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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5. 8. 22.

부의(宣統帝)는 청나라 12명의 황제중 마지막 황제일 뿐아니라, 중국역사상 최후의 황제이다.

 

1989년 광서제의 무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서태후는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정권을 장악한 서태후로서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공을 들여 키워왔던 광서제가 자신의 뜻에 거슬려 무술정변을 획책하자 매우 상심하여,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서태후로서는 첫째, 누구를 새로운 황제로 세울 것인지의 문제와 둘째, 광서제를 폐위시킨 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등 두 가지였다.

 

1899년 11월 28일, <<숭릉전신록>>에 따르면 자희(서태후)는 이날 조회가 끝난 후 단독으로 영록(榮祿)를 접견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다.

 

롱루 : 듣기로 앞으로 폐위시킬 거라는데, 사실이신지요.

자희 : 그렇지 않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롱루 : 태후께서 하시면, 누가 감히 안된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황상(광서제)의 죄상이 명백하지 않으니, 외국공사들이 들고 일어나 간섭할 수 있으니, 이것은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자희 : 일이 누설되면 어떻게 될까

롱루 : 괜찮을 겁니다. 황상의 나이가 이미 어느 정도 되었으나, 아직 황자가 없으니, 가까운 종친에서 사람을 뽑아 대아거(大阿哥, 아거는 황제의 아들을 부르는 만주어임)로 삼아 동치와 광서의 후사를 잇게 하고, 궁중에서 기르면서, 천천히 대통을 잇게 한다면, 명분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자희 : 네 말이 옳다.

 

서태후와 영록은 먼저 대아거를 둔 후에 대아거로 하여금 동치제와 광서제의 계승인이 되어 점차 광서황제를 대체하기로 하였다. 누구를 대아거로 삼을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던 서태후는 재의(載漪)의 아들인 부준(溥儁)을 선택했다.

 

부준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일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부준의 부친 재의이고, 재의의 부친은 혁종이다. 혁종은 도광제의 다섯째 아들이면서, 가경제의 셋째아들인 돈친왕 면개가 후사가 없자, 혁종은 돈친왕의 양자로 들어가 돈친왕의 작위를 잇게 된다. 재의는 다시 가경제의 넷째 아들인 서친왕 면석의 아들인 서군왕 혁기(원명 혁약)이 자식이 없자 그를 이어 패륵의 지위를 얻고, 후에 단군왕(端郡王)이 된다. 둘째, 부준의 모친은 서태후의 남동생인 꾸이샹(桂祥)의 딸, 즉 서태후의 조카였다. 부준의 이 때 나이가 15세였다.

 

1899년 12월 24일, 자희는 태후의 의지(懿旨)를 통해 부준으로 하여금 동치제의 양자로 들이면서 "대아거"라는 칭호를 내린다. 이 후 대아거는 홍덕전에서 글을 읽고, 사부는 동치제의 장인인 승은공 충치(崇綺)와 대학사 서동(徐桐)을 임명한다.

 

1900년 1월 1일부터 서태후는 부준으로 하여금 광서제를 대신하여 봉선전에 예를 행하도록 한다. 자희는 원래 1900년부터 광서제를 이어 년호를 "보경(保慶)"으로 바꾸고, 대아거 부준을 보경제로 등극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에 대하여 반대의견이 만만찮고, 롱루와 장친왕 혁광까지 외국공사들이 이의를 가지고 있고, 각 세력들이 반대한다는 점을 들어 보경제를 옹립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건의한다. 조금 지나서 의화단의 난(권비의 난)이 발생하는데, 총리각국사무대신이 된 부준의 부친 재의는 의화단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태후는 광서제와 부준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자희는 12월에 재의가 의화단의 난의 괴수라는 점을 들어 작위를 박탈하고 신강에 유배시킨다.

