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는 왜 구자탈적(九子奪嫡)후 반대편에 섰던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를 관대하게 처리했을까?

by 중은우시 2023. 1. 18.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떄, 강희제의 황자(皇子)들 사이에 황위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역사에서 구자탈적(九子奪嫡)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최종적으로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이 승리하여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옹정제(雍正帝)이다.

 

구자탈적때, 처음에는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와 황태자(皇太子, 皇二子) 윤잉(胤礽)간의 명쟁암투였고, 그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한 후, 나머지 7명의 황자들은 3개의 파로 나뉘어 황위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는 황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 그 중 황사자 윤진과 황팔자 윤사간의 투쟁이 격렬했다.

 

황사자의 편에 섰던 황자로는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육자(皇十六子) 윤록(胤祿), 황십칠자(皇十七子) 윤례(胤禮)가 있고, 황팔자의 편에 섰던 황자로는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가 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옛날에 그의 적수에 대하여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타격을 가하여, 작위를 박탈하고, 연금을 하여, 이들 형제들이 영원히 그와 다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만, 옹정제는 유독 황십자 윤아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기실 옹정제가 그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황십자 윤아도 나중에 비록 옹정제에 의해 연금되기는 하지만,  그와 황십사자 윤제 두 사람의 최후는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둘 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에 석방되고, 작위를 회복하여, 말년에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애신각라 윤아

옹정제가 황십사자 윤제를 연금만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 둘은 동모형제라는 점이다. 황태후(皇太后) 우야씨(烏雅氏)가 비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옹정제로서는 자신의 수족을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했고, 결국 황십사자는 연금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황십사자가 연금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은 또 무엇때문이었을까? 

 

첫째, 윤아는 배경이 강대했다. 그의 생모는 강희제가 총애한 온희귀비(溫僖貴妃) 뉴후루(鈕祜祿)씨이다.

 

뉴후루씨는 만주족의 팔대성(八大姓)중 하나로 지위도 높고 신분도 존귀했다. 온희귀비도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는 상황기(鑲黃旗) 사람으로, 그녀의 조부는 만청의 개국명장 어이두(額亦都)이다.

 

어이두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의 각부족을 통일할 때, 그를 따라 동정서전(東征西戰)하며 누르하치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그리고 만주 전통의 봉호 "바투루(巴圖魯)"에 봉해진다.

 

바투루는 전공이 있는 사람에게만 내리는 봉호이다. 이를 보면 어이두가 조정에서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어이두가 병사한 후, 홍타이시는 그의 시호를 홍의(弘毅)로 내리고,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여, 누르하치의 패위 옆에 나란히 둔다. 이는 아주 큰 영예이다.

 

누르하치의 넷째공주 무쿠스(穆庫什)가 어이두에게 시집가고 어비룽(遏必隆)을 낳는다. 어비룽은 순치제때의 의정대신(議政大臣), 태자태부(太子太傅)였다.

 

순치제가 붕어한 후, 어비룽은 소니(索尼), 쑤커사하(蘇克薩哈), 아오바이(鰲拜)와 함께 강희제의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고 태사(太師), 일등공(一等公)에 오른다.

 

어비룽은 딸 둘을 후궁으로 보냈는데, 한명이 강희제의 두번째 황후 효소인황후(孝昭仁皇后)이고, 다른 한명이 온희귀비이다. 그녀와 효소인황후는 동모소생으로, 강희제로부터 크게 예우를 받았다. 그리고 온휘귀비는 전체 청왕조를 통틀어 유일하게 시호(諡號)를 받은 귀비(貴妃)이다.

 

이처럼 강력한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옹정제로서는 윤아를 쉽게 건드리기 힘들었다. 만일 윤아를 건드린다면 뉴후루씨와의 관계도 결렬될 터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윤아는 강희제가 중시한 아들이다. 강희제가 살아있을 때, 아들들에게 작위를 내리는데 아주 엄격했다. 전공이 있으면 군왕(郡王)에 봉했지만, 나머지 황자들은 일반적으로 패륵(貝勒)에 봉했다. 황사자 윤진과 황팔자 윤사는 모두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큰 황자들이었지만, 처음에 봉호를 받을 때는 패륵이 된다.

 

그러나 아무런 성취도 없었던 윤아는 처음 받은 봉호가 군왕이었다. 이는 강희제가 그의 모친집안을 아주 중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효소인황후는 후사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강희제의 여러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 윤잉을 제외하고는 황십자 윤아의 출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적푸진(嫡福晋, 정실부인)으로 강희제가 안배한 것은 효장황태후(孝莊皇太后)의 일족인 보얼지지터씨(博爾濟吉特氏)로 우얼진가라푸군왕(烏爾錦噶喇普郡王)의 딸이었다. 그의 계푸진(繼福晋, 둘째부인)은 강희제의 첫번째 황후의 일족인 허셔리씨(赫舍里氏)로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의 조카였다.

 

이런 복잡한 관계가 있기 떄문에, 옹정제가 황십자 윤아를 심하게 처벌하면, 조정의 많은 사람들과 척을 질 수 있었다. 그래서 윤아는 연금된 후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가, 건륭제가 즉위한 후 석방되었을 뿐아니라, 보국공(輔國公)에 봉해지게 된다.

 

황팔자 윤사는 아주 처참했다. 그의 생모는 양비(良妃) 위씨(衛氏)로 원래 포의노비(包衣奴婢)였다. 다행히 그가 능력이 뛰어나 강희제의 총애를 받아 17살때 패륵에 봉해졌다. 

 

황제로 즉위한 초기에 옹정제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윤사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에 봉한다. 그러나, 옹정제의 황위가 안정되자, 즉시 각종 핑계를 잡아 그의 작위를 박탈하고 연금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만주어로 개를 의미하는 '아치나(阿其那)'로 고쳐 최대한 모욕한다.

 

마지막으로, 윤아는 강희제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아무런 성취도 없고, 그저 전형적으로 모친집안의 지위에 기대어 부귀향락을 누리는 귀공자였다. 그는 세력을 가질 만하지도 못하고, 인심을 얻지도 못해서, 옹정제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는 가택연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다만, 윤아는 목숨이 길지는 못했다. 겨우 조카 건륭제에 의해 연금이 해제되고 보국공에 봉해졌는데, 몇년이 지나지 않아, 건륙6년 죽고 만다.

 

그러나, 건륭제는 그의 각종 인척관계를 고려하여, 그를 아주 후대했다. 윤아가 사망할 때, 건륭은 패자(貝子)의 예로 후히 장례를 지내준다. 최후는 괜찮았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옹정제는 황팔자당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던 윤아를 처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