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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염민(冉閔): 그는 한족의 대영웅일까? (1)

by 중은우시 2018. 10. 31.

글: andy


염민의 자는 영증(永曾)이고, 소자(小字)는 극노(棘奴)이며, 원명은 석민(石閔)이며 한대 이민(李閔)이라고 하기도 했다. 위군(魏郡) 내황(內黃, 지금의 하남성 안양 내황 고제향 채외촌) 사람이다. 그는 1600여년전의 동진 및 남북조시대에 살았던 명장 중 하나이다. 갈호조(羯胡趙, 후조)의 폭군 석호(石虎)의 한족 양손(養孫)이며, 갈호조 후기의 권신이자 시군찬위자이다. 그가 세운 염위(冉魏)는 겨우 2년여 존속했다. 그는 염위의 창업자이자 유일한 황제이다.


그는 고금이래로 논쟁이 많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염민은 "항우의 전세이고, 한인을 구원해준 개세영웅"이며, "고의로 잊어버린, 화하 한족이 종종멸절의 화에서 구해준 중화제일의 민족대영웅이며, 그의 지위는 당연히 악비, 문천상, 원숭환, 사가법등 정통 민족영웅보다 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고, "역사에 염민이 없었다면, 현재 한족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를 "어려서부터 갈호족의 살부지구를 짊어지고, 적의 군영에서 20여년간 지내면서 계속하여 반항하고 결국 성공적으로 갈호조의 통치를 무너뜨린 한족의거군의 영수"라고 말한다.


그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를 개돼지만도 못한 '망은부의한 자'로 본다. 역사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한족들에게 이민족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인종말살을 하도록 선동하고 집행한 '극단적 인종주의 도살자"이며, 어려수 이미 갈호화되고, 두 손에 한족의 선혈을 묻힌 '매국노이며 대야심가'라고 보며, 살인을 좋아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고가과인, 참위자"라고 본다. 유총, 석호, 부생, 혁련발발같은 류의 오랑캐폭군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본다.


염민은 도대체 어떤 역사인물일까? 우리는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그의 신세내력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염민과 염위에 관한 기록은 주로 당나라때 방현령, 저수량이 편찬한 <진서>와 북송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이다. 염뮈와 동시대의 동진에도 비서감, 급사중 손성이 쓴 <진양추>가 있다. 그러나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북제의 위수가 편찬한 <위서>에도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본 각 사서에 기록된 것은 모두 주로 북위의 저명한 사학자 최홍이 쓴 <십육국춘추>에서 온 것이다.


1. 조사절(祖死節), 부항갈(父降羯), 유년실호(幼年失怙)


역사기록에 따르면, 염민의 조부 염륭(冉隆)과 부친 염량(冉良)은 모두 진(晋)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한족유민을 모아서 호족에 저항했던 하내 진류의 "걸활군(乞活軍)" 총사령관 진오(陳午)의 부하 부장이었다. 그의 선조는 동한때 여양기도독을 지냈고, 역대이래로 무장을 지낸다. 염륭은 하내(지금의 하남성 황하이북의 서부지역)에서 흉노한(匈奴漢, 전조)의 병주자사, 급군공인 갈호인 석륵과 싸울 때 전사한다. 염량은 비록 '걸활군'의 소년장군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힘도 좋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고 두려움이 없었으며, 일찌기 동진으로부터 '건절장군'의 봉호를 받았지만, 12살때 패전하여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갈호의 석륵에게 투항한 후 이미 석륵이 진나라를 정벌할 때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갈호인은 흉노의 별부인 강거(羌渠)부락에서 나왔다. 서아시아의 새종(塞種, 스키타이인, 사카인 혹은 셈족) 유목부락이며, 코카서스백인종에 속한다. 최근 들어 자칭 석륵의 69대 적장손이라는 하북성의 한족 석욱호(石旭昊)가 가족에게 구전되어 오는 역사에 대량의 자료를 고증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갈호인은 원래 로마제국에 망한 고대 이스라엘에서 왔다. 망국후, 유태인은 로마인들에게 고향에서 쫓겨났고, 그중 일부는 동쪽으로 와서 중앙아시아에서 흉노에 투항하여 갈호부가 된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유대교이다. 배화교가 아니다." 흉노의 여러 부락중에서 지위가 아주 낮았고, 그들은 투항해온 천한 노비에 속했다. 동한초기, 갈호부족은 남흉노를 따라 병주의 상당 무향으로 이주하여 정착한다. 석륵은 마노(馬奴)로 시작하여 흉노한(전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상장이 된다. 갈호족을 이끌고 굴기한다. 나중에 흉노한(전조)가 내란에 빠지자 관동에서 독립하여 갈호조(후조)를 세운다. 10년후 흉노조(전조)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다.


