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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 북경의 영불연합군(상)

by 중은우시 2023. 6. 25.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1860년의 "경신지변"은 근대중국이 급전직하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또한 청나라 통치집단이 진정으로 깨닫고, 자구자강을 도모한 시작점이다. 이 해에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안정문(安定門)을 점령했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영불연합군과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만일 제2차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천진조약>을 체결한다. 그것은 단지 아편전쟁의 재판이었다. 나중에 다시 곡절이 생겨 제2차아편전쟁은 새로운 업그레이드버전, 확대버전으로 상승하게 되고, 전쟁은 쌍방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의 조류는 열려진 갑문처럼 더 이상 청나라통치자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무력공세에 밀려 자본주의세계의 식민체계로 한걸음 더 빠져들게 된다.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근대사연구에서 비교적 박약한 분야이다. 제사화(齊思和)등이 편찬한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근대사자료총간>의 여러 분야중에서 가장 늦게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연구의 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문세계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저작은 단지 위건유(魏建猶)이 쓴 <제2차아편전쟁>, 장맹인(蔣孟仁)이 쓴 <제2차아편전쟁>, 하립(夏笠)이 쓴 <제2차아편전쟁사>의 3가지이다. 그 분량도 모두 많지 않다. 이들은 1950,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의 연구수준을 보여준다. 황우화(黃宇和) 선생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제2차아편전쟁>자료집이 출판된지 근 40년이 되었다. 영문졸저 <짐몽(鴆夢):제2차아편전쟁탐색>을 제외하고, 중문세계에서는 거의 아무도 이 자료를 이용하여 책을 쓴 사람이 없는 것같다." 이 말은 정확하진 않다. <제2차아편전쟁>은 하립이 책을 쓸 때 참고한 기본문헌이다. 다만 제1차아편전쟁과 비교하면, 중국내에서 제2차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국제적으로 최근 들어 주목을 받은 성과는 프랑스학자 Bernard Brizay가 쓴 <1860: 원명원대겁난>이다. 이 책은 프랑스, 영국의 관련문헌을 대량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프랑스학자 로서 Alain Pdyrefitte의 <정체된 제국 - 두 세계의 충돌>이라는 책을 이어, 또 하나의 중국-서양관계사에서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Bernard Brizay 본인과 연락하여, 그의 저작에서 인용한 150여종의 문헌중에서 27종의 영문, 불문문헌을 선별하여(영문본 9종, 불문본 18종) 중문으로 번역했고, 이 번역작품을 <원명원총서: 원명원겁난기억역총>에 두 집으로 나누어 중서서국(中西書局)에서 2011년, 2013년에 출판했다. 이는 외국의 관련자료에 대한 새로운 수확이었다. 제사화등 선생이 <제2차아편전쟁>자료를 편찬할 때, 일부 외국어문헌을 번역했지만, 발췌번역이었다. 이번에 대규모로 영문, 불문문헌을 번역한 것은 이 양국의 문헌을 모두 번역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비교적 중요한 문헌은 모두 포함시켰다. 당시 영불연합군의 관병이 무력과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쓴 일기, 편지, 회고록등 각종 형태의 문헌이 지금은 그들의 침략죄행의 증거가 되었고, 이는 우리가 제2차아편전쟁을 연구하는데 새로운 문헌적 기초가 되었다.

 

영굴연합군이 실제로 북경에 머문 기간은 50일이 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은 중서관계를 변화시키는 관건적인 순간이었다. "경신지변"은 만청(晩淸)에서 이미 사인(士人)들에 의해 많이 언급되었고, 역사의 비정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중국과 외국간의 간격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이 세상을 바꾸는 사건의 진상 특히 적측(영국,프랑스)의 활동에 대한 이해가 극히 부족했다. 나중에 역사가들이 제2차아편전쟁을 연구할 때, 영국,프랑스문헌자료를 제한적으로 이용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제2차아편전쟁의 연구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문제이다. 영국프랑스의 문헌자료를 발굴함으로써, 중문관련기록을 참조하여, 역사현장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영불연합군이 북경에서의 활동의 세부사항, 예를 들어, 영국, 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의 훼멸에 대한 이견, 연합군의 안정문점령이후 북경성벽에 대한 국사적 관찰과 예방조치, <북경조약>체결현장의 내외, 선교사와 연합군의 협력관계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살펴 현재를 알고,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다시 되새겨보아야할 가슴아픈 역사이다.

