다." 청군이 남하할 때, 유택청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청군에 투항한다.
이상은 사진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이 사진은 스스로 '천자는 내가 옹립했다"고 자부하면서, 발호하며 불가일세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조정을 무시했다.
생각해보라. 하나의 회사에 여러 명의 말듣지 않는 간부가 나타났다면 그리고 모두 혼란을 가져온다면 그게 무슨 회사인가.
사진이 남명왕조에 가져다준 폐단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사진은 완전히 세금도 스스로 거두었다. 그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곳을 하나의 국가로 여겼다. 그들은 한 지방에 할거한 토황제였다. 그동안 그들은 토목공사를 벌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나쁜 짓은 다 했다. 그들이 남명백성들에게 가져다준 고통은 엄청났다.
더욱 무서운 일은 국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외에 사진은 서로 싸웠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은 서로 공격하고, 상대방이 영지를 빼앗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상사라 할 수 있는 사가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골치만 썩일 뿐이었다.
숭정17년(1644년) 오월 초구일 주유송은 신하들과 회의를 열어, 이 4명의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그들에게 방어지역을 선정해준다.
황득공, 여주에 주둔한다. 남직예중부 장강이북지역을 관할한다. 그리고 북쪽의 유량좌와 고걸부대를 지원하며, 장강중류의 불측사태에 대비한다.
고걸, 서주에 주둔한다. 남직예서북부 황하와 회하사이의 지역을 관할한다. 그리고 하남북부의 공수를 책임진다.
유량좌, 봉양에 주둔한다. 남직예서부와 중부 회하이남지역을 관할한다. 그리고 하남중부와 남부의 공수를 책임진다.
유택청, 회안에 주둔한다. 그리고 남직예동북부와 산동남부의 공수를 책임진다.
이 4진을 배치한 후, 조정은 "사진이 있으니, 독사(督師)가 있어야 하다"는 것을 이유로, 사가법을 사진총독에 임명한다. 그는 양주에 주둔한다.
명목적으로 보면, 사가법은 이들 사진의 상사이다. 당연히 그건 명목상일 뿐이다.
이 사진은 스스로 '황제는 내가 옹립했다'고 내세우며 발호했다. 근본적으로 사가법은 눈아래 두지 않았다. 사가법이 뭐라고 말을 해도 이들은 듣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발호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아예 성지도 무시해 버렸다.
<과강칠사>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정이 성지를 하나 반포했는데, 황득공과 고걸간의 옛원한을 풀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황득공은 조서를 절반 정도 읽더니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휘두르며 온 대신에게 소리쳤다:
"꺼져라. 빨리 꺼져라. 나는 무슨 조서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과강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걸도 성지를 무시했다. 한번은 조정이 그에게 성지를 하나 내렸다. 성지가 고걸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경멸했다. "성지는 무슨 놈의 성지. 너는 황극전에서 누가 말타고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성지까지도 대항하니 이 사진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이 사진이 공공연히 성지를 위반할 수있었던 것은 홍광제 주유숭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겁없이 날뛸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마음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진을 파면하면, 누가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할 것인? 사가법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사가법은 물론 적절한 인물이지만, 황제의 눈에 자신을 옹립하지 않은 자에게 군대를 다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황제의 보호하에, 사진은 겁없이 날뛴다. 조정 제일대신인 마사영 조차도 이들 사진에 의존하여 힘을 썼다. 그리고 이들 사진이 요구하는 일은 최대한 맞춰주었다.
누가 알았으랴. 조정이 이들 사진을 종용하다보니 두 가지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첫번째 결과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이다. 다른 장수들도 황제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원래 장수라면 모두 황제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인들이 발호하고 나라가 나라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마음으로 홍광제는 아예 그들의 죄를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극력 그들을 비호한다. 그들이 계속 발호하게 방임한다.
그 결과 황제의 이런 종용은 천하의 장수들에게 좋지 않은 모범을 보이게 된다. 이후 남명의 모든 장수들은 이 사진을 본받아 발호하고 성지를 무시하게 된다.