염량은 용맹하고 전투에 앞장서며, 전공이 혁혁하여, 석륵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그가 가장 총애하고 믿은 종자(從子)이며 군대를 이끌고 권력이 큰 정로장군 석호로 하여금 의자(義子)로 거두게 한다. 그리고 이름을 석첨(石瞻)으로 바꾸게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석씨집안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철저히 갈호에 충성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석첨(즉, 이전의 염량)은 좌적사장군, 서화후에 오르고, 그의 염씨성의 가족들과 부하들과 함께 난릉군(蘭陵郡, 후에 석호는 무흥군으로 개명한다)으로 가서 주둔한다. 석첨은 22세경에 결혼했다. 그의 혼인은 아마도 석륵가족의 영향을 받았던 듯하다. 처인 왕씨(王氏, 염민의 생모)는 아마도 한족일 수도 있고, 갈호인일 수도 있다(당시 중원으로 이주한 갈호족은 한족성을 많이 썼다. 석륵의 모친의 성인 왕씨같은 경우이다). 그래서 염민은 아마도 순수한 한족일 수도 있고, 한족과 갈호족의 혼혈일 수도 있다. 석첨은 약 29살때, 의부인 중산공 석호를 따라 흉노조(전조)를 정벌하다가 전사한다. 석륵을 17년간 모셨다. 이때 염민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다.


2. 폭군 석호의 양손에서 갈호제국의 굴묘인(掘墓人)으로.


석민(즉 나중의 이민, 염민)은 어려서부터 과감하고 예리했다. 석호의 양손으로 그의 총애를 많이 받는다. 석민은 6살때 부친을 잃고, 석호가 그를 기르게 된다. 의식과 습관이 모조리 갈호화 혹은 석호화된다. 포악한 석호는 친히 그를 가르쳤고, 석민은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하는 냉혈한으로 자라난다.


자라면서, 석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석민은 16살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다. 처음에 북으로 요동의 선비족 연(燕)나라를 정벌하고, 다시 남으로 동진의 형양북비와 싸우고, 나중에 원 동궁고력독정양인 한인 양독이 이끄는 진옹호한수졸의 반란을 피로 진압한다. 그는 두 손에 한족의 피를 가득 묻히며, 전공을 크게 세워서 명성을 떨친다. 석호가 죽기 전에, 나이 겨우 27살의 석민은 이미 정로장군, 무흥군공(원래는 난릉군공인데 나중에 참언으로 멸석자릉(滅石者陵)이라는 말이 있어 석호는 난릉군을 무흥군으로 개명한다. 그리고 석민을 무흥군공으로 고쳐 봉한다). 석호의 12명 아들을 보면 하나같이 포악하고 냉혈한이며 변태적이고 악독하고 서로를 잡아먹고 권력과 이익을 다투었으며 모두 악독하기 그지없었으나 담량, 권모술수, 위망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 천하의 대사를 이룰 사람은 못되었다. 그러나 한족의 양손인 석민은 비록 냉혈한 살인자로서 다른 아들들에 못하지 않지만 함부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하를 잘 대해주었고, 진퇴를 알았으며, 담량과 권모술수가 있었다. 임기응변에 능했고, 전투에서는 과감하게 돌진하여 명성이 다른 석호의 아들들보다 훨씬 높았다. 석민은 비록 석씨종실에서 출중한 인물이고, 석호의 총애를 받았지만, 어쨌든 갈호족 후예가 아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외장(外將)으로 지내며, 조정에는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만일 석호가 죽은 후 갈호조의 승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안정되었다면 석민은 아마도 부친 석첨과 마찬가지로 평생 갈호조의 석씨들의 충견으로 끝났을 것이고, 절대로 황위를 차지할 생각은 꿈꿀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석호가 죽자, 즉시 여러 아들들 사이에 권력쟁탈전이 벌어진다. 석호의 아홉째 아들인 대장군, 팽성왕 석준(石遵)은 강(羌)족 추장인 요익중(姚弋仲), 저(氐)족 추장인 포홍(蒲洪), 정로장군 석민의 지지를 받아 이성(李城)병변을 일으켜, 이미 합법적으로 즉위한 11살짜리 막내동생 석세(石世)의 황위를 빼앗고자 한다. 그러나, 석준은 원래 담략이 없고, 자신감이 부족해서, 석민의 군대내의 명망을 빌리면서, 일이 성사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한다(석준은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석민을 전봉장군으로 삼아 업도로 쳐들어간다. 그리하여 석민의 권력욕에 불을 붙인 격이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권력욕을 급격히 팽창한다. 그는 전력으로 석준을 도와 황제위를 빼앗는다. 석세는 겨우 22일간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그의 모친인 유태후(흉노조의 유요의 막내딸인 안정공주)와 함께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다만, 석민은 금방 크게 실망한다. 갈호조의 황제인 석준은 등극한 후 식언한다. 그의 죽은 형인 연왕 석빈(石斌)의 아들 석연(石衍)을 태자에 앉힌 것이다. 석민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는다. 원래 그는 한족 혈통인 '석호의 양손'이다. 갈호 석씨종실이 보기에 그는 그저 '비아족류, 기심필이'인 비천한 가노일 뿐이다. 이제, 석민은 자신도 황제위를 계승할 수 있는 석씨종실자손과 다름이 없다는 꿈에서 철저히 깨어나고, 그의 중원 화하민족의 근성이 되살아난다.


