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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영수공주(榮壽公主): 청나라의 마지막 공주

by 중은우시 2019. 1. 23.

글: 지역사(知歷史)





청나라 후궁의 체제는 아주 특이했다. 특히 '공주(公主)'와 '거거(格格)'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구분되었다. <흠정대청회전>에 따르면, "무릇 공주는 둘로 나뉜다; 고륜공주(固倫公主)와 화석공주(和碩公主)이다. 황녀중 중궁(황후) 소생은 고륜공주에 봉하고, 비빈소생은 화석공주에 봉한다. 만일 황후가 종실녀를 부양하여 시집보내면 역시 화석공주로 봉한다. 고륜공주의 등급은 친왕(親王)과 같고, 화석공주의 등급은 군왕(郡王)과 같다."


이를 보면, 청나라 황제의 딸은 '공주'라 부른다. 황후가 낳은 딸만이 '고륜공주'가 될 수 있다. 나머지 후궁이 낳은 경우(황후의 양녀 포함)는 모조리 '화석공주'이다. 황족왕공의 딸은 '거거'라고 부른다. 경계선이 아주 엄격하고 분명하다.


아래에는 중국의 마지막 공주인 고륜영수공주의 일생을 알아보기로 한다.


고륜영수공주는 기실 '가짜공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제의 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의 딸이다. 그녀가 공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그녀를 좋게 보아 후대했기 때문이다.


1861년 함풍제가 죽은 후, 그의 유일한 아들인 재순이 등극한다. 그가 바로 동치제이다. 재순의 나이가 겨우 6살이었으므로, 함풍제는 그를 위해 보정대신을 골라준다. 각각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대학사 숙순, 부마 경수, 오명의 군기대신 중에서 목음, 광원, 두한, 초우영을 합해서 8명이다. 그러나, 함풍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가 고심하여 임명한 '고명팔대신'이 겨우 26살의 여인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연합하고 공친왕 혁흔의 지지를 받아, 함풍제이 장례식날 정변을 일으킨다. 8명의 고명대신은 주살되거나 삭탈관직된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47년에 걸친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서태후의 수렴청정후, 공신 혁흔을 아주 중용한다. 그를 조정의 중신으로 만들어 준다. 동시에 그의 장녀인 나이 겨우 10살의 영수를 양녀로 받아들여, 고륜공주에 책봉하고, 궁에서 기른다. 후궁상하는 모두 그녀를 '대공주(大公主)'라고 불렀다.


2년후, 서태후는 영수공주를 위하여 '사위물색'을 시작한다. 금방 나이 12살의 영수는 자신의 '사촌오빠'에게 시집간다. 바로 도광제의 여섯째딸 수은고륜공주(壽恩固倫公主)와 부마 경수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 지단(志端)이다. 비록 친상가친(親上加親)이지만, 지단은 품행이 아주 단정했고, 결혼후 부부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여 주위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한다. 겨우 5년후에 지단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7살의 영수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영수공주가 과부로 된 후에, 서태후는 그녀를 궁으로 불러서 같이 생활한다. 영수는 용모는 보통이지만, 사람됨이 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스스로 책임있게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서태후의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서태후는 한편으로 그녀를 신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녀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영수공주의 권고는 대부분 서태후가 들어주었다.


서태후는 꽃무늬의 화려한 복장을 좋아했는데, 영수공주가 이를 보고 한 마디 했다: "모후는 나이도 있는데, 입는 것도 적절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화려하게 입으면 성숙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서태후는 그녀의 권고를 듣고, 그후 영수공주와 만날 때는 간소한 의복을 입었다. 심지어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았고, 악세사리도 너무 많이 달지 않았다.


한번은 누군가 서태후에게 아주 화려한 치파오를 선물했다. 이 치파오는 강남의 뛰어난 장인이 비단을 정교하게 짜서 만든 것이다.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아니라 가치가 엄청났다. 서태후는 이 치파오를 너무 좋아했고, 자주 입고서 감상했다. 그런데 이를 영수공주가 알게 되었다. 영수공주는 즉시 입궁하여 서태후에게 직접 말한다. 서태후가 더 이상 그 옷을 입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영수공주는 그만두었다.


동치13년, 복대명불대(福大命不大)의 동치제가 병사한다. 서태후는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과 자신의 친여동생 용아(蓉兒) 소생인 재첨(載湉)으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게 한다. 동치제의 황위가 아니라 함풍제의 황위를. 재첨이 바로 광서제이다.


당시 광서제는 겨우 4살이었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계속하는 외에 허수아미황제 광서제를 엄히 단속했다. 아무런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영수공주는 광서제를 더욱 아까고 보살펴 준다.


영수공주는 광서제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했고, 항상 대국적인 견지에서 서태후와 광서제의 관계와 갈등을 조화시키느라 애썼다. 나중에 광서제가 강유위, 담사동등의 지지하에 유신을 진행하고, 무술변법을 발동하였다가, 결국 서태후에게 무력으로 진압당한다. 서태후는 유신파를 모조리 제거한 후, 광서제에게도 손을 쓴다. 특히 광서제가 정변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말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곤장을 마구 때려 죽여버려 후환을 없앨 생각을 한다. 이때 영수공주는 열하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밤을 새워 궁으로 돌아와, 감정에 호소하고  이치를 들이대며 서태후에게 광서제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한다. 결국 서태후는 광서제의 목숨은 남겨준다. 단지 그를 영대에 연금만 시킨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감히 '모역'을 꾀한 것은 광서제가 가장 총애하는 진비(珍妃)가 배후에서 장난을 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비는 원래 예쁘게 생겼고, 평상시에도 불항불비(不亢不卑)하며, 심지어 서태후에게 공공연히 대들기도 했다. 서태후와 그녀의 갈등은 골이 아주 깊었다. 그리고 진비는 일찌기 영수공주에게 광서제가 죽임을 당항 처지에 놓였으니, 공주께서 황제를 보호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진비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통해 광서제를 철저히 고립시키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팔국연합군이 경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서안으로 도망치면서, 떠날 때, 태감에게 명하여 진비를 고궁의 우물에 밀어넣어 죽여버린다. 이때의 영수공주는 이미 궁을 떠나 피난하고 있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서야 진비가 죽은 것을 알게 되고, 비통해 마지 않는다. 그리고 여섯 글자를 내뱉는다: 나는 진비를 볼 면목이 없다(我對不起珍妃)"


그러나, 영수공주는 결국 광서제를 지켜내지 못했다. 1908년, 스스로 목숨이 다한 것을 안 서태후는 환관으로 하여금 광서제를 독살하게 한다. 그리고 후계자를 안배한다. 이렇게 하여 광서제가 돌연 붕어한 후, 서태후도 붕어한다. 서태후는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생전에 가장 무서워했던 영수공주가 그녀를 묻어주게 될 줄은. 일황일후가 돌연 붕어한 후, 조야상하는 혼란에 빠진다. 항제와 태후의 시신이 좌우에 나란히 있고, 모두 나무판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 염도 하지 않았다. 영수공주는 비통함을 참으면서, 태감을 불러서 임무를 맡기고, 의식을 안배한다. 이렇게 하여 서태후와 광서제는 질서정연하게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924년, 71세의 영수공주는 사망한다. 그리고 안정문외 입수교 동뢰교촌 남쪽에 묻힌다. 일대 전설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