 

1. 영불연합군의 원명원에 대한 훼멸과 이견

 

1860년 9월 21일, 영불연합군은 팔리교(八里橋)에서 승격림심(僧格林沁)이 지휘하는 몽골기영(旗營)을 대패시킨다. 이 참혹한 전투결과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냉병기시대에 몽골철기가 칭웅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북경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조야상하는 깜짝 놀란다. 함풍제(咸豊帝)는 바로 공친왕(恭親王)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영불연합군과의 담판을 주재하도록 한다. 9월 22일, 함풍제는 좌우를 데리고 북경을 떠나 열하(熱河)로 도망친다. 강적이 밀려오는데 황제는 경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이는 명청 두 왕조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선택의 실제적 의미는 청나라조정이 무력으로 영불연합군에 맞서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예부주사(禮部主事) 유육남(劉毓楠)은 9월 22일, 23일, 25일의 3일간 견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초팔일 묘각(卯刻), 성가(聖駕, 황제)가 후비, 제왕대신(諸王大臣), 시위(侍衛)등 관리를 데리고 황급히 목란(木蘭)으로 떠났다. 듣기로 일행이 열하에 도착한 후, 인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초구일 내성에 남아서 지키고 있던 왕대신등은 내각정사당(內閣政事堂)에서 회의를 1회 개최하는데, 아무도 의견을 내지 못했고, 곧이어 해산한다. 그날, 파추(巴酋, 중국이름 巴夏禮로 영국인 Sir Harry Smith Parkes이다. 영불연합군의 협상대표였는데, 청나라에서 협상대표단을 구금했었다)를 석방하고 잠시 고계(高屆)에 거주하게 하며, 풍성하게 대접했다." 강적이 밀려오는데, 청나라조정은 '아무도 의견을 내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허둥지둥했고, 가두어 두었던 '파추'를 잘 대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를 보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후 며칠(9월 24일, 26일), 영국군은 북경으로 몰래 들어와 정찰한다. 10월 5일, 영불연합군은 소수의 병력을 통주(通州)에 남겨두고, 대부대는 북경으로 진군한다. 10월 6일, 영불연합군은 4로의 부대로 나누어 빠르게 전진한다. 영국군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청군은 아마도 경성 서북의 원명원부근까지 물러나서 지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불연합군은 원명원으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거기에서 회합하기로 한다.

 

프랑스군은 원래 영국군의 우측에서 부채형의 대열로 전진했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군이 길을 잃어, 쌍방간의 연락이 두절된다. 붙잡은 현지인 2명의 길안내를 받아 그날 저녁 7시에 Charles Cousin Montauban(중국명 蒙托邦)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먼저 원명원에 도착한다. 대오의 선봉에 섰던 피나(중국명 皮納) 해군부관이 병력을 이끌고 원명원에 진입한다. 원명원내의 수비병사들과 격전이 벌어졌지만, 프랑스군이 수비병사들을 물리친다. 7일 새벽, Charles Cousin Montauban이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일부 영국군이 원명원내로 진입한다. 그중 수행한 한 프랑스장교는 원명원내로 진입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일행이 첫번째 정원으로 들어서자, 사람들 앞에는 정원의 첫번째 누각이 나타났다. 공병이 도끼로 대문을 깼다. 원명원의 모든 누각의 대문에는 청군이 붙인 봉조(封條)가 있었다. 봉조는 길다란 종이로 되어 있었다. 모든 건축물 자물쇠의 눈은 꽉 막아 놓았다.

 

유럽의 여하한 궁전도 이 황가원림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부분 유럽의 호화사치스러운 궁전에서 볼 수 있는 나란히 배치한 거대한 건축은 볼 수가 없다. 원명원의 한 거대한 화원은 작은 호수들이 가운데 있었다. 그외에 원명원에는 가산(假山), 수도(水道), 공교(拱橋)와 목재 정자가 있다. 정자에는 도금을 칠해놓았고, 각종 색깔의 천으로 덮어 놓았다. 이 기세가 대단하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원림에서 이런 누각이 5,6백개에 이르렀다.

 

모든 누각에는 전용용도가 있다. 우리는 연이어 황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할 때 쓰던 정대광명전, 어좌보전, 황제황후침궁, 후궁, 황가제사당, 어선방, 어약방, 장서루, 그리고 조정고관과 궁정환관의 거소를 구경했다.

 

여하한 거대한 화원도 이 기세가 대단한 원림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체 파리만큼 크다. 먼 곳의 산맥이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다. 원림에서는 풀하나 자라나지 않는 산꼭대기가 보였다.

 

일행은 계속하여 오른쪽으로 갔다. 궁전담장 몇킬로미터 쯤 되는 곳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보았다. 루이15세 스타일이었다. 건축물은 나무들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부는 금벽휘황한 방들이 있었고, 실내장식은 퐁피두식 스타일이 짙었다. 그것은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과 비슷했지만 규모는 더욱 컸다. 사람들은 누각내부의 호화사치스러운 정도를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었다. 방안에는 곳곳에 진주, 부석, 황금과 유리장식품이 있어 눈이 부시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금장식의 천정아래에는 각종 예술품과 사치품으로 가득한 벽장이 있었다. 눈앞의 이 궁전은 마치 천일야화에서나 나올 것같았다. 깨어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런 것이 진짜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광경은 그저 꿈속에서나 나올 법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연합군의 병사들은 이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크기가 작고, 가져가기 편리한 물품을 선택했다. 말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태도는 공정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원명원을 약탈하는 것은 불가피했다고.  이런 상황하에서, 약탈은 다른 곳보다 심할 수밖에 업었다. 연합군은 아마도 이렇게 엄청난 재물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가장 진귀한 물품은 모조리 약탈당했다.

