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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손월기(孫越崎): 5.4운동에서 삼협공정반대운동까지....

by 중은우시 2019. 5. 16.

글: 왕유락(王維洛)


역사는 만화경이다. 원래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같은 사건,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6.4운동의 폭력진압과 삼협공정의 추진, 5.4운동때 천진의 학생지도자와 북경대학의 교장 채원배, 북양대학에서 제적된 학생과 민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업가, 국민정부의 인수인계고관과 북경대학에 일본의 수중에서 대량의 부동산을 얻게 해준것, 화병당(花甁黨)의 지도자와 삼협공정반대파의 영수인물, 중공중앙에 7만언서를 제출한 것과 삼협공정의 추진, 5.4운동의 민주와 과학정신을 계승하는 것과 삼협공정의 민주, 과학의사결정...


이런 일들을 기록하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함이다. 특히, 5.4운동 70주년의 기념하는 날에.


1. 5.4운동의 학생지도자와 북양대학


손월기는 삼협공정반대파의 영수인물중 하나이다. 그는 중국역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다.


<위키백과>의 "오사운동"에 관한 내용을 보면, 손월기는 오사운동때 천진의 학생지도자중 한 명이다.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인 주은래, 장태뢰등도 이 명단에 이름이 나온다.


손월기는 1893년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수재(秀才)로, 먼저 관리를 지낸 후, 실업에 종사하여 흑룡강성에서 광산을 경영했다. 손월기는 일생동안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16년, 손월기는 북양대학에 입학하여 채광과 야금을 전공한다. 그후 북양대학 학생회장이 된다. 북양대학은 중국 최초의 현대화된 대학으로, 1895년 10월에 설립되었고, 양무운동때 가장 유명한 관상인 성선회(盛宣懷)가 창의하여 광서제의 어필로 비준을 받은 학교이다. 실업을 중시하는 성선회가 창의하였으므로, 북양대학의 강점은 공과대학이다. 북경대학의 설립시기는 1898년으로 북양대학보다 3년이 늦다. 현재 천진대학은 북양대학을 전신이라고 말하는데, 현재의 중국광업대학도 마찬가지로 북양대학에서 발전한 것이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중국에 독일이 산동의 조계와 교제철로의 주권을 반환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므로,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을 위시한 13개의 대학학생들이 캠퍼스를 나와 천안문광장에 집결하고 기세가 크고, 인원수도 많은 항의집회를 연다. 집회에서는 나가륜(羅家倫)이 ㅆ느 <북경학계전체선언>을 낭독하여, 전국의 동포가 일어나기를 호소하고, 국민대회를 소집개최하여, 대외적으로 주권을 다투고, 대내적으로 매국노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이어서 학생시위대는 총지휘 부사년(傅斯年)의 지휘하에 표어를 휘날리며, 동교민항의 외국인대사관지역으로 출발한다. 나가륜등 학생대표는 외국대사관에 영문의 비망록을 제출하는데, 당시 미국대사관의 인원만이 학생들의 비망록을 접수한다. 그 후에 학생시위대는 동교민항의 북단 조가루에 있는 교통총장 조여림(曹汝霖)이 저택에 도착하여, 이곳을 들어가려던 장종상(章宗祥)을 두들겨 패고, 조여림의 저택은 원인모를 불이 붙는다. 경찰은 이을 이유로 진압하고, 학생 32명을 체포한다.