석준은 황제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하여 석민, 이농(李農)등 한족중신의 군사력과 명망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득이 석민에게 군정대권을 넘겨준다. 그리하여, 보국대장군 석민과 사공(司空) 이농은 연합하여 석호의 여덟째 아들이자 태보, 패왕인 석충(石沖)의 반란을 평정하고 석충을 사사한다. 석호의 방식을 따라 투항한 병졸 3만여명을 갱살한다. 그후 이농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동진의 3만 북벌군을 궤멸시킨다. 그리하여 동진에 귀부한 하북의 유민 20여만명은 절망적인 지경에 빠지고, 결국 대부분 죽고 만다.


그러나, 석준은 시종 석민을 심복대환으로 여긴다. 그에게 반란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제거하려고 한다. 석호의 셋째아들, 태부 의양왕 석감(石鑒)은 석민의 힘을 빌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석민에게 이 일을 몰래 알려준다. 석민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려 먼저 손을 쓴다. 사공 이농을 협박하여 궁중정변을 일으켜, 석준 모자, 황후 및 태자 석연등을 죽이고, 석감을 황제에 앉힌다. 석준은 황제의 자리에 겨우 반년간 앉아 있었다.


3. 황위를 찬탈하고, 석씨를 모조리 죽이며, 위를 세우고 염씨 성을 회복한다.


석민은 대장군, 무덕왕이 되고, 이농은 대사마, 병록상서사가 되어 조정을 장악한다. 중추적인 지위인 사공, 중서감, 상서좌복야등은 모조리 한족이 차지한다. 석민, 이농을 우두머리로 하는 한족집권집단은 이미 갈호조의 권력중추를 완전히 장악한다. 갈호조의 황제 석감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석감을 우두머리로 하는 갈호종실의 귀족은 권세를 잃고 싶어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필사의 항거를 한다. 그리하여 속속 반란을 일으키고, 석민, 이농을 제거하려 하나 모두 실패한다. 석호의 넷째아들이자 낙평왕 석포(石苞)등이 모두 죽는다.