 

프랑스군이 먼저 원명원에 도착하였으므로, 원명원약탈도 실제로 프랑스군이 시작했다. 영국군장교 John Hart Dunne은 10월 7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저녁 7시, 총사령관이 도착해서, 바틀(巴特爾)여단과 우리의 용맹한 프랑스 동맹군을 찾았다. 프랑스인들은 이미 어제 황제의 여름궁전에 진입했고, 우리와는 4마일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대규모로 원명원을 약탈했다. 현재 듣기로 그들의 영지에는 대량의 손목시계, 괘종시계 및 보석장신구가 쌓여 있다고 한다. M군은 당시 현장에 있었는데, 그는 원명원의 물건중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빛이 나는 장신구와 대량의 옥석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모아서, 프랑스군 영지로 가고, 가능하다면 내일 아침에 원명원에 가볼 것이다." 

 

확실히 프랑스군이 약탈한 보물은 영국군도 입맛을 다시게 만든 것같다.

 

낮 11시, 영국군사령관 James Hope Grant와 특사 Elgin은 부대를 이끌고 원명원에 도착하여, 프랑스군과 만난다. 영불양군의 총사령관이 만난 후, 바로 원명원의 재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한다. Montauban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미 받은 훈령에 따라, 조례에 규정한 매 군대가 가져야할 재물외에 우리는 양군이 이 재물을 평등하게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각 군대는 각각 3명의 인원을 파견하여 가장 희귀한 보물을 골랐다. 그래야 공평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보물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의 운송능력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들 인원은 원명원내의 한 지하창고에서 '적지 않은 작은 은덩어리를 발견하는데, 가치가 약 80만프랑이었다. 그외에 여러 채색유리목걸이, 옥으로 만든 목걸이와 진주목걸이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들 은덩어리와 보석을 균등하게 나누었다. 두 군대는 각각 개략 40만프랑의 은덩어리를 가졌다. 즉 프랑스병사 1명이 각각 약 80프랑어치의 은덩어리를 나누어가지게 된 것이다." 연합군은 당연히 이것들만 약탈한 것이 아니다. 서류를 보관하는 전각에는 "안에 50센티미터길이의 정방형 그림이 많이 있었고, 모든 그림에는 주제가 쓰여 있었다. 전체 중국역사가 모두 이 일련의 그림들 속에 그려져 있었다." Montauban과 여러 군관은 함께 몇장의 그림을 가져간다. 당시 부근의 토비들도 기회를 틈타 강탈해갔다. 연합군은 이들 토비를 만나 적지 않은 재물을 다시 빼앗았다. Montauban의 기술은 그저 개략적으로 추산한 것이다. 관병들이 개인적으로 약탈한 것은 그의 시야내에 들어오지 않았고, 통계낼 수도 없었다.

 

프랑스군관 Béziat의 회고에 따르면, 7일오전 Montauban과 그의 호위부대가 원명원내로 들어가서 정찰하는 것외에 다른 프랑스군인들은 규정에 따라 원명원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군인은 금지명령을 어기고, 담장을 넘어 들어갔고, 약탈한 진주목걸이와 황금목걸이를 몸에 차고 나와서, 다른 군인들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오후에는 황궁에 침입했다. 그리고 대규모 약탈이 시작된다. 저녁에는 야음을 틈타 약탈한 진귀한 보물들을 옮겼다. 그의 묘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약탈장면이 아주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는 "군대가 이로 인하여 존엄을 잃고,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하여 명예를 잃었다"라고 적었다.

 

10월 8일은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에서 대거 약탈을 진행한 날이다. John Hart Dunne은 이 날의 경위를 전혀 감추지 않고 적었다. "이 날은 인류의 약탈파괴사에서 가장 기념할만한 날이다." "거의 12시가 되어서야 나는 미궁을 빠져나왔고, 원명원의 문앞에 도착한다. 모든 사람이 전리품을 정리하고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프랑스영지에서 프랑스군병사에게 진주와 약간의 작은 옥석을 사기 시작했다. 우리가 궁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곳은 완전한 무질서상태였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은 파괴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백년이 걸려 만든 재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우리 군내에서 허가를 받은 장교들은 매매를 했고, 담량이 큰 사람은 큰 수레를 가져왔다. 일부 사람들은 옥석장식과 화병에 집중했고, 또 어떤 사람은 법랑동기에 주목했다. 일부 사람은 자수비단과 가죽옷을 수집했다. 대부분은 그저 비단만 수집했다." 이런 광경은 읽어만 보아도 놀랍고, 참혹하다. John Hart Dunne가 묘사한 광경은 자주 인용된다. 거의 원명원대약탈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연합군이 원명원에서 약탈하는 광경을 가장 상세하게 묘사한 글은 아마도 프랑스 번역관 Maurice Irisson이 쓴 <번역관수기(翻譯官手記)>일 것이다. 이 책의 제18장 <북경진군>에는 10월 6일 저녁 프랑스군이 원명원에 도착한 내용이 쓰여 있다. 제19장 <원명원>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 원명원을 본 광경을 소개한다. 제20장 <원명원약탈>에서 작자는 이것이 "대중국전쟁이야기중에서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은 의식하고, "논쟁있는 사건"이며,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그가 약탈, 장물분배과정을 묘사한 원래 의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시의 미친 듯한 약탈현장을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영국인, 프랑스인, 장교, 사병, 모조리 원명원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중간에는 해전(海澱)의 백성들도 끼어 있었고, 우리의 쿠리(苦力)도 끼어 있었다." Montauban이 온갖 노력을 해봤지만, 그의 부대가 원명원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부대원들에게 버려진 Grant도 자신의 군용텐트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약탈현장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한 보탑내에서 당시 매카트니사절단이 청나라조정에 선물한 마차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적지 않은 금은으로 도금하고 보석을 상감한 중국의 말안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영국의 유탄포와 탄약을 발견한다. 모두 매카트니가 예전에 선물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청군이 왜 이들 무기를 '복제하여 사용해보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8일 오후, 연합군이 원명원을 떠날 때, 다시 한 궁전에서 '구금되어 있는 연합군 인질의 물품'을 발견한다. 그중에는 포병 중령 푸롱 드 그랑샹(富隆.德.格朗尙)의 군복, 회계사 아다이르(阿代爾)의 노트와 말채찍, 시크기병의 말채찍, 그리고 일부 영국장교의 물품이 있었다. 이 일은 연합군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전체 궁전을 불태워버린다. 