학생들의 항의활동은 전국동포의 광검위한 지지를 받는다. 경찰이 학생을 체포했다는 소식은 국민들의 강렬한 주목을 받게 되고, 채원배등 13개대학의 총장들이 들고 일어나 체로된 학생들을 구해준다. 전국의 공상계에서도 파업을 통해 북경의 학생운동을 지원하며,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오사운동의 소식이 천진에 전해지자, 천진의 대학, 고등학교 대표 9인이 비밀리에 회합을 한다. 북경학생을 성원할 방법을 논의하는데, 회의에서 손월기가 가장 먼저 발언하여, 북양대학 학생회를 대표하여 의견을 제기한다. 북경학생들의 애국활동을 굳게 지지하며 북양대학학생들도 수업거부를 할 것이며, 거리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한다. 9인의 대표들은 행동을 일치하기로 동의한다. 6월 4일, 천진시의 전체 학생들이 수업거부하고, 시위를 거행한다. 플랭카드를 들고, 표어를 휘두르며, 소리높여 구호를 외친다. 손월기는 가장 앞에서 행진한다. 시위대가 성장의 아문(衙門)에 도착했고, 성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청원서를 제출한다. 직예성의 성장 조예(曹銳)는 4명의 대표를 접견한다. 손월기등은 조예에게 북양정부에 전보를 보내어, 체포된 북양학생을 석방하고, 매국조약의 체결을 거절하고, 매국관리를 엄벌해달라고 요구할 것을 요구한다. 협상은 순조롭지 못했지만, 손월기등은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행동한다. 이치를 내세워 결국 성장 조예가 학생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게 한다. 오사운동에서 천진학생의 평화적 청원과 시위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손월기는 주은래와 이번 천진학생운동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학생과 시민의 지지하에, 북양정부는 어쩔 수 없이 6월 10일 체포된 32명의 학생을 석방한다. 총장들이 데리고 학교로 간다. 그리고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등 3명의 장관급 관리는 면직당하고, 중국대표는 파리평화회의에 서명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북양대학은 사후에 손을 보았다. 손월기등 수업거부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요구한다. 손월기등 학생들은 반성문을 거부하고, 북양대학은 이들을 제적한다. 이때 북경대학 총장 채원배 선생은 손월기에게 원조의 손길을 내민다. 채원배는 집에서 손월기를 만나, 제적된 학생들의 상황을 알아본다. 채원배는 사직하고 남하하기 전에, 이 일을 대리교장인 장몽린(蔣夢麟)에게 당부하고, 손월기에게 장몽린과 연락하게 한다. 장몽린 대리교장은 북양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에게 이해와 동정을 표시한다. 장몽린 대리교장은 북양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이 모두 북경대학으로 와서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해준다. "북양에서 몇 명이 오더라도, 북대는 다 받아주겠다." 당시, 북경대학과 북양대학의 학과조정은 이미 끝이 나서, 북경대학에는 공과대학이 폐지되며, 모조리 북양대학으로 옮겨갔다. 북양대학의 법학원은 이미 북경대학으로 병합되었다. 북양대학의 이들 제적된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북경대학은 다시 공과대학의 채광야금, 토목의 두 학과를 회복시키고, 다시 교수를 채용한다. 채원배, 장몽린 교장등의 도움으로, 손월기등은 북경대학 채광야금학과로 편입하여 계속 공부하고 1921년에 졸업하여, 공과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항전승리후, 손월기는 국민정부의 인수인계고관이 되어, 동북지역과 화북지역의 일본재산의 인수와 처리를 담당한다. 당시 북경대학의 채원배 교장, 장몽린 대리교장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북양대학 제적생인 손월기는 북경대학에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게다가 당시 북경대학 대리교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오사운동때의 학생지도자 부사년이었다. 그는 손월기가 존경하는 같은 전호(戰壕)의 전우였다. 북경대학은 인수인계고관인 손월기로부터 대량의 북대 주위의 일본부동산과 무주부동산을 취득한다. 예를 들어, 상공부(相公府), 동창후통여원홍고거(黎元洪故居), 구국회빌딩, 후문, 사탄, 마신묘, 남북지자, 황성근, 남협도, 남하연 및 서사와 서단 사이의 일본부동산등등. 이들 부동산은 지금의 가치로 따지자면 몇조위안이 될 것이다. 북경대학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채원배, 장몽린 교장이 이해와 동정으로 한 학생을 구해준 것이 지금은 이렇게 큰 보답으로 돌아올 줄은.