3천 갈족 병사들의 "호천궁변(胡天宮變)"이 참패한 후, 석감은 장기간 무장세력에 연금된다. 석민, 이농은 반란평정을 틈타, "내외육이(內外六夷), 감칭병장자참(敢稱兵仗者斬)"이라고 선언하고, 거병하여 반항하는 갈호족을 대거 죽인다. 호족은 속속 도망치게 된다. 석민은 그러자 다시 영을 반포한다: "오늘 이후 관청과 같은 마음인 자는 남고, 다른 자는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칙령을 내려 성문을 더 이상 잠그지 않는다. 이를 통해 오랑캐와 한족의 민심을 시험한다. 그 결과, "조인(趙人, 즉 한족. 갈호인은 '국인(國人)'이라고 불렀다)은 백리내에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고, 갈호족은 떠나는 자로 성문을 가득 채운다." 석민은 이때 갈호족과 철저히 관계를 단절한다. 갈호족에게는 뼈에 사무친 원한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서, '호족은 더 이상 내가 기용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도호령(屠胡令)"을 내린다. 갈호족에 대하여 대규모의 무차별적인 인종말살정책을 쓴 것이다. 그는 친히 오랫동안 갈호족의 잔혹한 통치에 시달린 한족을 이끌고, "오랑캐의 수급 하나를 베어서 봉양문으로 보내면, 문관은 삼등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조리 장교로 삼는다"는 정책을 내건다. 그리고 호갈육이(胡羯六夷)'를 대거 죽인다. '귀천,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참했다' 업도만 죽은 자가 '이십여만에 이르러, 시신이 여러 성문 밖에 놔두어서, 모두 들개와 승냥이 늑대가 먹었다." 그리고 극소수 갈호장수(예를 들어, 양주자사인 갈호인 마추(麻秋))는 스스로를 지키려 충성을 표하기 위해 자기 동족을 대거 죽인다. 용모가 호갈족과 비슷한 사람(코가 높고, 눈이 깊고, 수염이 많은) 한족 혹은 한호 혼혈족들도 많이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설명한다. 첫째, 멀리 진,한 이전에 계속하여 한,호의 혼혈현상이 있었다. 이때의 화하 한족중 한호가 혼혈된 후대가 이미 적지 않았다. 화하의 정통이라는 동진의 황실에도 한호혼혈의 진명제 사마소(司馬紹)가 있다. 둘째, '도호령'은 기실 그저 많은 중하층의 호갈인에 대한 무차별 종족도살이었다; 정치적필요에 따라, 관직에 있던 호갈종족의 귀족, 심지어 황실호위의 '용등위(龍騰衛)"는 바로 무차별도살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따르는 자는 남기고, 나를 거스리는 자는 죽인다.'였다.


그후 석민, 이농은 아예 참문 '계조리(繼趙李)"라는 참문을 이용하여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성을 이씨(李氏)로 바꾼다. 이것은 갈호정권의 "귀호천한(貴胡賤漢)"의 입국기반을 철저히 뒤흔들게 된다. 그리하여 석씨종실과 호갈족 고관귀족, 공후경교, 용등호위는 모조리 도망친다. 각지의 석씨종실, 호갈장수는 석호의 열한째 아들 신흥왕 석지(石祗), 여덟째 아들 여음왕 석곤(石琨), 강족의 추장 요익중, 저족의 추장 포홍등이 속속 반기를 들게 만든다. 석곤등은 7만의 병력을 이끌고 덥도를 공격한다. '이민(즉 석민)'은 그들을 대파한다. 석민은 대규모로 호족을 도살한 후, 국호를 위로 바꾸고 성씨를 이로 바꾼 것은 첫째, 갈호조의 석씨 종실 및 호갈육이와 철저히 결별하겠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이농과 생사를 함께 하는 정치동맹을 결성하며,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이농을 앞세워 이씨를 높히고, 화하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농을 대표로 하는 걸활군 및 중원의 한족백성에 완전히 의지한다. 이농의 이때 실력은 걸활군 수만을 이끌었고 명망이 석민보다 높았다. 석민의 동료부하는 그의 부친이 남긴 염씨 걸활군의 일부분 외에 많은 사람들이 갈호족이었다. 그가 갈호족을 죽이고 한족으로 되돌아가면서 육이 갈호족이 속속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석첨, 석민부자는 일찌기 갈호족을 위하여 한족을 살상해 왔다. 다시 중원한족의 지지를 받으려면 이농을 교량과 기치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농은 석민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대등한 지위의 핵심파트너가 된 것이다.


연금된 '위제(衛帝)' 석감은 여전히 몰래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한다. '이민', 이농은 깔끔하게 석감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석호의 37명 손자를 죽여서, 석씨를 멸족시킨다. 석감은 겨우 3개월여간 허수아비황제를 지내, 석준보다 단명했다. 갈호조의 황제 석호가 죽은 후 겨우 10개월만에, 석민은 그의 아들 5명(삼제: 석세, 석준, 석감. 이왕: 패왕 석충, 낙평왕 석포)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들도 죽인다. 이리하여 불가일세의 갈호조는 기실 이미 멸망해버린다.