호남의 하등교(河騰蛟)이건, 복건의 정지룡(鄭芝龍)이건, 호북의 좌량옥(左良玉)이건, 모두 성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대때로 사진을 배워 항명하곤 했다.
방법이 없었다. '사례'가 있다. 네가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만 처벌하려 하느냐. 왜 서로 차별대우하는가. 다른 장수들도 따르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좌량옥의 반란을 불러오게 된다. 이는 남명조정을 압사시킨 마지막 지푸라기가 된다.
두번째 결과는 사진의 발호로 사가법이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고,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모아 이들 네명의 어르신을 모셔야 했다. 그들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주유숭의 종용하에 이 사진은 근본적으로 사가법을 무시했다. 그래서 그의 명을 아예 듣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가법은 최후의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들에게 충분한 이익을 주어 그들의 충성심을 끌어내려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진이 스스로 영지내에서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영토를 확장할 권한도 부여한다.
"무릇 각 병마들의 전량은 모두 스스로 거두었다. 한개 성, 한개 읍을 회복하면 바로 그의 관할에 들어갔다"(노화록.권3)
"각진이 실지를 만일 수복하면, 그 관할에 들어갔다. 누구든 한 땅을 수복하면, 그 지역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명계남략>)
이런 명령은 사진을 번왕(藩王)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그때부터 나라안의 나라가 된다.
이렇게 하여 사진은 번왕이 된 후,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들은 진취적인 생각이 없던 장수였다. 고걸에게 약간의 양심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그는 딱 1번 북벌한다), 나머지 삼진은 아예 북벌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생각은 영지내에서 토목공사를 하여 황궁을 짓고, 세금을 거두고,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남명왕조의 비가(悲歌)는 이렇게 장명(長鳴)하게 된다.
사가법은 4진이 말을 듣게 하기 위하여, 큰 마음을 먹고 국가에서 이 사진을 번왕으로 책봉하게 한다.
사가법의 원래 의도는 이를 통해 충성심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이 사진이 말을 듣게 하여 자신과 함께 북벌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다. 사진은 번왕이 된 후, 남명왕조는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 사진은 번왕이 된 후 모두 하루에 천금을 쓴다. 죽어라 돈을 만들어냈다. 당시 홍광조정은 이 사진을 건립한 후, 매진마다 3만의 인마, 매년 20만석의 쌀, 40만냥의 은을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1석살은 은1냥의 가치가 있으므로, 사료는 통일적으로 1개진의 세향은 육십만이라고 쓴다. 사진이 매년 받는 군자금은 모두 240만냥인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12만대군에 240만냥을 주면 충분하다. 게다가 4진은 자신이 통제하는 지방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조정이 주는 돈은 확실히 넘쳐났다.
그러나 이런 숫자의 군량도 사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더 달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무력으로 협박까지 한다.
이들 사진을 다독이기 위하여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그들에게 돈을 준다. 결국 조정이 1년에 사진에 주는 돈이 360만냥에 이르게 된다.
360만냥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일가? 전체 남명조정이 1년에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500만냥에 미달했다. 그러므로 절반이상의 국가수입이 모두 이들 군벌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홍광제도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마사영, 완대성도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돈을 모두 사진에 줘버리다보니, 그들에게는 줄 돈이 없다. 어떡할 것인가. 할 수 없이 계속 세금을 늘여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그리하여 사진을 도화선으로 하여, 홍광조정은 미친 듯이 백성의 고혈을 짜낸다. 그래서 천하는 불안해지고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 국가재정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조정은 우회적으로 세금을 추가징수한다. 일시에 각종 명목의 세금이 나타나고, 각양각색의 세금이 부과된다.
결국 조정은 백성들이 술 1근을 마실 때마다 1푼의 세금을 납부해야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정말 거지에게 세금을 내라는 꼴이다.