그러나, 북양대학의 후신인 천진대학이건 중국광업대학이건 인수인계고관인 손월기로부터 거의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다. 북양대학은 중국 최초의 현대화 대학인데, 지금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모두 북경대학이 중국최초의 현대화대학이라고 알고 있다. 현재 천진대학이 중국대학중 랭킹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북양대학이 오사운동의 수업거부와 시위에 참여하고, 반성문을 쓰지 않으려 했던 학생들을 제적한 그날부터 내리막길을 걸은 거일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내리막길을 걸었다. 대학은 청년이 공부하고 성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대학, 대학의 교장, 교수가 학생을 이해하고 관용하고 보호하는 것은 학생이 격정에서 성숙하는 필수조건이다. 학생의 격정이 없으면, 사회는 추진력이 없어진다. 대학, 교장, 교수의 이해와 보호가 없다면 학생은 요절한다. 사회의 동량이 될 수가 없다. 지금 천진대학이 저명한 동창생을 언급할 때마다. "양탄일성(兩彈一星)"의 오자량(吳自良), 야금의 태두 위수곤(魏壽昆), 수리전문가 장함영(張含英), '제염대왕' 후덕방(侯德榜)등등은 얘기하지만, 감히 제적된 손월기는 언급하지 못한다. 중국광업대학의 운명은 더욱 비참하다. 100여년의 역사에 14번이나 이사를 하고, 12번이나 교명을 바꾸어, 최종적으로 강소성 연운항에 자리잡았다.


2. 민국시기 저명한 기업가.


만일 손월기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게 해준 채원배 교장이 손월기 일생의 첫번째 중요한 귀인이라면, 손월기 일생의 두번째 중요한 귀인은 바로 옹문호(翁文灝) 교수이다.


1923년 가을 손월기는 동북으로 간다. 그는 당시 중국의 최대광산 무순광산과 본계광산 그리고 중국최대의 제련공장인 안산제철소등을 고찰한다. 1924년초 중국과 러시아가 합작설립한 목릉석탄회사에서 손월기는 중국측 광무팀장 겸 기계, 공정팀장을 맡는다. 당시 러시아측 엔지니어와 어리사측 노동자들이 1호수직갱(直井)의 건설을 책임지고, 손월기가 이끄는 중국측 노동자들은 2호 수직갱의 건설을 책임진다. 그런데 러시아에 전혀 손색이 없게 일을 해낸다. 1927년 손월기는 목릉석탄을 시찰하러 온 북경지질조사소 소장인 옹문호 교수를 만나게 된다. 옹문호는 1912년 벨기에 루벤대학에서 지질학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후에는 북경대학, 청화대학에서 교수를 지낸다. 그는 청화대학 대리교장을 역임한 중국현대지질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옹문호는 손월기가 목릉석탄광산 2호 수직갱에서의 업무를 크게 칭찬하며, 옹문호의 소개로 손월기는 중국지질학회와 중국채광야금공정학회에 가입한다. 손월기는 <길림목릉석탄광산기실>이라는 책을 쓰고, 옹문호 교수가 서문을 써준다.


1929년 가을 손월기는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채광학과로 가서 공부하고, 미국 서부의 금광과 석유광산을 고찰한다. 1931년 가을 손월기는 컬럼비아대학의 대학원으로 옮겨가서 공부하고, 그 동안 미국동부의 석탄광산을 고찰한다. 1932년 봄, 손월기는 40여일의 기간동안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의 채광야금업을 고찰한다. 1932년 7월 손월기는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 귀국한다.


1932년 7월 새로 설립된 국민정부 국방설계위원회 비서장 옹문호의 초청을 받아, 손월기는 남경으로 가서 전원(專員) 겸 광산실주임이 된다. 그는 옹문호 휘하의 간장이 되었다. 1935년 국방설계위원회와 병공서자원사는 합병되어 국민정부자원위원회가 된다.