 

10월 9일 새벽, 연합군은 원명원을 떠난다. 약탈한 물건을 가득 싣고 길을 나선다. 프랑스군의 통역 뤼시(呂西)는 이렇게 썼다: "부대의 그 광경은 정말 이전에 전혀 없었던 일이고, 눈을 새로 뜨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미 마차가 없었다. 그래서 개략 300여량에 모두 실었다....이렇게 근 이틀을 행군하였다. 부대는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모두 흥분하여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확실히 진귀한 물품을 약탈한 즐거움으로 연합군 장병들은 득의하여 극도의 흥분상태였다.

 

하늘에 눈이 있었는지, 더 이상 그런 광경을 보지 못한 것같다. "삽시간에 날씨가 급변하더니, 10월 9일 큰 비가 내린다. 차가운 동북풍이 불어왔다. 마치 삼월 에딘버러에서 부는 광풍같았다." "차갑고 습한 날씨 속에서, 우리는 원명원을 떠났다." 연합군의 많은 사람들의 일기와 회고록에는 날씨가 급변한 것을 언급하고 어떤 징후를 느꼈다고 하였다. 군인들은 전쟁때 날씨변화에 아주 민감하다.

 

10월 10일, 내무부대신 항기(恒祺)는 Grant에게 간청하여 Parkes를 데리고 원명원을 둘러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Grant는 동의한다. 원명원이 약탈당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참혹한 광경을 보고, 항기는 한 호숫가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돌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 끝났다. 그도 죽어야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번에 원명원을 가겠다고 한 목적은 원명원 총관대신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다. 과연 호수에서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항기의 당시 심정과 상황을 이것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장교 조르주 드 크루러(喬治 德 克魯勒)이 토로한 바에 따르면, 10월 11일, 영국군은 다시 원명원으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약탈을 벌인다. "영국군은 이전에 원명원에서 약탈한 전리품에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여러명의 대오를 다시 원명원에 보내어 수색하게 했다. 영국군는 원명원에서 하루종일 약탈했다. 그들은 하나 하나가 호랑이같고 승냥이같았다. 청나라의 궁전정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북경의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동포의 복수를 하는 것인양."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을 대거 약탈한 다음날 즉 10월 8일 오후 4시, 청군이 구금했던 영국프랑스인질 8명을 풀어준다. Parkes, Henry Brougham Loch, 그리고 페이언(費恩)비정규군병사 1명, 드 라 투르(德洛圖爾, 과학시찰단의 책임자)와 4명의 프랑스병사였다. 10월 12일 다시 9명의 구금인원이 영지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8명의 페이언비정규군기병과 1명의 프랑스병사가 있었다. 그들이 제공한 단서에 따르면,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 최소한 두 사람 앤더슨(安德森)중위와 드 노만(德諾曼) 선생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유육남(劉毓楠)의 일기에는 Parkes를 석방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날 오각(午刻), 항기는 사저이 급하다는 것을 이유로 파추(巴酋, Parkes를 가리킴)를 직접 영지로 돌려보낸다. 손에는 백기(白旗) 몇 개를 들고, 권속(眷屬)을 인질로 하였다." 그중 '권속을 인질로 했다'는 부분은 영국, 프랑스 자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10월 18일, 영국군이 원명원에 불을 질러 불태워버린다.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Grant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했다: "미첼(米啓爾) 장군의 부대와 대부분의 기병이 원명원을 향하여 출발했고, 모든 건축물에 불을 질렀다. 그 광경은 장관이었다. 이 웅장한 고적이 훼멸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비문명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다만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목적은 중국인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장래 다시는 감히 유럽의 평화로운 사신을 살해하지 못하고, 다시는 국제법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확실히, 원명원을 불태운 것은 개별병사의 행동이 아니라, 영국군이 조직적으로 분노를 배출한 행위이다. 그것은 영국군 최고사령관의 허가를 받은 것이기도 했다.

