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순치제)

순치제(順治帝)가 사대보정대신(四大輔政大臣)을 선정한 이유는?

중은우시 2023. 3. 27. 16:29

글: 역사고사미(歷史故事迷)

 

순치18년(1661년), 임종을 앞둔 순치제는 황위를 나이 겨우 8살의 황삼자(皇三子) 현엽(玄燁)에게 넘겨주기로 선택한다. 그가 바로 역사상 유명한 강희제(康熙帝)이다. 이와 동시에, 순치제는 그가 즉위할 때 만주족 종실귀족이 '보정왕(輔政王)'을 맡았던 전통을 깨트리고, 소니(索尼), 쑤커사하(蘇克薩哈), 어비룽(遏必隆), 아오바이(鰲拜)등 4명을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여, 공동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한다. 

 

순치제가 이렇게 결정한 것은 "일조피사교(一朝被蛇咬), 십년파정승(十年怕井繩)" 한번 뱀에게 물리면, 십년간 우물밧줄도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치제는 왜 이 네 명을 보정대신으로 고른 것일까>

 

도르곤(多爾袞)의 권력농단은 순치제에게 너무나 큰 심리적 그림자를 남겼다.

 

숭정16년(1643년),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가 돌연 붕어한다. 이전에 홍타이시는 황위계승문제에 관하여 명확히 결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홍타이시의 장남인 숙친왕(肅親王) 하오거(豪格)와 홍타이시의 동생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간에 황위를 놓고 싸움이 벌어진다. 쌍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력충돌의 위험까지 있었다. 새로 굴기하는 대청왕조로서는 거대한 위기에 빠진 것이다.

 

최종적으로 정친왕(鄭親王) 지르하랑(濟爾哈朗)이 앞장서서 주장하여, 6살이 되지 않은 홍타이시의 아홉째아들 푸린(福臨)이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역사상의 순치제이다. 그리고, 지르하랑과 도르곤이 보정왕이 되어 공동으로 조정의 업무를 처리한다. 그중 정친왕 지르하랑이 도르곤보다 서열이 앞서 제1보정왕이 된다.

그러나 금방 도르곤이 정적들을 타격하고 보복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재앙'이 닥친 것은 바로 정친왕 지르하랑이었다. 순치4년(1647년) 이월, 도르곤은 지르하랑이 저책을 지으면서 제도를 어겨 임의로 동사(銅獅), 동귀(銅龜), 동학(銅鶴)등을 사용했다는 것을 이유로 지르하랑에게 권력을 내놓고, 남하하여 전투를 지휘하도록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을 새로운 보정왕에 앉혀서 조정은 완전히 장악한다.

 

이어서, 도르곤은 양황기(兩黃旗)의 고위관료와 장령들을 분화 와해시킨다. 소니, 아오바이, 어비룽등이 모조리 탄압받고 배척당했다.

 

당연히 그의 최대정적인 하오거에 대하여도 도르곤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 하오거가 병력을 이끌고 사천을 평정하고, 장헌충을 베어 불세의 공을 세웠지만, 여전히 도르곤의 박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순치5년(1648년) 사월, 옥중에서 온갖 고생을 겪다가 죽고 만다.

 

이제 도르곤은 자신의 반대파를 모조리 제거했고, 조정에서 '일가독대(一家獨大)'하게 된다.

 

도르곤이 갈수록 권력을 농단하고 발호함에 따라, 그와 순치제간의 갈등도 점점 첨예해진다.

 

먼저, 도르곤은 이미 자신을 황권보다 위에 위치시킨다.

 

도르곤은 순치제를 겁박하여 그 자신을 '숙부섭정왕', '황숙부섭정왕', '황부섭정왕'으로 봉하게 했다. 그리고 황제의 옥새, 인신을 모조리 자신이 가져가서 보관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양백기(兩白旗)의 관려와 장령들을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때의 순치제는 철저히 허수아비가 된다.

 

다음으로, 도르곤은 아주 거칠게 순치제와 효장간의 모자간의 관계에 개입했다.

 

도르곤은 엄격하게 '후궁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제도를 만들어, '양궁태후' 즉 효단문황후와 효장문황후를 정치에서 배제시킨다. 그리고 그는 순치제와 효장간의 접촉을 극력 제한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거나 교류할 수 없었다. 이는 나중에 순치제와 효장의 모자간의 불화를 발생시키는 요소가 된다.

 

그 다음으로, 도르곤은 전면적으로 순치제를 통제한다.

 

순치제의 일상기거는 물론이고 학업에 대하여도 도르곤이 거칠게 간섭한다. 심지어 여러번 순치제를 데리고 돌연 궁을 떠나고 북경을 떠나는 일도 발생한다.

 

이런 것들은 나이어린 순치제에게 극히 불안전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동시에, 도르곤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순치7년(1650년) 십이월 초구일, 도르곤이 고북구바깥의 카라성(喀喇城)에서 사망한다. 순치제는 당시에는 압박을 받아 도르곤을 "무덕수도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道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로 봉하고, 묘호를 "청성종(淸成宗)"으로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융중한 장례식도 치러준다.

