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호적(胡適)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북대는 세 마리 토끼때문에 유명해졌다"
이 "세마리 토끼"는 각각 채원배(蔡元培), 진독수(陳獨秀), 호적이다. 세 사람은 모두 토끼띠이다. 채원배는 동치 정묘년(1867년)생이고, 진독수는 광서 기묘년(1879년)생이며, 호적은 광서 신묘년(1891년)생이다. 모두 토끼해에 태어났고, 서로간에 12살씩 차이가 났다.
"노토자(老兎子)" 채원배
북경대학의 전신은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다. 교사는 대부분 한림원의 고루한 유생들이었다. 학생은 대다수가 귀족관료 혹은 명문가의 자제였다. 학당에 다니는 목적은 바로 승관발재(昇官發財, 관직이 오르고 돈을 버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수업에 들어올 때 시종을 데리고 왔다. 체육수업에 교원은 공손하게 "노야(老爺) 우향우 하십시오. 대인(大人) 앞으로 나가십시오."라고 항ㅆ다. 어떤 학생은 '팔대후통(八大胡同, 북경이 홍등가)'의 단골고객이었다. 민국성립후,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으로 개칭되고, 초보적인 개혁을 거쳐, 학교의 면모에 일부 변화가 발생한다. 다만 '노야'식 학당전통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묵은 폐해가 적지 않았다.
채원배 이전에, 북대라는 이 '뜨거운 감자'는 이미 여러 교장들이 거쳐갔다. 초대교장은 명성이 뛰어난 학자이자 사상가인 엄복(嚴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골치아픈 일상업무를 제대로 처리하기 힘들어 8개월만에 용퇴한다. 채원배는 어려움을 알면서도 나서서 용감하게 교장직을 맡았다. 신문에서는 당시에 이렇게 평가했다: "채혈민(蔡孑民, 채원배) 선생은 22일 북경에 도착한다. 큰 바람과 눈 속에서 이 학계의 태두로 왔다. 짙은 안개가 더해질 때 하나의 밝은 별을 보게 되었다."
채원배가 북대를 개조한 무기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8자방침이었다: 사상자유(思想自由), 겸용병포(兼容幷包). 학교는 독립한 자격을 유지해야 하고, 각파 정당 혹은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교수가 학교를 운영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채원배는 각계의 인재를 포용하였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따지지 않고, 정치적 관점이 어떠하든지, 학력배경이 어떠하든지, 재능이 있으면 기용했다. 일시에, 북대는 대가들이 운집한 장소가 된다. "신조(新潮)"와 "국고(國故)"의 대치, 백화(白話)와 문언(文言)의 다툼, 유파가 다양하게 존재하고, 백가쟁명하여 북대는 이후 조용한 적이 없었다. 교수들의 관점은 왕왕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다만 바로 이러한 차이가 일종이 창조력을 형성한다. 자유로운 공기 가운대 개인이 자유롭게 장점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만물병육이불상해(萬物幷育而不相害), 도병행이불상패(道幷行而不相悖)" 북대는 활력과 대도를 보여준다. 진독수는 <채혈민선생서거후감언>에서 이렇게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는 아량을 지니고, 학술자유와 사상을 존중하는 탁견이 있었다. 독재에 익숙하고 호동오이(好同惡異)하는 동방인들 중에서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다."
채원배의 출현은 북대를 고루한 구식학당에서 생기발랄한 신식대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중토자(中兎子)" 진독수
진독수는 사람됨이 구속을 싫어하고, 개성이 극히 강하였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계문명의 발원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과학연구실, 하나는 감옥이다. 우리 청년은 뜻을 세워 연구실을 나와 감옥으로 가고, 감옥을 나와 연구실로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가장 고상한 생활이다."
진독수가 북대에 들어간 것은 재능이 있는 자를 아끼는 채원배가 여러번 요청한 결과이다. 진독수는 채원배의 성의에 감동하여, 온 가족을 데리고 북경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북경대학 문과학장을 맡는다. 진독수는 당시 "한 명의 맹장으로, 영향력이 컸고, 가장 잘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독수가 부임한 후, 북대 문과를 정돈한다. 채원배를 도와 전체 북경대학을 정돈한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인재을 초빙한다. 얼마후, 북대 문과는 진독수를 우두머리로 하여, 호적, 심윤묵(沈尹默), 장사쇠, 전현동(錢玄同)등이 학제개혁기구에 참가하고, 문과개혁을 시작하며 북대 문과의 면모를 일신한다.