 

영국군이 원명원을 불태워버리기는 행동을 하기 전에, Grant는 프랑스군에 계획을 통보한다. 그는 이렇게 영국군이 이 행동을 취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영광스럽게 귀하에게 내가 원명원을 훼멸시키려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바로 이 곳에서 우리의 인질들이 잔혹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손과 발이 3일간 묶여 있으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다음으로, 만일 우리가 청나라정부를 엄히 처벌하지 않으면, 영국인민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엄한 처벌은 영국인이 국제법이 짓밟힌 것에 대한 분개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평화를 추구하는데 만족하여 조약을 체결한 후 철군한다면, 청나라정부는 그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도 우리의 동포를 체포하고 살해할 수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측도 함께 행동해주기를 요청했다. 10월 16일 Baron Gros(葛羅)의 Elgin에 대한 회신에서는 다른 의견을 표시했다: "원명원은 그저 방어시설이 없는 시골의 명소입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그것을 훼멸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없는 복수입니다. 왜냐하면 훼멸시킨다고 하여 우리의 애탄, 생각하기도 싫은 잔혹한 운명을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유럽인이 보든 아니면 중국의 백성들이 보든, 자금성의 모든 자료를 가져가고, 이 수도의 무상권력을 대표하는 곳을 훼멸시키는 것이 원명원에 큰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끌 것입니다." 10월 17일, Montauban은 Grant에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하한 형식으로든 당신들이 취하려는 훼멸행동에 협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행동이 프랑스정부의 이익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보기에 원명원은 "10월 7일과 8일 우리의 부대와 중국인들에게 4분의 3이 훼손되었다" 원명원을 불태워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보복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국군과 함께 행동하기를 거절했다. Montauban은 그날 Gros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시 한번 같은 견해를 표시한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명확하게 원명원을 훼멸시키는 새로운 행동에 참가하기를 거절했다. 먼저, 이번 행동은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복수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공격대상은 그저 이미 부분적으로 훼손된 잔재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번 행동은 앞으로 특사와 공친왕간에 막 건립되기 시작한 관계를 파괴시킬 것이다." 영국측은 그러나 그만두지 않았다. Elgin은 Gros와 계속하여 협의했다. 10월 18일자 Gros가 Montauban에 대한 서신을 보면 쌍방이 일치된 의견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영국군이 원명원을 불태운 것은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영국인은 동맹군의 절제된 행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부대를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원명원의 남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궁전이 불타고, 사원, 진보관, 장서각도 불탔다. 화려한 장서각은 불에 타서 기왓장조차 남지 않았다." 프랑스측은 이렇게 인류문화를 훼멸시키는 것이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여겼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워버리는 행동을 취한 후, 프랑스측의 반응은 반대입장이었다. Elgin이 이 일을 Montauban장군에게 통보하자, Montauban은 Grant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령관귀하, 당신이 보낸 서신은 영광스럽게 받았습니다. 나는 당신과 이 일에 관해 논쟁을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일에 관하여 프랑스 특사 및 본인은 반대의견입니다." 프랑스특사 Baron Gros도 당일 광제사(廣濟寺)에서 이렇게 썼다: "오후 5시, 우리는 짙은 연기가 북쪽에서 피어올라 북경상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영국군이 정식으로 약탈당한 후의 원명원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아무런 의미없고 야만스러운 보복행위가 공친왕을 놀라게 만들어 그가 타타르로 도망치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는 이미 교외로 숨었습니다. 그의 마차는 물건을 가득실었고, 마필을 다 갖췄습니다. 조금만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떠날려고 할 것입니다. 이그나티예프(Nikolay Ignatyev) 장군은 북경에 온지 어느 정도 기간이 되었는데, 그에게 충분한 영향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친왕이 그런 것을 포기하도록 할 정도로." 청나라에서는 프랑스군의 태도를 알고난 후, 프랑스측에 우호적인 제스추어로 그날 즉시 2명의 관리를 Mantauban에게 보내어 9월 18일 피살된 프랑스인질을 북경의 천주교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한다. 그 묘지는 오랫동안 북경의 러시아교회가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10월 19일, "전체 원명원방향의 하늘의 절반은 원명원과 부근의 궁전에서 피어오르는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어제 제1사단을 따라 외출한 일부 병사들은 몇대의 수레에 원명원에서 수습한 법랑채동화병을 싣고 왔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우는 동시에 여전히 가치있는 물건들을 가져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악랄한 행동은 욕심이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외에 더 이상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프랑스측의 Gros와 Montauban의 불만표시에 대하여, 그리고 영국프랑스 본국의 사람들로부터의 원명원훼멸에 대한 각종 질책에 대하여, 영국특사 Elgin은 부득이 해명을 해야 했다. 10월 25일, 그는 존 루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상세하게 행동의 이유와 동기를 설명했다: "각종 방면에서 이 문제를 고려하면 제가 보기에 몇가지 방안중 가장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원명원을 불태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 책임을 포기하면서, 우리가 당한 죄행을 그냥 넘겨버리고, 실질적인 징벌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리고 우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행동이 중국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청나라황제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먼 곳에서 방관하는 사람은 이 점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청나라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처이며, 이것을 훼멸시키게 되면, 그의 위엄이 흔들릴 뿐아니라, 그의 감정도 아프게 만들 것입니다." Elgin이 보기에, "금전적으로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조정의 국고는 이미 바닥나있고, 하나의 토지,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그저 국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가 흉수를 내놓겠습니까? 당시 중국인들은 이미 하급의 몇명 관리를 처형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무고한 자들인데 희생양이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원명원을 불태워버리기로 한 것은 최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영불연합군은 원명원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각자 자신의 행위를 변명했다. Grant는 가볍게 언급했다: "영국군의 장병은 프랑스인이 원명원의 보물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약간 가져다고 괜찮겠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에게 분배된 전리품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엘긴도 약탈책임을 프랑스군에 미뤘다. "프랑스병사는 각종방법으로 그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을 훼손시키고, 옥석과 자기를 파괴했다....전쟁은 실로 나쁘다. 더 많은 것을 볼 수록 더 많이 미워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방면으로, Gros와 Montauban은 반대로 영국이 원명원을 불태워버린 거동에 대하여 명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번역관인 Irisson은 심지어 먼저 약탈한 행동에 대해서도 변호했다: "영국인들은 신뢰가 없다. 정의도 없다. 그들은 염치가 없다. 거꾸로 프랑스군대가 독자적으로 원명원으로 갔다고 질책했다. 먼저, 우리는 독자적으로 원명원에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행하는 부대에는 바틀준장이 이끄는 영국기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단지 Grant장군의 지시와 요청으로 그들의 길안내자를 따라 원명원에 도착했다. 그는 그의 부대와 길을 잃었을 뿐이다.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확실히, 영불연합군의 약탈, 원명원 훼멸소식이 구미에 전해진 후, 영국, 프랑스 본국의 인민을 포함하여 비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온다. 사후에 출판된 연합군의 문헌에서 이 일에 대하여 부득이 변명을 하고, 자신의 죄과를 희석시키려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연합군이 안정문을 점령한 후의 군사관찰과 예방조치

