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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왕28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의 영불연합군(하)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외교조약의 체결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과 북경에서 담판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제2차아편전쟁을 종결시키는 은 청나라가 처음 북경에서 서양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실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서 압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역대이래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을 주목했고, 조약체결현장의 내외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실 북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 자체가 연구해볼만한 중요한 이슈이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운 후,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이 조치의 의도를 표명하고, "30만은냥을 피해자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 2023. 6. 25.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 북경의 영불연합군(상)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1860년의 "경신지변"은 근대중국이 급전직하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또한 청나라 통치집단이 진정으로 깨닫고, 자구자강을 도모한 시작점이다. 이 해에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안정문(安定門)을 점령했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영불연합군과 을 체결하게 된다. 만일 제2차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을 체결한다. 그것은 단지 아편전쟁의 재판이었다. 나중에 다시 곡절이 생겨 제2차아편전쟁은 새로운 업그레이드버전, 확대버전으로 상승하게 되고, 전쟁은 쌍방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의 조류는 열려진 갑문처럼 더 이상 청나라통치자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무력공세에 밀려 자본주의세계의 식민체계로 한걸음 더 빠져들게 된다.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 2023. 6. 25.
순친왕부(醇親王府):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한 청나라 최고의 왕부 글: 소태양(小太陽) 청나라의 순친왕부에서는 일찌기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청말 수십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부라 할 수 있다. 그 기세와 씀씀이는 다른 왕부를 훨씬 넘어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친왕부의 씀씀이를 통해서 우리는 개략 청말제일왕부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순친왕부의 출현 만청입관(滿淸入關,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자리잡다)후, 더 이상 명나라의 제도와 같이 왕실을 전국각지에 분봉(分封)하지 않았지만, 황실내에 여러 왕야(王爺)를 분봉한다. 그들이 획정한 엄격한 등급제도를 보면, 여러 작위들 중에서 오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의 부저(府邸, 집)만을 "왕부"라 부를 수 있었다. 그보다 아래 등급인 패륵(貝勒), 패자(貝子).. 2022. 11. 17.
1861년: 함풍제(咸豊帝)와 공친왕(恭親王) 글: 언구림(言九林) 1861년, 러시아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청제국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 이 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청나라조정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성립되었고, 다른 하나는 함풍제가 열하(熱河)에서 사망한다. 1. 함풍제의 존엄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이 해의 1월에 성립된다. 나중에 '총리아문'이라고 약칭된다. 이전에 외국관련업무를 처리하던 중앙기관은 "무이국(撫夷局)"이었는데, 이는 임시기구였다. "무이"에서 "총리각국사무"로 바뀐 배후에는 청나라조정의 외교에 대한 심리상태가 미묘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풍제 혁저(奕詝)에 있어서, 도광제(道光帝) 시절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에 패배한 것.. 2022. 8. 9.
혁흔(奕訢)의 후손들은 어떻게 공왕부(共王府)를 팔아버렸는가? 글: 유강화(劉江華) 모두 알고 있다시피, 십찰해(什刹海) 부근의 공왕부는 원래 청나라때 공친왕(共親王) 혁흔의 저택이다. 지금 그것은 가장 잘 보존돈 청나때의 왕부건축군(王府建築群)이다. 공왕부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좌공왕부(一座共王府), 반부청대사(半部淸代史)" 공왕부 한채는 반권의 청나라역사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청나라때, 공왕부는 건축이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아니라, 그 안에는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골동품과 진귀한 고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진당(晋唐)이래의 서화명작이 120종이상이다. 거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와 왕헌지(王獻之)의 이었다. 그는 투명한 종이를 대고 그림을 배껴서 1달의 시간을 들여, 종이, 비단으로 각각 1본씩 임모한다. 계.. 2020. 7. 29.
영수공주(榮壽公主): 청나라의 마지막 공주 글: 지역사(知歷史) 청나라 후궁의 체제는 아주 특이했다. 특히 '공주(公主)'와 '거거(格格)'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구분되었다. <흠정대청회전>에 따르면, "무릇 공주는 둘로 나뉜다; 고륜공주(固倫公主)와 화석공주(和碩公主)이다. 황녀중 중궁(황후) 소생은 고륜공주에 .. 2019. 1. 23.
도광제(道光帝)는 왜 60이 되도록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을까? 글: 소몽(蕭夢) 도광제는 60세가 될 때까지 비밀입저(秘密立儲)를 하지 못했고, 선택을 망설였다. 그 이류를 알아보면 실로 가슴아프다. 1. 앞의 세 명의 황자가 전후로 죽었다. 도광제는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황장자(皇長子) 혁위(奕緯)는 가경13년에 태어났고, 11살때 패륵(貝.. 2018. 9. 14.
함풍제는 왜 숙순(肅順)을 중용했을까? 글: 왕개새(王開璽) 북경사범대학 역사학원 교수 역사학자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재원(載垣), 단화(端華), 숙순등은 북경에 있을 때, 함풍제가 중시한 대신들이다. 함풍제를 따라 열하(熱河)로 도망친 후에는 다른 왕공대신들도 없고하니, 재원등 그 중에서도 특히 숙순이 함풍제의 신.. 2017. 3. 29.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적장신분패(嫡長身分牌) 동치제편(1) 함풍제는 황위계승자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서태후(자희태후)가 낳은 재순(즉, 나중의 동치제)뿐이다. 그러므로, 옹정제때 만든 비밀건저(秘密建儲)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함풍제는 조부인 가경제처럼 후계자를 느긋하.. 2015. 10. 11.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후전황지패(后傳皇旨牌) 서태후편 청나라말기 중국을 반세기동안 통치했던 서태후 예허나라씨(葉赫納拉氏)는 원래 수녀(秀女)선발로 황궁에 들어가 함풍제(咸豊帝)를 모셨다. 그녀는 총명하여 점차 함풍제의 총애를 받는다. 마침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마터면 함풍제는 대가 끊어질 뻔한다. 함풍제가 아들을 학수.. 201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