여러 신하들이 속속 권한다. 그러나 노모심산의 '이민'은 먼저 '귀진칭번(歸晋稱藩)'하여 인심을 시험해본다. 다시 '양존호(讓尊號)'로 이농을 시험한다. 그리고 부친 염량(석첨)과 달리, '이민'은 멀리 도망쳐 있는 진나라황실과 무슨 군신의 정의가 없다. 여러번 자신의 손아래 패배한 동진에 대하여 심지어 경멸과 멸시만 있을 뿐이다. '이성병변'부터, 그의 탈위야심은 이미 자극되었고, 날로 팽찬된다. 이들 오랑캐들까지 모두 왕을 칭하고 황제를 칭하는데, '나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라는 칭제의 야심이 일단 나타나자,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절대로 동진의 번왕이 될 수 없었다. 만일 이때 누군가 나서서 정말 동진에 귀의하여 번왕을 칭하자고 주장했다면, 반드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은 모두 말한다: "성덕은 하늘이 호응하니, 마땅히 황제위에 등극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농에게 '존호를 양보'한 것에 대하여는 그저 쇼일 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농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민'이 비록 겉으로는 이농을 위주로 하고, 이씨를 높여주지만, 석준을 시해한 때로부터 전체 갈호조 정권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모두 석민이 우두머리였다. 자신은 보조자였다. 그리고 정변초기에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이다. 특히 도호령이후, 석민의 실력과 명망은 이미 자신을 훨신 넘어섰다. 만일 이농이 시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고청(以死固請)"한다. 극력 자신은 황제에 오를 수 없다고 밝히는 것이다. 이민은 더 이상 겸양하지 않고, 등극한다. 그리고 국호를 위(魏)라 한다. 이는 당시 북방에 나타난 두번째 한족정권이다. 첫번째 한족정권은 농우의 장씨 양공국, 전량(前凉)이다.


위나라황제 이민은 곧이어, 염씨로 성을 복귀한다. 그리고 이농을 태재(太宰)로 하고 영태위,녹부상서사로 하고, 제왕(齊王)에 봉하고, 아들 세 명을 모조리 현공(縣公)에 봉한다. 이농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고위직에 임명하는 동시에, 성을 염씨로 되돌린다. 이는 '민,농집권연맹'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농간의 평등한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권력투쟁은 염민과 이농의 사이에 벌어진다.


4. 창정대첩(蒼亭大捷), 염위는 최전성기를 맞다.


갈호육이(羯胡六夷)는 이미 근 50년간 중원을 칭패했다. 절대로 새로운 한족정권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갈호조의 신흥왕 석지(석호의 열한째 아들)은 조의 황제를 칭하며 갈호조의 고도인 양국(襄國)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의 형인 여음왕 석곤(석호의 여덟째 아들)과 갈호육이의 병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호응한다. 상국 석곤은 즉시 병력 10만으로 염위를 정벌하러 나선다.


대적이 몰려오는데, 이농에게 작위를 봉한지 1달도 되지 않았는데, 염민은 돌연 제왕 이농과 그의 세 아들, 그리고 몇몇 중신일당을 주살한다. 확실히, 염민, 이농이 날조한 '계조리"의 참문이 나온지 겨우 3,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미 염민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악몽이 된다. '내 침대 옆에서 다른 사람이 코를 골고 자고 있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농은 이제 이미 염민의 심복대환이 된다. 그리하여 혹은 이농이 궁중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인지, 혹은 염민이 죄를 뒤집어 씌워서 제거하려 하 ㄴ것인지는 모르지만, 염민과 이농의 정치동맹은 겨우 4개월여만에(석준을 죽이고 석감을 세운 때로부터), 염위를 건국한지 2달도 되지 않아서, 염민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가 일찌기 부친뻘로 모셨던 수석파트너 이농을 제거한 것이다. 이를 보면 그가 냉혹하고 무정함에 있어서 석호에 전혀 못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염위의 염민은 이때 여전히 동진에 대하여 환상이 있었다. 사신을 보내어 동진에 알린다. 동진이 "군대를 북상시켜 같이 오랑캐를 토벌하자"고. 동진의 조정에서는 염민의 요구를 무시했을 뿐아니라, 즉시 염위 치하의 합비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서 대답을 대신한다. 이농부자가 죽고, 수만의 걸활군은 염위정권에 반감을 갖고, 의심을 가진다. 그래서 지지도가 많이 내려간다. 아마도 염민은 이농을 죽이는 것이 동진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농은 비록 부친 염량과 마찬가지로 같이 걸활군의 한족장수였지만, 일찌감치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계속하여 석호를 따랐고, 기꺼이 갈호족의 손발이 되어, 석호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도왔으며 양손에 한족의 피를 가득 묻혔고, 그를 통해 삼공의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전해 칠월, 이농은 갈호조의 황제 석준의 명을 받아 남아하여, 동진의 섭정태후 저산자(褚蒜子)의 부친 저부(褚裒)이 3만 북벌군을 대패시키고, 저부는 이 일로 병이 재발하여 죽는다. 그리하여 동진에 귀부한 하북의 유민 20만은 거의 모두 죽게 된다. 그 죄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때, 황위를 빼앗은 염위에게 동진이 원조의 손길을 내밀어 같이 갈호를 토벌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동진의 조정에서 보기에, 염민은 그저 어려서부터 갈호화하여, 두 손에 한족의 피를 가득 묻힌 매국노이고 도살자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비바람에 흔들리는 대야심가이며 황위찬탈자이다. 불충불의하고, 살인을 좋아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고가과인이다. 무차별인종말살을 저지른 포악한 도살자일 뿐이다. 염민은 갈호조의 굴묘인이면서, 계승자이다. 흉노조의 유씨나 갈호족의 석씨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다. 염민은 더욱 고립된다. 각지의 갈호육이의 포위공격을 받을 뿐아니라, 같은 한족혈통인 동진으로부터 적대시 당한다.