 

10월 9일, 영불연합군은 청나라조정에 공문을 보낸다; "이십구일 오각(13일 정오)에 병력을 이끌고 성으로 진입하겠다. 안정문으로 들어갈테니 열쇠를 준비해서 문을 열라. 그렇지 않으면 대포로 성을 공격하겠다." 이는 실제로 최후통첩이다. 10우러 13일 정오12시 청군이 요구한대로 안정문을 내준다. 연합군은 안정문을 통제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12시 5분전에 도착했다. 이때 영국군의 깃발이 이미 성벽위에서 15분이나 휘날리고 있었다. 영국군은 미리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군의 참모장 스미츠(史密茨)는 영국군에 불만을 가진다. 약정한 바에 따라, 프랑스군 101연대의 한 대대를 푸러(普熱) 대령이 이끌고 성문의 좌측에 주둔하고, 영국군은 로버트 나필(拿皮爾) 장군이 이끈느 67연대의 300명 및 100명의 인도보병을 지휘하여 성문의 우측에 주둔한다. 영불연합군은 성문과 전후 약 1킬로미터의 범위를 점령한다. 그리고 성문앞의 광장에 각각 초소를 세운다. 영불연합군이 안정문을 점령한 것은 실제로 북경성의 목을 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육남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십구일 오각, 이추(夷酋, 오랑캐두목) 위태마(韋駄馬), Elgin이 제독 게로, 바야리(巴雅里)를 이끌고 각각 병력 5,6백명을 이끌고 4차로 나누어 안정문으로 진입했다. 기병이 따르고 보명은 성루에 올라 조망하며 붉은 깃발을 세웠다. 그거에는 흰색으로 10자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서양대포를 설치했다." 그날, 영국군의 종군촬영기자 페리스 토우는 안정문 및 주위성벽의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 연합군이 안정문을 점령한 기념으로 삼았다. 

 

"13"은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이다. 그러나 연합군은 여러번 이 숫자를 만난다. Irisson은 이에 대해 아주 민감했다: "한동안 13이라는 숫자는 나의 경력에서 아주 기이한 숫자가 되었다. 9월 13일, 우리는 친왕 재항(載恒)의 서신을 받았다. 이 서신은 울 지휘관들의 경계심을 마비시켰다. 그리하여 적이 통주에 설치한 함정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우리는 13명이 중국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영국인들이 붙잡힌 숫자는 13의 2배였다. 그들은 영국인들중 13명은 살려서 돌려보내고 13명은 죽였다." 이들 숫자는 연합군에게 모종의 불길한 느낌을 갖게 했다.