 

그러나 겨우 2달후에, 순치제는 정친왕 지르하랑등의 지지하에, 도르곤에 대한 청산에 들어간다. 순치제는 직접 "삭작(削爵, 작위를 삭탈함), 철묘향(撤廟享, 태묘에 배향되는 것을 취소함), 파종실(罷宗室, 종실자격을 박탈함), 적재산입궁(籍財産入宮, 재산을 몰수하여 궁에 넣음)"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미 매장된 도르곤의 묘를 파내어 뼈를 부수어 뿌리고, 그의 모든 일당들을 제거한다.

 

비록 도르곤은 청산되었지만, 그는 순치제에게 거대한 심리적 그림자를 남겼다. 그리하여 순치제는 임종때 여러가지 우려를 하게 된다.

 

'권신이 어린 황제를 억누르는 것'이 재연되지 않도록, 순치제는 4명의 보정대신을 선정한다.

 

순치18년(1661년), 순치제의 병이 위중했는데, 이때 순치제의 황자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차자(皇次子) 푸췐(福全)이 9살이 되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어린 아들이 황위를 승계하게 되면, 반드시 그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르곤과 같은 종실왕공이 권력을 독점하고 나아가 심리적 그림자를 남기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순치제는 황위를 그의 당형(堂兄)인 안친왕(安親王) 웨러(岳樂)에게 넘겨줄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태후 및 당시에 명망있던 독일선교사 아담샬(湯若望)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다. 아담샬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한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당연히 정국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계통이 넘어가게 되면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청세조 순치제는 눈길을 다시 자신의 아들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록 푸췐의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황삼자 현엽은 이미 천화(天花)를 겪었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는 천화를 앓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효장태후와 아담샬도 모두 현엽을 후계자로 삼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여 순치제는 최종적으로 황위를 현엽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그가 바로 역사상 강희제이다.

 

그런데, 이때 현엽의 나이는 8살이 되지 않았다. 순치제는 '권신이 어린 황제를 억누르는'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즉위했을 때의 종실왕공이 보정하는 것을 버리고, 4명의 보정대신을 임명하게 된다. 즉, 소니, 쑤커사하, 어비룽, 아오바이이다. 그중 소니가 수보대신(首輔大臣)이다. 그리고, "4명의 보신이 국사를 담당하고, 업무를 재결한 후, 들어가 태후에게 아뢰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조정국면의 균형을 이루게 만들었다.

 

당연히 순치제와 효장이 이 4명을 보정대신으로 선발한 것은 그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 이 4명은 모두 '상삼기(上三旗)' 출신이다.

 

그 중, 소니는 정황기(正黃旗) 출신이고, 어비룽과 아오바이는 상황기(鑲黃旗) 출신이다. 쑤커사하는 정백기(正白旗) 출신이다. 이때의 '상삼기'는 이미 황제가 통일적으로 관리했다. 이미 통치집단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이익에서 '상삼기'와 황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 4명은 반드시 황권의 안정을 극력 보호하려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4명은 도르곤이 집권하던 시기 및 도르곤을 청산하기를 전후하여 모두 순치제에게 절대로 충성하던 사람들이다.

 

소니, 아오바이, 어비룽은 하오거와 도르곤이 황위를 쟁탈하는 과정에서, 굳건하게 하오거의 편에 섰던 인물들이다. 순치제가 등극한 후, 설사 도르곤으로부터 여러번 탄압받고 박해받았지만, 여전히 배신하거나 투항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소니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성경(盛京)으로 쫓겨나 황릉을 지키기도 했으며, 아오바이는 3번이나 하마터면 도르곤에게 죽임을 당할 뻔앴다. 그렇지만, 그들은 물러나지 않고, 여전히 도르곤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하여 도르곤이 죽은 후, 순치제는 새로 이들 세 사람을 중용했고, 조정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된다.

 

쑤커사하는 일찌기 도르곤의 완전한 심복이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죽은 후, 그는 바로 순치제와 정친왕 지르하랑의 편에 서서, 과감하게 도르곤 및 그 일당의 각종 죄상을 고발한다. 그리하여 순치제가 도르곤집단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순치제로부터 인정받고 중용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순치제가 붕어하고, 강희제가 등극하면서, '사대보정대신'의 국면이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사대보정대신'의 모델도 아주 잘 관철되지는 못했다. 쑤커사하는 그가 이전에 '매주구영(賣主求榮)'한 행위로 인하여 조정의 많은 관리들에게 멸시당했다. 게다가 양황기와 양백기간의 역사상 갈등은 그를 다른 세 사람으로부터 배척받게 만든다. 여기에 이때의 소니는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오랫동안 휴가를 청한다. 어비룽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어 시종 아오바이의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아오바이가 권력을 독점하는 국면이 형성되게 된다.

 

소니가 사망하고, 쑤커사하가 피살되면서, 아오바이의 권력독점은 정점에 달한다. 동시에 그와 강희제간의 갈등도 철저히 격화된다. 결국 강희8년(1669년), 강희제는 '지금오배(智擒鰲拜)'를 통해 권력을 수중에 장악한다. 이렇게 하여 강희제 초기의 '4대보정'시대는 정식으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