그러나 염민은 아직 겁이 없었다.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두 달만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남은 갈호조의 잔여군대의 공격을 막아낸다. 창정의 전투에서 적 수만을 죽이고, 대승을 거둔다. 이때가 염민정권의 최전성기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비록 염민이 대부분 중원한족 선비 및 중원한족 백성의 추대를 받았지만, 여전히 소수의 머리가 맑은 한족선비들은 처음부터 이 '화하부흥을 외치는 대위황제, 도호전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진의 산기상시였던 신밀(辛謐)은 죽음 앞에서도 유서를 남겨 '동진에 귀순'하도록 권한다. 전 갈호조의 전중독, 한족선비인 가견(賈堅)은 "이미 다른 사람을 섬겼는데, 어찌 절개를 버릴 수 있겠는가"라며 갈호조가 망하자, 염위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가견은 심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진나라는 스스로 중화를 버렸고, 백성들에게 주인이 없었다. 강한 자가 차지했다." 당연히 진나라황실에 대하여는 더 이상 충성의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반영한다. 갈호인이 중원을 차지한 50년만에 북방의 한족은 인구가 대량 줄어들었을 뿐아니라, 그중 상당한 일부분의 한족들의 생각과 민족감정은 이미 괴리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창정대첩후, 염민은 다시 투항해온 갈호인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대선우(大單于)'라는 봉호를 쓴다. 이는 염위정권의 전환점이다. '도호령'을 하달한지 9개월후에, 염민은 호갈육이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무차별적인 인종말살에서 다시 받아들여서 기용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와 4개월간 같이 하던 이농을 죽이면서 일부 중원한족과 걸활군이 염위정권에 대하여 거리감을 느기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같이 호족을 토벌하자고 요청했으나 냉대받고, 동진은 오히려 합비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으로 보답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염민은 다시 '화하도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긴 듯하다. 반대로 다시 호갈육이를 기용하여 쓸 생각을 한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민족정책은 호갈육이의 염위에 대한 멸족의 원한을 없애지 못했을 뿐아니라, 화하 한족 특히 걸활군의 남은 병사들로 하여금 염위정권에 대한 거리감을 더욱 더 느끼게 만들었다. 광록대부 위소(韋謏)는 '항복한 갈호족을 죽여버리고, 선우의 칭호를 버릴 것'을 주장했다가 살해당한다. 그의 아들까지 연좌되어 죽는다. 염민의 이런 '자신의 뜻을 어기면 바로 죽이는' 성격은 포악했던 석호 부자와 마찬가지였다.


5. 양국참패, 염위는 급격히 쇠락한다.


