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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114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 2023. 6. 23.
"구자탈적(九子奪嫡)"때, 왜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는 동모형제(同母兄弟)인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글: 이뢰일(李磊一) 최근 시간이 남아서 다시 한번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발생한 소위 '구자탈적'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즉, 황위를 서로차지하기 위하여 황자들간의 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나중의 옹정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사자 윤제이다. 이들중에서 한쌍의 형제가 아주 특수하다. 그것은 바로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로 동모친형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진영에 속했다. 이치대로라면 고인들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상진친형제(上陣親兄弟),.. 2023. 6. 22.
순치제(順治帝)가 사대보정대신(四大輔政大臣)을 선정한 이유는? 글: 역사고사미(歷史故事迷) 순치18년(1661년), 임종을 앞둔 순치제는 황위를 나이 겨우 8살의 황삼자(皇三子) 현엽(玄燁)에게 넘겨주기로 선택한다. 그가 바로 역사상 유명한 강희제(康熙帝)이다. 이와 동시에, 순치제는 그가 즉위할 때 만주족 종실귀족이 '보정왕(輔政王)'을 맡았던 전통을 깨트리고, 소니(索尼), 쑤커사하(蘇克薩哈), 어비룽(遏必隆), 아오바이(鰲拜)등 4명을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여, 공동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한다. 순치제가 이렇게 결정한 것은 "일조피사교(一朝被蛇咬), 십년파정승(十年怕井繩)" 한번 뱀에게 물리면, 십년간 우물밧줄도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치제는 왜 이 네 명을 보정대신으로 고른 것일까> 도르곤(多爾袞)의 권력농단은 순치제에게 너무나 큰 심리.. 2023. 3. 27.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글: 왕옥호(王鈺浩) 고륜화효공주는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막내공주이다. 만일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마도 가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후 집안이 망하면서 고독하게 13년을 살다가 죽는다. 건륭제의 일생을 보면, 수명이 길어서 재위기간도 길고, 후비(后妃)와 자녀도 많았다. 그가 12살때, 강희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보는데, 결과는 '홍복제천(洪福齊天, 하늘과 같이 큰 복을 타고났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그것때문인지, 그는 팔자가 아주 셌고, 그의 후비, 자녀는 대부분 그보다 먼저 죽는다. 십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26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65세가 되던 해 살아있는 자녀는 겨우 11명이었다. 아들중 가장 어린 황자는 열살이었고, 딸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2023. 2. 8.
옹정제(雍正帝)는 왜 구자탈적(九子奪嫡)후 반대편에 섰던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를 관대하게 처리했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떄, 강희제의 황자(皇子)들 사이에 황위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역사에서 구자탈적(九子奪嫡)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최종적으로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이 승리하여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옹정제(雍正帝)이다. 구자탈적때, 처음에는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와 황태자(皇太子, 皇二子) 윤잉(胤礽)간의 명쟁암투였고, 그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한 후, 나머지 7명의 황자들은 3개의 파로 나뉘어 황위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는 황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 그 중 황사자 윤진과 황팔자 윤사간의 투쟁이 격렬했다. 황사자의 편에 섰던 황자로는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육자(.. 2023. 1. 18.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의 원흉인 왕진(王振)은 충신인가, 간신인가?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토목보지변"은 명나라 수십년간 축적한 국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날려버린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문신, 무장,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전쟁은 명나라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는 다시 대규모로 병력을 일으켜 몽골을 공격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명나라가 수십만대군을 일으켜 몽골을 친지 겨우 25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왕진이었다. 천순(天順)원년, 명영종(明英宗)은 왕진의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주고(의관총),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 기념한다. 지금도 그 사당은 남아 있는데, 바로 베이징의 지화사(智化寺)이다. "왕진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賜王振祭葬, 立.. 2023. 1. 9.
옹정제(雍正帝)는 왜 아홉째 동생 윤당(允禟)을 죽였을까?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옹정4년(1726년) 팔월 이십칠일, '팔야당(八爺黨)'의 핵심구성원중 하나였던 윤당(胤禟, 나중에 피휘로 允禟으로 개명)은 3개월간 각종 혹형을 받은 후, 보정(保定)의 한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이 날은 마침 윤당의 마흔여섯살 생일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기일이 되어 버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옹정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그저 담담하게 "자복명주(自伏冥誅)"라고 한 마디 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윤당은 죽어 마땅했고,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아홉째 동생인 윤당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옹정제가 그를 그렇게 괴롭혔고, 죽고나서도 전혀 애석해하지 않다니. 이 모든 것은 옹정제가 즉위한 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 2022. 10. 19.
중국고대지도의 여러가지 결함들... 글: 노적(蘆笛) 필자는 라는 글에서 미국전쟁연구소가 발표한 전황소식을 번역하면서 '주석'을 하나 삽입했다: "헤르손주 드니프르강 우안(右岸)(주: 하류의 흐름에 따라 좌우로 정한다. 예를 들어, 장강중하류의 좌안(左岸)은 강북이고, 우안(右岸)은 강남이다. 드니프르강의 경우 우안은 강의 서북쪽이 된다)의 러시아군이 정식으로 국제법의 주재하에 항복협상을 하고 있다." 한 독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과거에 "강좌(江左), 강우(江右)"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몰랐는데, 위의 주석을 보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모르고 있다. 내가 주석을 단 내용은 현대 즉 서방의 규칙이고, 이는 중국고대의 강좌, 강우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만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다른 독자들도 그와 같이 서방규칙으로 고대.. 2022. 9. 21.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3.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명청시기의 중국대외정책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16-19세기 세계역사발전과정중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중국과 서방을 비교하는 거시적인 시야 속에서 관찰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비록 중국이 16세기부터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추세가 나타났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조용히 싹을 키워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봉건전통의 뿌리는 여전히 강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은 여전히 봉건국가였다. 다른 하나는 서방자본주의의 흥기 및 전세계에 걸친 식민지확장이다. 이 두 가지 기본사실은 16-19세기 중국과 서방간에 사회형태의 차이와 문화충돌의 일면이 존재하면서, 더더욱 침략과 반침략, 식민과 반식민의 일면도 존재한다. 서방식민세력을 .. 2022. 9. 8.
강희제의 가장 음험한 아들은 황사자(皇四子)가 아니라 황십사자(皇十四子)였다.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아비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知子莫若父)"는 말이 있다. 그러나 궁중에서, 부자간의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은 여전히 궤이막측하다. 예를 들어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곤경에 빠진 강희제는 죽기 전에야 비로소 몇몇 아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강남에 수재가 발생한 후, 황태자 윤잉(胤礽)은 여러 폐단을 드러내서 강희제의 불만을 산다.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쌓여가고, 마침내 열하(熱河)를 순수(巡狩)할는 도중에 폭발하게 된다. 강희제는 여러 몽골왕공들 앞에서 황태자는 병들었다고 선언하고, 황태자에게 내렸던 옥여의(玉如意)를 회수하여, 황태자를 폐위시킬 징조를 드러낸다. 북경으로 돌아올 때 황태자 윤잉은 이미 어연(御輦)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신태자를 추천하는 과정에.. 202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