손월기는 옹문호의 아래에서 몇 가지 일을 잘 처리한다.


첫번째 일은 바로 중국 최초의 석유탐사대를 조직한 것이다. 그리고 섬서북부에서 석유를 발견한다. 1933년 9월 국방설계위원회에서 파견하여, 손월기는 섬서로 가서 석유자원을 탐사한다. 그리고 이곳에 석유자원이 매장되어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1934년 봄, 섬북 유광감탐처(油礦勘深處)를 만들어 국방설계위원회에 소속된다. 손월기가 처장이 된다. 손월기는 중국최초의 석유탐사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친히 팀을 이끌고 연장현에서 석유를 시추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석유를 제련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 석유와 정유가 없던 역사를 끝내게 된다.


두번째 일은 하남 초작 중복석탄광산을 정돈하여 결손을 수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1934년 가을 중국과 영국이 공동경영하는 하남 초작의 중복석탄광산은 경영부진으로 파산에 직면했다. 그 일이 장개석에게까지 보고되고, 장개석은 옹문호에게 중목광산의 정돈책임을 맡긴다. 옹문호는 손월기로 하여금 중북회사의 총공정사(Chief Engineer)를 맡게 하여 구체적인 정리정돈업무를 맡긴다. 손월기는 목릉석탄광산의 실무경험을 바탕아로 그리고 구미의 광산의 경영경험을 참고하여, 금방 중복석탄광산을 손실에서 이익으로 전환시킨다. 1936년 손월기는 정식으로 중복석탄회사의 총경리(사장)에 오른다.


세번째 일은 중복석탄광산설비의 대철수와 사천후방기지의 에너지공급이다. 1937년 77사변이후 손월기는 과감하게 중복석탄광산의 모든 설비를 사천으로 이전시키기로 결정한다. 처음에, 중복회사의 이사들과 영국측 대표는 많이 우려했다. 왜냐하면, 설비의 철거와 운송업무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손월기가 이사회와 영국측 대표를 설득했고, 민생윤선회사의 노작부(盧作孚) 선생의 도움을 받아, 중복석탄광산의 설비를 안전하게 항전의 후방으로 운송하여, 동방의 던케르크대철수를 완성한다. 이는 중국이 항전기간동안 유일하게 설비를 일본침략자에게 빼앗기지 않은 대형광산이 된다. 이들 석탄광산설비를 이용하여, 국민정부자원위원회와 사천의 각계는 사천에 천부(天府)등 4개의 석탄광산을 만들어 항전기간 후방 사천 및 배도(陪都) 중경의 에너지공급을 책임졌다. 손월기는 친히 4개 석탄광산의 총경리를 맡는다.


네번째 일은 중국최초의 석유공업기지인 옥문유전을 완공한 것이다. 1941년 3월 국민정부 자원위원회는 감숙유전국을 성립하고, 손월기를 총경리로 임명한다. 기적은 손월기의 손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구입한 시추정과 정유설비가 버마를 지날 때, 돌연 버마를 점령한 일본군에 빼앗긴다. 손월기가 이끄는 공정기술인원은 스스로의 손으로 설계한 시추정과 정유설비로 생산에 들어간다. 1942년 8월 장개석은 호종남을 데리고 옥문유전을 시찰하며, 손월기의 보고를 듣는다. 이를 보면, 옥문유전이 항전국면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42년 11월 옥문유전이 한해에 180만갤런의 휘발유생산임무를 완성한다. 이는 중국의 항전에 큰 물질적 역량을 제공했다. 이때부터, 손월기는 중국 석탄석유대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중국엔지니어협회는 손월기에게 '금질공정장상'을 수여한다.


