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진인각(陳寅珏)의 학문(學問)과 풍골(風骨)

중은우시 2019. 11. 13. 20:23

글: 원빈(袁斌)


얼마전에 지나간 10월 7일은 진인각이 세상을 떠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진인각이 누구인가?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현당대학술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그는 역사학자, 고전문학연구가, 언어학자, 시인을 한 몸에 겸비하고 있으며, 양계초, 왕국유, 조원임과 함께 청화대학 사대도사(四大導師)로 불리웠다. 그는 명실상부한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국학대사(國學大師)라 할 수 있다.


진인각의 학문은 얼마나 대단한가?


저명한 역사학자인 부사년(傅斯年)은 이렇게 말했다: "진선생의 학문은 근 삼백년동안 일인자이다."


중국의 근대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사학가, 문학가인 양계초는 이렇게 말한다: "나 양모는 쓴 책만 내 키 정도가 된다. 그러나 저작을 다 합쳐보아야 진선생의 수백자의 글자만큼의 가치도 없다."


국학대사 오복(吳宓)은 이런 말을 했다: "중서(中西), 신구(新舊)의 각종 학문을 통합해서 논의하는 점에서 나는 반드시 인각(진인각)을 전중국에서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꼽아야 한다. 인각은 비록 나의 친구이지만 실제로는 나의 스승이다."


항간에서는 이런 말까지 있다. 진인각은 교수중의 교수이다.


그러나, 진인각선생을 논하면서, 필자는 대륙학자인 오홍삼(吳洪森)이 그의 <평생소학유여골(平生所學唯余骨)>이라는 글에서 쓴 관점에 찬동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인각이 유명해진 후,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학문의 연박(淵博)과 천재적인 기억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보통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진인각의 몸에서 볼 수 있는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배워야할 것은 못보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풍골'이다.


그렇다면 진인각 선생의 풍골은 어떠한가? 바로 그는 그가 쓴 왕국유기념비명에 가장 먼제 제기한 "독립적인 정신, 자유로운 사상(獨立之精神, 自由之思想)"의 학술정신과 가치지향이다.


진선생은 그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실천했다.


민국30년(1941),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한다. 당시 홍콩대학 객좌교수 겸 중문과주임을 맡고 있던 진인각은 즉시 사직하고 한거(閑居)한다. 일본당국은 일본돈 40만엔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동방문학원(東方文學院)을 창립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결연하게 거절한다.


민국31년(1942), 누군가 일본측의 명을 받아, 그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하이에서 강의를 하도독 청한다. 그는 다시 한번 결연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바로 홍콩을 떠나 광주만을 지나 계림으로 간다. 그리고 그는 전후로 광서대학, 중산대학, 연경대학에서 강의하다가 2차대전종결을 맞이한다.


더욱 귀한 점이라면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1950년대초, 북경당국은 진인각 선생을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초빙하고자 한다. 진인각 선생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학술의 문제에서 주요한 것은 '독립적인 학문, 자유로운 사상'이며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갈 수는 있지만, 다만, 첫째, "중고사연구소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지 않아도 되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허용해달라. 둘째, '모공(모택동)과 유공(유소기)이 윤허증명서를 만들어 주어 방패막이로 쓸 수 있게 해달라." 그 결과 유소기, 모택동은 당연히 그의 이런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지식인들이 모두 전전긍긍하던 그 시대에, 진인각은 대담하게 이렇게 '범상(犯上)'하는 곧은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그의 '독립적인 정신, 자유로운 사상'은 전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홍삼의 기억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평생소학유여골>의 글을 가지고 가서 그의 스승이자 당대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왕원화(王元化) 선생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왕선생은 그의 견해에 크게 찬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학문은 서학(西學)이건 중학(中學)이건, 마지막에는 결국 풍골로 귀결된다."


필자의 기억에 왕원화 선생은 그의 <인문정신과 21세기의 대화>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식과 문화에 대한 신념, 진리와 도의에 대한 담당, 사람의 자유운명에 대한 관심은 영원히 인문지식인의 존엄이 소재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문의 의미는 없다." 왕선생의 이 말은 진인각 선생의 '독립적인 정신, 자유로운 사상'을 한걸음 더 나아가 천명한 것으로 본다. 그 정신과 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파한 것이다.


당금의 대륙 학술계를 돌아보면, 중국공산당의 고압적인 통치하에서, 지식인들이 보편적으로 견유화(犬儒化)하고, 사문소지(斯文掃地)하며, 풍골무존(風骨無存)하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지식, 학문을 신분상승의 자본으로 삼아서 추태가 만발한다. 인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진인각과 왕원화 선생이 만일 지하에서 이를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