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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공리주의역사관: 악비와 문천상을 민족영웅에서 몰아내다.

by 중은우시 2018. 1. 23.

글: 조아도(趙亞濤)


1


12세기, 금나라군대가 황하를 넘고, 대송왕조는 순식간에 역사존망의 벼랑끝에 섰다.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는 왕공귀족을 이끌고 망국노(亡國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황하양안의 인민대중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대송왕조가 있었다. 상주부(相州府) 탕음현(湯陰縣)의 악씨집안 노부인은 굳은 마음을 먹고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를 새긴다. 그녀의 아들이 위기의 순간에 떨치고 일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악씨집안 도련님은 과연 기대에 부응하여, 10여년후, 12세기 일대군신(一代軍神)이 되어 대군을 이끌고 주선진(朱仙鎭)으로 쇄도해 들어가, 변경을 광복시키겠다는 바램을 곧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악비는 실패한다. 그는 조정의 소환을 받는다. 그리고 풍파정(風波亭)에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다만 악비는 스스로 "환아강산(還我江山)"의 장지에 부끄럽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강개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갔으며, 천고에 미명을 남겼으니, 더 무엇을 원하겠는가.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설사 김올술(金兀術)의 자손이 천하통일한 시대에 민간에서는 <설악번전(說岳全傳)>같은 평서가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인민대중은 조정에 앉은 인물이 여진인과 혈연관계가있는지 없는지는 신경쓰지 않았고, 그들은 그저 "정충보국"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역사의 에피소드는 완벽하게 악비와 악가군이 무엇을 추구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악비는 잘못 생각했었다. 중화민족의 능연각에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악비, 그는 민족영웅이 아니다!


2


악비와 동병상련인 인물로 송나라의 또 다른 영웅 문천상(文天祥)도 있다.


문천상은 어렸을 때, 이런 현상을 주목했다. 양송시대에, 그의 강서 길안 고향의 구양수(歐陽修), 양방의(楊邦義), 호전(胡銓)의 시호에는 모두 "충(忠)"자가 있다.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는 개념은 이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20세때, 문천상은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자를 송서(宋瑞)로 고친다.


역사는 고쳐쓸 수 없다. 원나라군대가 남송을 침범하고, 동남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송나라는 기울게 된다. 장원급제한 문천상은 그의 강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문약한 몸으로 시세를 거슬려, 거병하여 원나라에 항거한다. 남송조정이 마지막 3년을 겨우겨우 버틸 수 있도록 힘을 다한다.


문천상은 포로로 잡힌 후, 원나라의 감옥에서 3년을 지낸다. 원나라조정은 그를 인재로 보아, 투항을 권유한다. 그는 이런 싯구를 지었다: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


아마도 문천상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국주의사상을 가장 잘 체현한 영예인 민족영웅의 명단에 문천상이라는 찬란한 이름이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들과 비슷한 운명으로는 우겸(于謙), 사가법(史可法)등도 있다.


3


악비부터 시작하여 1980,90년대부터 하나 또 하나의 역사인물이 "민족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항X영웅(抗X英雄)"으로 바뀌어 불린다. 왜냐하면, "민족영웅"이라고 인증을 받으려면 정부에서 내놓은 기준은 이러하다: 중화민족의 대가정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악비의 적은 여진족인데, 일찌감치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편입되어 들어왔다; 문천상과 우겸의 적수는 몽골인인데 현재는 우리의 몽골족 형제들이다; 사가법의 적수는 중국의 현대 강역을 닦은 민족 즉 여진족이다. 이제 모두가 한 가족이 되었다. 옛날에 죽기살기로 싸운 것은 이제 '내전(內戰)'일뿐이다. 그래서 이 몇볓 영웅을 민족영이라고 부른다면, 이들 소수민족을 남취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듣기에는 그럴 싸하다. 그렇지 않은가?


사고가 정치하고, 역사관도 정확하고, 문제를 고려하는 것도 아주 주도면밀하다.


다만 이런 논조는 항상 좀 이상하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사람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중화민족이 세계의 동방에 우뚝 섰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여러 해가 지난 후, 중국이 성공적으로 왜국을 동화시킨다면, 그때는 등세창, 양정우, 장자충등의 장군들도 '민족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떼어야 하는가? 그래서 한 등급을 내려 악비, 문천상과 같은 등급이 되어야 하는가?


설마 우리의 마음 속에 무상한 영광으로 여겨지는 "민족영웅"은 그저 기준이 바뀌면 이러저리 바뀌는 그런 것인가?


4


어렸을 때, 명나라의 나관중 선생이 쓴 <삼국지통속연의>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 장면이 아주 인상깊었다. 조운(자룡)이 장판파에서 일곱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유아두(劉阿斗)를 구해낸다, 다만 목소리가 너무 커서 미부인(糜夫人)을 놀라게 하여 미부인이 우물속으로 뛰어들어 죽게 된다. 비록 전쟁터에서 적은 정복했지만, 조운은 역대 "무신묘'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조운은 '무신묘'에 들어가지 못하고, 겨우 외적과 결탁하여 초나라의 침입을 불러왔던 오자서와 같이 무신묘의 바깥을 호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는 중학교에 다닐 때라 이 "일신시담(一身是膽)"인 조자룡이 무신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나중에 역사유물주의를 배우고 나서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인의 의지를 가지고 억지로 고대인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런데 현재, 해석권위를 지닌 관련부서는 중학시절의 나보다 그다지 식견이 있는 것같지 않다. 한명 또 한명의 애국주의 장수들이 '민족영웅'의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있다.


처음에는 악비, 그 다음에는 문천상, 우겸.


최근 들어서는 소수민족과의 단결을 위하여,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같은 군신들도 교과서에서 삭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0여년동안 우뚝 속아있던 '애국주의시인' 굴원(屈原)도 하룻밤만에 '막수유'의 죄명으로 교과서에서 쫓겨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의 존재는 민족단결에 불리하거나, 굴원처럼 너무 강직해서 의문이 든다.


우리의 역사관, 우리의 애국주의에 한 해석이 이렇게 공리를 따져서야 되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동북의 임해설원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일제와 전투를 벌이다가 총알이 떨어진 후 포로로 잡혀 순국한 양정위 장군도 여러해 후에는 그런 이유로 민족영웅의 명단에서 삭제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국가의 번성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별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하는가.


5

 

다행히 정의는 마음 속에 있다. 위청, 곽거병이 쫓겨난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들 역사인물을 부른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민족영웅 구하기"전투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결국 이들 역사인물을 중학교 역사교과서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승리로부터는 아직 거리가 아주 멀다. 공리주의역사관을 철저히 청산해야한다는 목표는 아직도 요원하다.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