만일 채원배 선생이 손월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았더라면, 손월기의 일생은 아마도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중국은 아마 전설같은 기업가를 한 명 잃었을 것이고, '석탄석유대왕' 한 명도 잃었을 것이다. 한 국가에 있어서, 최대의 손실을 바로 인재의 유실이다. 인재의 유실은 국가발전의 잠재력을 고갈시킨다.


3. 국민정부 자원위원회와 삼협공정


삼협공정은 중국인 백년의 꿈이라고 말해진다. 다만 손중산, 새비지(薩凡奇 John L. Savage), 모택동이 한 삼협공정의 꿈은 전혀 달랐다.


1919년, 손중산 선생은 <실업계획>을 발표하는데, "현존수로와 운하를 개량한다"는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갑문을 만들어 그 물을 가두고, 배를 역류하여 운행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수력발전을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손중산은 삼협에 낮은 댐을 만들어 수위를 높이고, 항운조건을 개설하며, 발전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높은 댐을 건설하여, 삼협으로 장강의 홍수를 막는 것이다.


1930년대초 국민정부 건설위원회는 장강상류 수력발전조사팀을 만들어, 삼협지구에 대하여 최초로 수리조사를 실시한다. 그리고 <양자강상류수력발전조사보고>를 제출한다.  서릉협내이 황릉묘와 갈주패에 두 개의 낮은 댐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 외에 7개의 낮은 댐을 건설하는 방안도 있었다. 주요 목적은 항운조건을 개선하면서 발전도 부수적으로 하는 것이다.


항전기간동안, 국민정부는 미국의 전문가를 불러서 고문으로 삼는다. 1944년 봄, 국민정부 전시생산국의 경제고문인 미국인 파스칼(G. R. Pascal)은 <중국이 미국차입금을 이용하여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상환하는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파스칼은 이렇게 건의한다: 미국이 9억달러어치의 설비를 제공하여 삼협에 용량이 1,050만킬로와트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동시에 연간 500만톤의 화학비료공장을 건설하여, 삼협의 염가전략을 이용하여, 화학비료를 제조하여 미국에 수출한다. 이를 통해 중국의 식량생산량을 늘이고, 중국인의 식량문제를 해결한다. 파스칼은 전부 차입금의 원리금을 상환하는데 15년이 걸릴 것으로 보았다. 국민정부는 파스칼의 건의에 흥미를 나타낸다. 1943년말, 국민정부 자원위원회는 미국 개간국 총공정사 새비지를 초청하여 삼협지구에 대한 고찰을 진항한다. 1944년 5월 10일 새비지는 중경에 도착하고, 삼협지구를 고찰하기 시작한다. 당시 자원위원회에서 일하던 육흠간(陸欽侃) 선생은 새비지의 고찰에 처음부터 끝까지 배동한다. 1944년 10월 9일, 새비지는 국민정부 자원위원회 주임 옹문호에게 <양자강삽협계획초보보고서>를 제출한다. 새비지가 건의한 삼협댐의 부지는 의창 상류의 5-15킬로미터 떨어진 남진관(南津關)에서 석패(石牌) 사이였다. 대체로 지금의 갈주패 소재지이다. 댐의 높이는 약 250미터로 수위를 약 160미터 끌어올리며, 댐의 용량은 617억입방미터이다(현재 삼협댐의 높이는 185미터로 수위를 113미터 끌어 올렸으며, 댐의 용량은 383억입방미터이다). 수력발전소는 장강의 양안에 건설하며, 전부 암석터널안에 깊이 숨겨져 건설된다. 각각 48대의 수륜발전설비를 설치하며, 대당 용량은 11만킬로와트이다. 총용량은 1,056만킬로와트가 된다. 연간발전량은 817억킬로와트가 된다. 건설예상금액은 10억달러가량이고, 8년의 기간을 들여 완공한다. 1945년초, 국민정부는 원칙적으로 새비지의 삼협계획에 동의한다. 그리고 자원위원회로 하여금 준비작업을 하도록 지시한다. 1945년 11월 21일, 국민정부 자원위원회와 미국 개간국은 기술협력계약을 체결한다. 개간국이 삼협댐의 공정설계를 대신하여 진행하고, 자원위원회는 중국측 엔지니어를 미국 개간국으로 보내어 삼협댐의 설계에 참여하도록 조치한다.