 

안정문을 점령한 후, 영국 장교 스윈호(斯溫霍)가 안정문과 주변환경을 살펴보았다. 그는 안정문과 주위성벽의 건축이 특수하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시 연합군에게 예방조치를 취하도록 건의한다:

 

우리의 포병연대는 언덕길을 통과하여 몇 문의 야전대포를 성문앞까지 운반했다. 암스트롱대포의 포구는 금방 경성을 겨냥했다. 우리는 성벽에서 중국인이 설치한 몇 문의 대포를 발견했다. 그 대포는 마침 우리 포대의 위치를 겨냥하고 있다. 그중 1문의 구리대포는 약 1피트길이로 위에는 약간의 작은 장식이 있는데 만주어가 쓰여 있었다. 또 다른 대포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구리를 바깥에 덮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금속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북경의 성벽은 40피트높이이고, 성벽의 윗부분은 약 64피트너비였다. 성벽은 아래에서 위로 좁아진다. 성벽내부는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바깥은 보호성의 벽돌로 되어 있다. 우리 군은 성벽을 따라 좌우로 안정문에서 약 100야드 떨어져 있는 곳에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성벽의위로 통했고, 흙으로 포대를 만들어, 성벽에서 덕승문(德勝門)방향으로 통하느 통로를 통제했다. 이는 아주 필요한 예방조치이다. 왜냐하면 그 성문은 아직 청나라군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안정문을 점령한 후, 프랑스군은 원래의 영지에서 철수하여, 성벽에서 600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에 주둔했다. 그날 Irisson은 Montauban을 수행하고 성벽을 시찰했다. 북경의 성벽에 대하여 실제로 관측하고, 관측결과에 따라 그는 이 보루식의 성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북경의 첫번째 성벽은 14미터 높이이고, 아래층은 조석(條石) 구조이고, 위쪽은 벽돌혼합구조이다. 두번째 성벽은 13미터 높이이고, 17미터 거리를 두고 공지로 첫번째 성벽과 떨어져 있다. 이 두번째 성벽의 꼭대기는 모두 편평하게 만들어져 있어, 수레도 그 위로 통행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실 북경은 20미터 두께, 14미터 높이의 석대(石臺)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성문의 모양은 모두 보루와 같다. 성문의 꼭대기에는 3중으로 중첩된 견고한 성루가 있다. 성루의 성벽은 무수한 총구멍이 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약한 장비로는 우리가 이 벽돌혼합구조의 성벽에 구멍을 내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군 워란 폴(瓦蘭 保羅) 중령은 자세히 북경의 성벽, 옹성 및 방어공사를 관찰했다. 그는 이 성벽이 상상보다 견고하다고 느꼈다. 수비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렵다. 만일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공격했다면 승산이 그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연합군이 자신이 가진 얼마 남지 않은 탄약과 공급으로 북경성의 성벽을 함락시키려고 했다면, 그리고 성벽위에 수비병이 있었다면 북경성벽에 대한 묘사를 본다면 연합군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벽은 성밖의 한측의 외벽은 높이가 14.4미터, 성내의 한측은 높이가 13.5미터이다. 위의 도로는 지면으로부터 13미터 떨어져 있다. 양측 성벽면까지의 너비는 19.2미터이다. 이렇게 보면 양측의 외벽까지 더하면, 성벽의 총두께는 꼭대기는 20.5미터, 바닥부분은 26미터이다.

 

외벽은 도로보다 1미터가량 높다. 위에는 많은 40센티미터의 넓은 구멍이 있다. 모든 구멍들 사이는 3.4미터의 거리가 있다. 성벽위에는 돌출된 방형(方形)의 탑루가 있다. 너비는 33.6미터이고, 밖으로 13.5미터 돌출되어 있다; 200미터마다 이런 탑루가 있다. 방어측의 공격을 위한 것이다.

 

성벽의 양측벽사이의 19.2미터의 공간에는 흙을 채워놓았고, 돌과 흙의 혼합물이다. 그래서 성벽이 아주 견고하다. 

 

기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인은 원래 그들이 점령한 성벽위에 참호를 팔려고 했다. 그러나 대량의 작업을 진행했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명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만일 중국인들이 연합군에게 안정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 흙과 돌로 쌓은 성벽에 구멍을 내려면 영불연합군이 가지고 있는 모든 탄약을 스무번을 써야 했을 것이다.

 

또 다른 프랑스 장교 F. 카스노타(卡斯諾塔)도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 원명원이 약탈되고 불에타지 않았더라면, 만일 자금성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았더라면 중국정부는 계속하여 망설이면서 투항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의 말자와 탄약은 사실 아주 부족했다. 그들은 이 구름에 닿는 높이의 두께가 20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도 그러했다. 청군이 원래 의지할 수 있던 성벽은 연합군의 북경공격시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했다. 이건 유감스러운 점이다. 대고구(大沽口)에서 팔리교(八里橋)까지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워버리자, 청군의 사기는 무너져 버렸고, 청군은 겁먹은 새와 같이 전투력을 모두 상실해버리게 되었다.

 

북경에 잠시 머무는 기회를 이용하여, 연합군은 북경성벽 및 그 성내의 방어공사에 대해 근거리관찰을 하고, 군사적인 각도에서 워런 폴은 북경을 공격할 때 돌파구로 가장 좋은 곳은 서북쪽이라고 판단한다. 이곳의 성벽은 치첩(雉堞)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이 도시의 방어에서의 장점과 단점을 연구했다. 우리는 공성의 진정한 돌파구는 성북측의 서쪽변이라고 보았다. 즉 영국군 영지에서 다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거기에는 성밖의 지세때문에, 성벽에 치첩을 합쳐셔 겨우 12 내지 12.5미터높이이다. 성벽바깥은 마른 연못이 있다. 연못의 제방은 성벽에서 1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리고 성벽과 나란하다. 그러므로 최초의 엄폐물공사를 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이 공격의 유일한 약점은 아마도 그것이 팔리교와 통주성에서의 거리가 이전에 우리가 선택한 지점보다 4킬로미터정도 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백하수운(白河水運)의 종점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팔리교와 통주성에서 수운을 통하여 보급을 받아야 한다.