당시의 사람 신승(辛昇)은 <경향(京餉)>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홍광조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일년혈비오년세(一年血比五年稅)
금세감추내세은(今歲監追來歲銀)
가이중두유미족(加二重斗猶未足)
연삼후수금수칭(連三後手急須稱)
가련매득빈아녀(可憐賣得貧兒女)
불포간서일석훈(不飽奸胥一夕葷)
사진에 돈을 보내기 위해 세금을 증가시키는 재난을 사가법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조정이 백성들을 쥐어짜내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사진이 약탈하고 착취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사진을 위해 돈을 긁어모아주어야 했다.
정렴(鄭廉)의 <예변기략>에 따르면 사진의 하나인 유택청이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집을 죽어라 지었다. 그의 집은 화려하기가 황궁에 못지 않았다. 심지어 더 화려하면 화려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이런 토목공사를 벌이려면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유택청은 사방에서 장정을 붙잡아 오게 시킨다. 그들을 시켜서 자신의 집을 짓게 하려는 것이다.
대장군의 뜻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을까? 그리하여 유택청의 부하들이 모두 출동하여 도처에서 사람을 잡아온다. 실적을 높이기 위해,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이든 가리지 않았다. 남자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붙잡아서 일을 시켰다.
유택청의 수하들이 이렇게 사람을 아무나 잡아들이다보니, 나중에는 사가법까지 잡아간다. 그렇다. 바로 독사 사가법을 잡아간 것이다. 원래 사가법은 민간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사복을 입고 유택정의 공사현장으로 가보았다. 그러다가 유택청의 부하가 그를 보고는 두말없이 잡아들인 것여 일터로 보내 일을 시킨 것이다. 사가법이 아무리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사가법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일을 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결국 가련한 사가법은 3일간 힘들게 일을 하고서야 다행히 유택청이 공사현장을 시찰하러 나왔다가 사가법을 발견해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야사전설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 사진이 얼마나 발호했는지 알 수 있고, 당시의 사가법이 얼마나 가련한 위치였는지도 알 수 있다. 당당한 일개국가의 독사(총사령관)이자 지방최고의 행정장관이 끌려가서 막일을 하다니. 공사터에서 나무를 옭기고.... 그런 나라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명백하다.
사가법이 보기에, 사진이 탐욕이 넘치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는 건 사소한 문제이다. 사진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그들이 서로를 공격해서 자신의 지역을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남명의 땅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지역이 있으면 바로 들어가서 차지한다.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고걸은 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남직예서북부 황하와 회하사이의 지역을 관할했다. 그 결과 고걸은 자신이 가난한 지역에 거주하는데 불만을 품고 '양주'를 눈독들이게 된다. 고걸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양주에 주둔할 것을 청한다.
고걸이 임의로 양주에 주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조정이 화를 내기 전에 양주백성들이 먼저 화를 냈다. 모두가 몰려가 공격했으며 고걸이 양주성에 주둔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자신이 양주백성들에게 거절당한 것을 알고 고걸은 대노한다. 그는 양주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힘으로 이 도시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주성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는 바람에 고걸이 한달이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자기 마음대로 성을 공격하고, 그것도 한달간이나 하다니, 고걸의 이런 행위는 반란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일이 다른 왕조에서 일어났다면 분명히 사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홍광제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고걸이 양주백성과 싸우는 것을 보면서도 수수방관한다.
홍광제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사가법은 마음이 아팠다.
당시 고걸이 공격을 멍추게 하기 위해, 사가법은 고걸을 여러번 찾아간다. 그리고 그를 다독거린다. 그러나 사가법의 설교를 고걸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방법이 없던 사가법은 혼자서 고걸의 군영으로 가서 설득에 나선다. 그러나 고걸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사가법도 군영에서 떠나지 않고 버틴다.