 

1901년 북경으로 돌아온 자희는 재의가 의화단의 난에 동조하여 조상에 죄를 지었으므로, 그 아들인 부준의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고, 대아거라는 명호를 폐지한다. 부준은 다시 원래의 적으로 복귀하여 재의의 아들이 된다. 후에 부준은 매우 힘든 생활을 보내고, 비참하게 죽는다. 부준은 대아거가 된 후 광서제에 대하여 매우 무례하게 대하는등 인품이나 능력등의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지는 못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20일, 광서황제의 임종 하루전에 자희는 의지를 내려 부의로 하여금 황위를 잇도록 한다. 그리고 부의의 부친인 재풍(載灃)을 섭정왕에 봉한다. 자희가 왜 부의를 선택했을까? 여기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부의의 조부인 혁현(奕譞)은 바로 자희의 친여동생의 남편이다. 즉, 부의의 조모가 자희의 친여동생인 것이다. 혁현은 모두 4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7명의 아들을 둔다. 적푸진인 예허나라씨(자희의 여동생)과의 사이에 광서제를 비롯한 4명의 아들을 두는데, 나머지 3명은 모두 요절한다. 첫재 측푸진은 얜쟈씨인데, 자식이 없고, 둘째 측푸진은 류쟈씨(劉佳氏)인데, 세 아들을 낳는다. 다섯째 아들 재풍, 여섯째 아들 재순, 일곱째 아들 재도가 그들이다. 셋째 측푸진인 리쟈씨도 자손이 없다. 류쟈씨의 세 아들 중 재풍과 재순은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가서 대를 잇고, 혁현의 왕위는 재풍이 이어받는다. 둘째는 부의의 모친이 자희의 양녀라는 점이다. 모친은 수완과르자씨(蘇完瓜爾佳氏)인데, 영록의 딸로서 자희가 매우 아껴 양녀로 삼아 궁내에서 기른다. 자희는 재풍을 매우 아껴, 영록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영록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만주정백기 출신이고, 청나라 개국 5대신의 하나인 페이잉동(費英東)의 후손이다. 동치제때 롱루는 자희의 총애를 받아 총관내무부대신이 된다. 1875년 보군통령, 공부상서에 오르고, 1894년에는 병부상서 협판대학사가 되며, 1898년에는 직예총독, 군기대신에 오른다. 무술정변때 원세개가 광서제를 배신한 후 롱루를 통해 자희와 연락하며, 보군통령으로서 소위 무술정변의 주역중 강유위와 양계초를 체포하고, 담사동등을 참한다. 후에 태자태보, 문화전대학사(즉 수석대학사)에 오른다.

 

재풍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재풍은 두 명의 부인과 네 명의 아들을 둔다. 적푸진은 쑤완과르자씨로 이름은 유란(乳蘭)이며, 위에서 샆펴본 바와 같이 군기대신 영록의 딸이며, 자희태후의 양녀이다. 1902년에 재풍과 결혼하며, 장자 부의(1906년생), 둘째아들 부걸(溥傑, 1907년생)을 둔다. 측푸진 등쟈씨(鄧佳氏)로 1913년에 결혼하며, 두 아들을 낳는다. 셋째 아들 부기(溥倛)로 어릴 때 요절한다. 넷째아들은 부임(溥任, 후에 개명하여 金友之라 한다, 1918년생)이다.

 

여기에서 본 바와 같이 동치제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자희의 뜻에 따라 옹립되는데, 광서제는 자희의 친여동생의 아들이었고, 보경제에 오를 뻔했던 부준은 친조카의 아들이었고, 선통제(부의)는 친여동생의 손자이자, 양녀의 아들이었다. 이것으로 자희가 아이신줴뤄의 후손들 중에서 자신과 혈족인 예허나라씨나 그에 관계있는 사람으로 후계를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친왕집안은 양대에 걸쳐, 두 명의 황제(광서제, 선통제)를 배출하였지만, 순친왕은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였다. 부걸(부의의 동생)이 지은 <<순친왕부의 생활을 회고하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희와 광서의 여러 해에 걸친 반목 가운데에서, 두 파는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다툼을 복잡하고 첨예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한편으로는 자희쪽에 선 영록등의 사람들과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교유하여 결국 인척관계를 맺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서측의 옹동서등의 사람들과 글로써 교유하여 상당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이 나의 조부가 일생동안 영예를 누리고 그다지 좌절을 겪지 않은 주요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