창정대첩후 3개월만에 전성기를 누리던 염민은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남은 갈호조의 본거지 양국을 포위공격한다. 3개월간 포위전끝에, 갈호조의 황제 석지는 긴급하게 강족 요씨와 선비 연국에 구원을 청한다. 그리고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조왕으로 칭한다. 그후 세 곳이 연합하여 내외에서 합공한다. 염위군은 대패한다. 염민과 십만기병은 도망쳐 업도로 돌아온다. 과연 위소의 말대로, 그의 아들 대선우 염윤(冉胤)은 휘하의 투항한 갈호족에게 끌려가서 갈호조에 항복한다. 석지는 염윤을 죽여버린다. 양국의 참패는 염위가 패망으로 향하는 전환점이다. 염위를 끝장낸 선비 연국은 이때부터 강력하게 '축록중원'의 쟁탈전에 가담한다. 승세를 틈타 요동을 나와 염위의 유주를 점거한다. 이 전투에서 염위는 원기를 크게 상하고 거의 전멸하게 된다.


그러나, 염민은 그래도 '도호전신'이다. 승기를 틈타 업을 공격하는 갈호조의 장수 유현(劉顯)이 이끄는 7만 갈호대군을 맞이하여 염민은 전혀 두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모조리 격파한다. 그리고 3만의 수급을 거둔다. 그리하여 유현은 두려움에 투항하여, 석지를 죽여서 충성을 표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후 한달여만에, 유현은 양국에서 조왕 석지를 죽이고 염위에 투항한다. 이렇게 갈호조는 망하게 된다.


염민이 석준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한 때로부터, 갈호족과 계속하여 싸워왔다. 무궁무진한 전투와 살육으로 이미 두 조(흉노조인 전조와 갈호조인 후조)가 근 50년간 긁어모은 재화는 모조리 다 써버린다. 게다가 농사와 장사가 모두 피폐하여, 중원은 대란에 빠지고, 기근과 질병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 먹고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다." 염민의 '도호' 수십만명후, '저, 강, 호만의 수백만 인구는 조나라의 법으로 본토로 돌려보낸다. 도로에서 만나면 서로 죽였다. 그중 고향에 도착한 사람은 열에 두,셋이다." 이렇게 하여 간접적으로 수백만의 갈호육이를 죽인다. 이 대혼란 과정에서 한족은 다시 큰 손실을 입는다. 갈호조가 이주시킨 십수만의 청주, 옹주, 유주, 형주 4주의 인민(대부분은 한족)을 각각 본토로 돌려보낼 때, 연도에서 역시 갈호족의 살륙을 당한다.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었다. 염위가 나라를 세운지 1년여가 지났는데, 이미 국력이 쇠퇴하고 백성은 궁지에 몰리고, 재물은 바닥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비록 심복대환인 갈호조는 완전히 멸망시켰지만, 염위는 사방에서 적이 몰려왔다. 국력을 쇠퇴하고, 궁지에 몰린 상황은 바꿀 수가 없었다. 기실 이미 붕괴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갈호조를 멸망시킨후 겨우 3개월만에, 반란붐이 일어난다. 새로 투항해온 염위 상대장군, 대선우, 기주목인 호인 유현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업을 공격하고, 패배한 후에는 양국으로 물러나서 '조제(趙帝)'를 칭한다. 그후 염위의 남부 서주, 연주, 형주, 예주, 낙주의 7명 자사이상의 고위관료(모두 한족)가 모두 자기 영토를 가지고 동진에 투항한다. 여기에는 염민의 초기 심복이자 그의 명을 받아 석준을 죽인 서주자사 주성(周成)도 포함되어 있다. 염위의 조군,중산군수(모두 한족)은 선비 연국에 투항한다. 염위의 실제지배지역은 업도 주변지구로 줄어들었다. 이미 내외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염민의 투지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유현이 반란을 일으킨 반년여만에 염민은 팔천의 기병을 이끌고 양국을 공격하여 유현을 죽이고, 다시 조를 멸망시킨다. 염민의 실제지배지역이 다시 북으로 확장되어 양국 및 상산, 중산의 여러 군에 이른다. 그리하여, 염위는 불가피하게 남하해오는 선비족 연국과 격렬하게 부딛치게 된다. 최종 생사대결이 다가오고 있다. 이때 염위는 이미 일상적인 먹거리도 구하기 힘들어진 지경에 이르렀다. 염민은 근 만명의 병졸을 이끌고 상산, 중산의 주변에서 먹을 것을 구해와야 했다. 이미 옛날의 갈호 유씨 ,석씨와 같은 류의 유구(流寇)로 전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