이렇게 하여 고걸의 군영에서 1달간 머무르게 된다. 사가법에 결국 고걸이 설득당하여 철군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양주를 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고걸은 멀리 가지 않았다. 양주에서 멀지 않은 과주(瓜州)에 주둔한다. 기회만 있으면 양주를 공격하여 손에 넣을 생각뿐이었다.
당시의 남명에서 고걸처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성을 빼앗는 장수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무리였다. 담천의 <국각(國榷)>에 따르면, 사진은 지역을 빼앗기 위해 강남백성들과 빈번하게 충돌했다.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태부소경 만원길(萬元吉)은 세번에 걸쳐 상소를 올려 병민지쟁(兵民之爭)을 아뢴다:
"양주, 임준, 육합에 소재하는 병사들과 백성이 서로 싸웁니다. 병사들은 기율이 없고, 백성들의 근처로 가면 더욱 엉망진창입니다. 1개의 성을 사이에 두고 백성들은 병사들을 도적이라 생각하며 죽어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여 둘러싸고 공격하며 풀어주징 않습니다."
하나의 풍파가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사가법이 막 양주문제를 해결하고, 아직 숨도 고르기 전에, 사진에서 또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번에는 고걸과 황득공이 서로 싸우는 것이다. 내전이 붙은 것이다.
관료, 비적으로서 황득공은 계속 고걸을 멸시했다. 고걸도 그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간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상대방의 눈엣가시로 여긴다. 반드시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은 서로 싸웠고, 상대방의 땅과 인마를 차지했다.
사가법이 독사로 있으면서, 황득공의 심복중에 황비(黃蜚)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설에는 그의 양자라 했다. 그는 남경으로 들오와 황제를 알현한다. 그때 고걸의 지역을 지나게 되는데, 황비는 고걸과 황득공간에 불화가 있는 것을 알고, 고걸이 자신을 붙잡아 괴롭힐까봐 황득공에게 자신과 같이 남경으로 가자고 청한다. 그렇게 하여 안전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황비의 요청에 황득공은 두번도 생각지 않고 바로 응락한다. 그는 삼백의 친병을 이끌고 출발하여 황비를 보호하며 남경으로 간다.
황득공이 3백의 병사를 이끌고 몰래 자신의 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들은 후, 고걸의 첫번째 반응은 "황가는 좋은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가 몰래 나를 기습하려는 것이다. 내 땅을 빼앗기 위하여!" 그리하여 고걸은 두말도 하지 않고, 대군을 이끌고 이 삼백명을 포위한다. 그리고 황득공과 전투를 벌인다.
상대방이 인원도 많고 기습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황득공은 참패하고 돌아온다. 비록 황득공과 황비는 빠져나왔지만, 삼백의 병사는 모조리 몰살당한다.
다행히 도망친 후, 황득공은 대노한다. 즉시 병마를 모아, 고걸의 지역으로 간다. 그와 싸우려는 것이다. 고걸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병력을 이끌고 황득공과 죽기살기로 싸울 준비를 한다.
바로 내전이 일어날 판이었다. 다행히 남명에는 그들을 말릴 수 있는 사가법이 있었다. 그는 그런 쓸모는 있었던 것이다.
사가법이 중간에 나서서 화해시키고, 조정에서 돈을 내놓아 황득공의 손실을 배상해준다. 사가법은 고걸에게는 별도로 돈을 내서 황득공의 모친 생일을 축하해주게 설득한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간의 은원은 표면적으로 해소된다.
황득공, 고걸은 사가법의 얼굴을 봐서 잠시 화해하기는 했지만, 그들간의 원한이 근본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웠다.
그 이후 황득공과 고걸은 계속 조금씩 싸웠다. 상대방을 죽이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한 국가내에서 무장들이 이렇게 혼란스러우니, 그 국가의 미래가 어떨지는 불보듯 뻔하다. 게다가 남명의 군주도 멍청하여, 간신이 횡행한다. 이런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힘든 일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사가법은 충성심으로 나라에 보답하려 했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는 국면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저 두눈 멀거니 뜨고 남명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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