1946년 3월, 새비지는 다시 장강 삼협지구로 온다. 다시 한변 댐의 부지를 현지조사한다. 이때 손월기는 이미 국민정부 자원위원회의 부주임이 되어 있었고, 삼협댐의 전체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후 육흠간등이 자원위원회의 파견으로 미국 개간국으로 가서 삼협댐의 공사설계에 참여하여 배운다.


1947년 5월, 남경 국민정부는 "삼협공정의 잠정중단"을 선언한다. 자원위원회는 미국 개간국에 서신을 보내, 삼협계획의 설계업무를 국내경제의 곤란으로 잠정중단한다고 알리고, 덴버에서 설계에 종사하던 육흠간등 중국기술자를 불러온다. 1948년 5월, 손월기는 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위원 겸 자원위원회 주임이 된다. 행정원의 원장은 옹문호이다. 1949년 3월, 손월기는 국민정부 공상부장관 겸 자원위원회 주임이 된다.


4. 손월기와 삼협공정


1949년 11월 손월기는 자원위원회를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에 귀순을 선언한다. 1950년 손월기는 중국국민당에서 당적을 박탈당하고, 국민정부로부터 반당반국죄로 지명수배를 당한다.


1952년 거행된 삼반운동(三反運動)때, 손월기와 자원위원회의 일부 인원은 의심과 심사를 받는다. 오로지 장광두(張光斗)만이 예외였다. 오반운동(五反運動)때, 친구인 노작부가 자살한 것은 손월기에게 큰 타격을 준다. 그후 손월기는 다시 석탄광산으로 돌아가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정치중심 북경을 벗어나, 당산의 개란석탄광산으로 가서 일한다. 문화대혁명때 손월기는 다시 자원위원회 문제로 격리심사를 받는다. 1973년에야 자유를 회복한다. 1976년 당산대지진으로 손월기 부부가 살던 단층집이 무너져, 두 사람은 폐허에 묻힌다. 이웃사람이 구해주어서 겨우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늑골 3개가 부러졌다. 당산대지진후 손월기의 딸은 부모를 북경으로 모셔와 거주하게 한다. 1981년 손월기가 석탄부 고문을 맡는다. 1983년 손월기는 전국정협 제6기 상임위원 겸 전국정협 경제건설조 조장이 된다.


1980년 7월 11일, 등소평이 호북성위 제1서기 진비현, 사천성 성장 노대동등의 배동하에, '동방홍32'호를 타고 중경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삼협지구를 시찰한다. 도중에 장강유역판공실주임 위정쟁(魏廷琤)은 등소평에게 삼협공정의 150미터방안을 보고한다. 이는 낮은댐방안이라고 불린다. 앞에서 언급한 새비지의 삼협계획과 비교하여 수위가 100미터 낮고, 댐의 용량은 원래의 1/4이 되지 않는다. 다만 연간 발전량 1,100억킬로와트는 새비지의 817억킬로와트보다 많다. 등소평은 과학기술은 모른다. 그래서 속았다. 배가 무한에 도착한 후, 등소평은 호요방과 조자양등을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삼협공정을 건설하는 것은 효과가 매우 크다. 삼협공정을 가볍게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중앙, 국무원과 관련부서의 책임동지들은 북경으로 돌아간 후 시급하게 연구하라" 1982년 11월 24일 등소평은 국가계획위원회의 보고를 들을 때 다시 한번 삼협공정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다; "나는 낮은댐방안에 동의한다. 제대로 보고 결심했다. 동요하지 말라." 1983년 4월 5일, 장강수리위원회의 전신인 장강유역판공실은 국무원에 <장강삼협수리허브150미터방안보고>를 제출한다. 1달후, 1983년 5월, 국가계획위원회는 350인을 조직하여 심사한 후 150미터방안을 통과시킨다. 1984년 2월 17일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삼협공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중요회의가 중남해에서 개최된다. 회의에서는 금년 내년 2년동안 삼협공정의 전기업무를 완성한다고 결정한다. 여기에는 현장의 토지평탄화작업을 포함한다. 국가계획위원회도 삼협공정 전기업무의 전용자금을 마련한다. 4월 5일, 국무원은 삼협공정 150미터 방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한다.