 

영국군 장교 조지 올굿은 북경사방의 성벽방어공사와 내성, 외성의 성벽, 성문을 연구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돌파구는 서북쪽일대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성호(城壕, 해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의 지도(지금 가진 가장 좋은 지도)에 따르면, 북경성벽의 둘레는 약 21마일이다. 북쪽성벽밖에는 원래의 성호의 흔적만을 볼 수 있다. 호구(壕溝)에는 가느다랗게 물이 흐르지만 기마는 한번에 뛰어넘을 수 있다. 동쪽 성벽밖의 성호는 좀더 그럴 듯하다. 호구도 더욱 깊고, 수면도 더욱 넓다. 작자는 다른 두 면의 성벽밖의 성호상황은 알지 못한다. 단지 서북쪽의 성호현상은 북성성벽밖과 비슷했다. 북경성벽의 상황은 괜찮았다. 최대구경의 중형대포로 포격하고 갱도를 파서 폭약을 넣어 폭파하는 것 외에 성벽에 구멍을 내기는 매우 어렵다. 성문이 만일 내감식(內嵌式)구조가 아니라면, 아마 폭약으로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통주의 성문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규모가 더욱 클 뿐이다.

 

북경성벽은 비록 견고하지만, 영국군의 마이지(麥吉)가 보기에, 국내의 반란군을 방어하는데는 효과적이겠지만, 근대화장비를 가진 연합군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안정문으로 입성했다. 왜냐함녀 그곳은 이미 우리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은 이중이다. 방어능력이 아주 강하다. 첫째 문으로 진입하면 50야드 내지 100야드에 이르는 공터가 있다. 왼쪽에는 두번째 문이 있고, 건너편의 길은 성내로 직접 통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성벽은 얼마나 대단한 대형공사인가. 다만 현대화된 무기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 무기의 공격하에 순식간에 먼지로 화할 것이다. 토목공사는 상대적으로 영향을 받기 어렵다. 다만 태평천국반군이 북경을 공격한다면 성벽은 아주 좋은 방어작용을 할 것이다.

 

또 다른 영국장교 자넷트 워슬리는 북경성벽이 높이, 두께, 벽돌구조 및 군사방어작용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한다. 그는 북경성벽의 견고성을 인정했다. 그는 지하도를 파는 방법이 아마도 공성의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과 서양의 무기장비를 비교하면서 그는 쌍방의 차이가 아주 크다고 말한다:

왜나하면 우리의 무기와 탄약은 수량의 한도가 있어, 내 생각에 이 성벽을 함락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확실히 우리는 폭약으로 보호벽을 깨트릴 수 있다. 그후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다만 충분한 무기설비가 없이 사람이 맨몸으로 기어올라간다면, 그런 방법은 내가 보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이후 우리가 정말 북경성을 공격해야 한다면, 내 생각에 이 성벽을 진지하게 조사해본 사람이라면 내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성벽아래에 구멍을 파서 통로를 만들어 이 무거운 방어공사를 통고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현대적인 군사장비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 민족은 자연히 그들의 방어공사가 충분히 여하한 적군의 공성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우리의 13,14세기의 선배들도 이 방어공사를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수백년간 중국인이 사용한 무기에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지만, 서방국가는 거의 매년 모든 공격방어무기를 개선해왔다.

 

위에서 언급한 영국과 프랑스의 장교들은 북경성벽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는 확실히 과거의 서방여행자들이나 선교사들이 보는 것과 시각이 달랐다. 만일 이전에 서방에서 북경을 방문하고 놀러온 사람들이 풍부한 사회문화내용을 남겼다면, 제2차아편전쟁때 영국,프랑스군인들이 남긴 일기, 서신, 회고록의 북경 및 그 전투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모두 군사문헌의 범주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연합군의 장병들은 완전히 군사적인 시각에서 북경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흥미를 느낀 것은 성벽의 실제높이, 두께, 그리고 군사방어능력이었다 .당연히 과거 여행자들처럼 풍경을 관광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성벽은 북경성에서 가장 견고한 방어공사이다. 연합군이 관측으로 얻은 정확한 숫자는 과거 서방에서 북경으로 왔던 선교사, 외교관 및 여행자들의 여행기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당연히 군사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 성벽의 군사방어작용을 평가할 때, 영국군은 프랑스군보다 더욱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영불연합군이 안정문을 점령한 후, 계속하여 전쟁수단으로 청나라조정을 위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뭉네, 그들은 한편으로 공성에 대하여 각종 평가를 하면서, 가능한 군사행동에 대한 예비방안도 마련했다. 한편으로 계속 압박하면서 원명원을 불태워 청나라조정을 겁박하면서, 싸우지 않고 성공을 거두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