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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년6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2020. 8. 16.
진인각(陳寅珏)의 학문(學問)과 풍골(風骨) 글: 원빈(袁斌) 얼마전에 지나간 10월 7일은 진인각이 세상을 떠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진인각이 누구인가?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현당대학술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그는 역사학자, 고전문학연구가, 언어학자, 시.. 2019. 11. 13.
손월기(孫越崎): 5.4운동에서 삼협공정반대운동까지.... 글: 왕유락(王維洛) 역사는 만화경이다. 원래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같은 사건,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6.4운동의 폭력진압과 삼협공정의 추진, 5.4운동때 천진의 학생지도자와 북경대학의 교장 채원배, 북양대학에서 제적된 학생과 민국시대의 가장.. 2019. 5. 16.
북경대학은 "세 마리 토끼"때문에 유명해졌다. 글: 유계흥(劉繼興) 호적(胡適)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북대는 세 마리 토끼때문에 유명해졌다" 이 "세마리 토끼"는 각각 채원배(蔡元培), 진독수(陳獨秀), 호적이다. 세 사람은 모두 토끼띠이다. 채원배는 동치 정묘년(1867년)생이고, 진독수는 광서 기묘년(1879년)생이며, 호적은 .. 2013. 11. 27.
두가지 유행: 어광(語狂)과 어장(語障) 글: 유재복(劉再復) <아주주간> 2001년 12월 16일자 10년전, 필자는 <어광(語狂)>이라는 글을 써서 <명보월간>에 발표했다. 비판한 것은 문화대혁명 기간중의 "일만번 발로 밟아서 영원히 다시 되살아나지 못하게 하자"는 등의 큰소리(大話), 미친소리(狂話)들이었다. 작년 가오싱.. 2013.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