국무원이 삼협공정 150미터방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는 소식에 등소평이 주석으로 있던 전국정협은 난리가 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의사결정체제의 특징은 권력의 고도집중이고, 의사결정의 경험화이다. 백성들의 말을 빌리면, 지도자가 혼자 생각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결정으로 재난이 생겨도 의사결정한 사람은 여하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당시 최대의 목소리는 의사결정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매커니즘을 도입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손월기는 대담하게 글을 올려 의문을 표시한다. 손월기는 오랫동안 국민정부 자원위원회의 책임자였으므로, 미국 개간국 총공정사 새비지의 삼협계획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삼협공정의 계획을 간단하게 대비해봐도 그 중의 문제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조자양의 삼협댐에 대한 태도는 약간 애매했다. 1980년 7월 등소평이 무한에서 삼협공정에 대한 지지를 표시한 후, 조자양은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등소평의 요구에 따라 추진한다. 그러나 행동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먼저 국가계획위원회를 조직하여 150미터방안을 심사하게 하고, 그 후에 이붕(李鵬)으로 하여금 중공중앙,국무원삼협공정영도소조의 조장을 맡게 하며, 다시 국무원이 원칙적으로 삼협공정150미터방안을 비준하게 한다. 전국정협의 손월기, 팽덕(彭德), 육흠간등은 글을 올려 의문을 표시한다. 1984년 5월 전국정협 제2차회의비서처는 수력발전부에 질의서를 보낸다. 정협위원들에게 삼협공정의 상황을 소개해달라고 요구한다. 수력발전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관리를 보내어 자료를 가지고 정협으로 가서 상황을 소개한다. 그리하여 정협위원들은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정협위원들은 의견을 중공중앙과 국무원에 보낸다. 1984년 10월 26일, 조자양은 국무원의 명의로 수력발전부에 각 방면의 의견을 종합하여, 삼협공정에 대하여 명확하고, 분명하며, 과학적인 답변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공정을 착수할 수 없다고 한다. 전국정협위원들의 의견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조자양의 의도는 반대파의 의견을 빌어 삼협공정의 의사결정을 지연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 전국정협내에 국무원이 삼협공정150미터방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한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거기에는 전국정협 부주석 주배원(周培源), 전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임화(林華), 전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조유강(趙維綱), 전 중국은행총경리 교배신(喬培新), 전 교통부 부부장 팽덕, 전 상업부 부부장 왕흥양(王興讓), 전 총후근부 부부장 서광의(胥光義, 전 중국건축학회 회장 엄성화(嚴星華), 중국과학원 학부위원 후학욱(侯學煜), 전 수리수전계획설계원 원장 겸 당조서기 나서북(羅西北), 전 북경공헙대학 부교장 진명소(陳明紹), 전 중국인민은행 총행고문 천가구(千家駒), 일찌기 새비지를 배동하여 삼협을 고찰한 전 수리부 장기계획처 부처장 육흠간 등등이 있었다.