<신청년> 편집부도 북경 북지자(北池子) 전간후통(箭杆胡同) 9호 (지금의 20호)의 진독수 집으로 이전한다. 이때부터 북경대학은 신문화운동의 핵심이 된다. 진독수는 무끄럽지 않은 신문화운동의 기수이자 총사령관이었다. 당시 전간후통 9호에서 내놓은 목소리는 전체 중국을 뒤흔들었다. "오사운동의 총사령관"(모택동의 말)으로서, 진독수는 북대의 사회지명도와 역사지위를 크게 끌어올렸다.
진독수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민주, 과학의 양면의 깃발을 치켜든 사람이다. 중국근현대역사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도 중국역사의 발전에 영향을 주고있다. 그가 창간한 <신청년> 잡지는 중국근현대사상 영향이 가장 컸던 간행물이다. 한 세대의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이끌었다.
"소토자(小兎子): 호적
1917년 7월, 호적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진독수의 추천으로, 27살의 호적은 젊은 북대교수가 된다. 호적은 미국에 있을 때,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등 글을 발표하여, 신문화운동의 선구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비록 젊은 세대이지만, 북대에 왔을 때 이미 명성이 대단했다.
북대에서의 초기 몇년동안, 호적은 많은 저술을 남겨, 거국적으로 주목받는다. 문학분야에서, 그는 최초의 신시집 <상시집(嘗試集)>을 내놓는다; 그리고 최초의 백화희극 <종신대사>를 내놓고, 최초의 백화번역외국문학작품집 <단편소설>을 내놓는다. 그리고 앞장서서 고증을 고전소설연구에 운용한다. <홍루몽고증>이라는 글은 영향이 가장 컸다. 철학분야에서, <중국철학사대강>(상권)을 출판한다. 이것들은 모두 개산지작(開山之作)이다.
호적과 진독수의 성격상 차이점에 대하여, 노신은 아주 재미있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신청년>은 매번 간행물을 내놓을 때마다 편집회의를 개최했다. 그리하여 다음 기의 원고를 협의하여 정한다. 그때 가장 나의 주의를 끄는 사람은 진독수와 호적지였다. 만일 도략을 한 칸의 창고에 비유한다면, 진독수 선생은 바깥에 하나의 큰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크게 써놓는다: "안에 무기가 있으니 오는 자는 조심하라!", 그러나 그 문은 열려 있다.안에는 몇 개의 총이 있고, 몇 개의 칼이 있다. 일목요연하다. 방비할 필요가 없다. 호적지선생은 문을 꽉 걸어잠그고, 문에 작은 쪽지를 붙여놓는다. "안에 무기가 없다. 의심하지 말라..."
1930년대, 장몽린(蔣夢麟)이 북대교장을 맡고 있을 때, 호적은 북대 문학원장을 맡는다. 호적은 그의 명망을 이용하여 맹삼(孟森), 전목(錢穆), 유평백(兪平伯), 양실추(梁實秋), 문일다(聞一多)등 저명한 인사를 북대교수로 모셔온다. 내전시기, 호적은 부사년(傅斯年)의 뒤를 이어, 북대교장이 된다. 북대의 난세때의 발전에 어느 정도 공헌을 했다.
당시의 북대는 대단한 인물들이 너무 많았다. 토기때에 속하는 명교수만도 여러 명이다. 주작인(周作人)이 쓴 <지당회상록>에 <묘자호의 명인>이라는글이 있는데, 거기서 토끼띠인 북대명인을 소개한다. "두 마리의 늙은 토끼"와 "세 마리의 어린 토끼"이다. 글에서 채원배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채원배가 북대교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급한 "늙은 토끼"는 진독수와 주희조(朱希祖)이고, "어린 토끼"는 호적, 유반농(劉半農)과 유문전(劉文典)이다. 당시 3명은 모두 27살이었다. 비록 젊었지만 저술은 많았고, 이미 북대에서 명성을 지닌 교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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