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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준6

1900년: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망치다. 글: 만두설(饅頭說)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 6월에 "선전포고"를 하여, 조정을 뒤흔들었다. 7월, 천진이 함락되고, 8월 북경이 포위된다. 팔국연합군은 성밖에서 보무당당했다. 8만의 청군은 성안에서 싸울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당초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던 그 여인(서태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친다. 1 1900년 8월 14일 정오, 최옥귀(崔玉貴)는 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최옥귀는 궁내의 태감중 2인자였다. 원래 그는 밖에서 서태후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을 가시며 아편을 피우는 시간에 들어가서 "선패자(膳牌子)"를 청하는 일을 했다('선패자'는 태후 혹은 황제가 식사할 때, 접견을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패를 바쳐서 선택하도록.. 2022. 8. 16.
누가 서태후로 하여금 서방열강에 선전포고하게 하였는가? 글: 후유(煦濡)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각국에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내린다. 서태후는 서방열강의 여러가지 죄행을 나열했다. "삼십년동안, 우리나라가 인자하고 후덕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빌미로 그들은 갈수록 발호하며 우리나라를 핍박하며, 우리의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이라고 하면서 예의없이 횡행하고 병력과 무기의 날카로움을 믿고 이렇게까지 했다." 서태후는 이렇게 분노를 표시한 후,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선전구호를 내놓는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기보다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아야 한다!" 이 선전포고를 전환점으로 하여, 청정부는 정식으로 서방열강과 갈라지고, 중국과 서방열강의 전.. 2021. 6. 22.
"팔국연합군": 중국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 글: 유기곤(劉淇昆) 팔국연합군의 전투는 중국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중국근대사이다. 팔국연합군이 왜 북경으로 진군했는가? 두 마디로 개괄할 수 있다: (1) 청나라조정이 서방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이 전쟁은 청나라조정이 일으킨 것이고, 서방각국은 응전했을 뿐이다), 외국연합군은 대고구(大沽口)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진격했다. 이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닌가. (2) 서방각국은 중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북경에 진군해서,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하는 외에, 주로 경성에 갇혀 있던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구했다. 글쓰는데 편의를 위해 먼저 이 전쟁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로 하자. "팔국연합군"은 전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팔국연합군침화전쟁"은 흑백이 전도된 말이고, 역사를 강간하는 것이니.. 2021. 1. 9.
서태후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의 후계다툼 글: 사우춘(史遇春) 동한때 반고의 <한서> 권87상 <양웅전(揚雄傳)> 제57상에는 양웅의 <반이소(反離騷)>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반이소>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정경미여추국혜(精瓊靡與秋菊兮), 장이연부천년(將以延夫天年); 임멱라이자운혜(臨汨羅而自隕兮), 공일.. 2018. 11. 16.
부준(溥儁): 청말 대아거(大阿哥)로 황위계승자가 되었던 인물 글: 상한(桑寒) 청나라말기, 서태후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구차하게 정권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였다. 가경제이후, 청왕조는 황태자를 둔 적이 없다. 황태자를 두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직접적으로 국가의 장래 주인을 결정하는 일이다. 서태후는 '무술변법'이후 광서제를 멸시한다. 자.. 2013. 8. 15.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부의(宣統帝)는 청나라 12명의 황제중 마지막 황제일 뿐아니라, 중국역사상 최후의 황제이다. 1989년 광서제의 무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서태후는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정권을 장악한 서태후로서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공을 들여 키워왔던 광서제가 자신의 뜻에 거슬려 무술정변을 획.. 2005.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