당시 손월기는 전국정협의 경제건설조 조장(현재의 전국정협 경제위원회 주임에 상당함)을 맡고 있었는데, 경제건설조에 삼협공정전문소조를 만든다. 그리고 손월기는 스스로 조장이 되고, 삼협공정의 관련문제를 조사한다. 1985년 5월 30일부터 92세 고령의 손월기는 친히 삼협공정전문소조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도강언, 민강, 계획중인 삼협댐지역, 형강둑등지를 38일간 살펴본다. 중국의 신문과 매체에서는 전국정협 경제건설조가 삼협지구를 고찰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정홍(程虹)과 근원(靳原)이 쓴 <1919-1992삼협공정대결실>이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다: 전국정협 삼협공정전문소조가 계획중인 삼협댐지구 자귀현성에 도착했을 때, 어느날 정오에 전문소조의 한 노선생(분명히 손월기일 것이다)이 길거리를 다니며, 현지 백성들의 삼협공정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었다. 이 노선생은 현지의 한 젊은이를 만났고, 젊은이와 한담을 나누었다. 노선생이 물었다: "이곳에 삼협댐을 만들면, 너는 좋으냐 아니면 반대하느냐?" 젊은이는 급히 대답한다: "좋지요!" 노선생이 계속 묻는다: "물을 이곳에 가두면, 집을 옮겨야 하고, 밭도 잠길텐데, 너희는 겁이 나지 않느냐?" 젊은이가 대답한다: "그게 뭐 무서워할 일입니까. 국가에서 돈을 내서 우리에게 새로 지어주겠지요. 땅이 물에 잠기면 우리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말고 노동자가 되면 되니, 좋은 일이 아닙니까." 노선생이 말한다: "누가 그렇게 좋게 얘기했느냐? 국가에는 너희에게 새로 집을 지어줄만큼 돈이 많지 않다. 모두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그 후에 간부들이 뻥치는 소리를 믿지 말라. 너희를 속이는 것이다." 젊은이가 말했다: 듣기로 이곳의 댐으로 이주해야하는 사람이 백만이 넘는다는데, 우리를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세살짜리 아이가 이닙니다."


나중에 삼협공정으로 백만이상이 이주한 사실은 증명한다. 속은 것은 바로 이 젊은이였다. 바로 백만이상의 삼협공정이주민이다. 밭은 물에 잠기고, 농민은 여전히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높은 산언덕에서, 더욱 척박한 토지를 개간해야 했다. 삼협공정이 이주민들에게 준 배상금은 평균 3만여위안이다. 실제로 이주민들의 손에 들어간 것은 7,8천위안에 불과했다. 새 집을 짓고 싶으면 다시 대출을 받아야 했다. 현재 삼협공정의 백만이상의 이주민들의 기본상태는 "삼무(三無)"이다. 농사지을 밭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앞날도 없다. 이는 국무원 삼협건설위원회의 공식 결론이다.


고찰을 마친 후, 손월기는 3만자에 이르는 의견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중공중앙과 국무원에 제출한다. 전국정협과 외국여론의 압력으로, 등소평, 중공중앙과 국무원은 부득이 원래 비준한 삼협공정150미터방안에서 한 걸음 후퇴한다.


1986년 3월 31일, 등소평은 내방한 미국 <중보(中報)>의 동사장 부조추(傅朝樞)를 접견한다. 부조추는 직접 등소평에게 묻는다: "삼협공정이 반대의 목소리에 영향을 받겠습니까?" 등소평이 대답한다: "중국정부가 하는 모든 일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삼협공정을 건설하는 것같이 천추만대에 관련되는 큰 일은 반드시 주도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장잠이 가장 많고 단점이 가장 적은 방안으로 착공해야하고, 절대로 서둘러서 대충 해서는 안된다." 등소평이 1982년 11월 24일에 말한 "나는 낮은댐방안에 찬성한다. 정확하게 보고 결심한 것이다. 동요하지 말라"는 것에서는 확실히 한걸음 물러선 것이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상 중국정협에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의 절대적인 의사결정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한 것이다. 오사운동에서 제기되었던 민주, 과학적 의사결정을 향해서 작은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