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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국11

명나라의 노왕(魯王)일맥 글: 유월(劉越) 명나라가 건립된 후, 주원장은 한고조 유방을 본받아 번왕을 두었다. 1370년 주원장의 열번째 아들인 주단(朱檀)이 태어나자, 그의 모친이 총애를 받고 있어, 두 달만에 노왕(魯王)에 봉하고, 봉지를 산동 연주(兗州)지역으로 한다. 이때부터 노왕의 세계(世係)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1. 초대 노왕: 약을 먹고 죽은 황당한 왕야 1370년은 주단이 노왕에 봉해진 첫해이다. 주원장은 사람을 곡부의 공묘로 보내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제사글에서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열번째 아들 주단을 위해 노국(魯國)을 건립하니, 그 안의 산천의 제사는 노왕이 실제로 주재한다. 아직 나이가 여려서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글을 지어 신에게 바친다. 그 글은 비록 노왕이 직접쓰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신.. 2023. 1. 30.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이후 주기옥(朱祁鈺)은 어떻게 황제로 추대되었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정통14년 칠월, 대명의 북방 변관에서 긴급한 사태보고가 올라왔다. 오이라트가 침입했다!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은 왕진(王振)의 꼬드김에 넘어가 바로 친정(親征)에 나서게 된다. 명영종은 이렇게 경솔한 결정을 한 것에 대하여 참혹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 2018. 9. 11.
무측천은 하야후에 어떻게 여생을 보냈을까? 글: 두문자(杜文子)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도 갈수록 허약해졌다. 신룡원년에 무측천은 이미 병으로 침상에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무측천의 모든 것이 귀찮아 아예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저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만이 그녀를 곁에서 .. 2018. 7. 27.
대당태자 이건성(李建成)은 정말 억울할까? 글: 완여청양(婉如淸揚) 현무문사변의 실패자로서 이건성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이건성은 후궁을 건드렸다느니, 완전히 무능한 혼용지도(昏庸之徒)라든지, 이연에게 거짓 밀고를 하는 등 어쨌은 나쁜 인간이라는 것이다. 기실 이런 말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 2018. 2. 18.
[황자쟁위술] 양차동풍술(亮借東風術) 양자입승패(養子入承牌) 주신호편 피동적으로 입적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황제에게 황위를 넘겨줄 아들이 없는 것을 보고 양자로 들어가려고 한 소인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혹은 배분도 무시하고, 혹은 권신, 훈척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하며,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명무종 주후조는 비록 .. 2015. 10. 11.
광시형(光時亨): 명나라말기 남천을 저지한 인물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송나라에 이어, 명나라도 또 하나의 '망천하(亡天下)'의 왕조가 되었다. 다만, 송나라와 명나라를 비교하면, 남송은 한세기반동안 연속되었는데, 소위 '남명'은 겨우 십여년간 잔존했을 뿐이다. 한, 당과 비교하더라도, 명나라에는 '삼국' 혹은 '남북조'의 국면이 나.. 2014. 4. 4.
대요황후(大遼皇后) 소관음(蕭觀音)의 비참한 운명 글: 화청(禾靑) 중국봉건왕조는 세습제였다. 그래서 후궁여인이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느냐 여부, 그리고 그 아들이 황위계승자인 태자가 되느냐 여부는 지극히 중요했다. 황후가 황태자가 되는 황자를 낳으면, 황후는 보좌에 안전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 비빈이라면, 승급의 기회를 갖고, .. 2014. 2. 7.
영락제의 후계경쟁에 관하여 글: 풍청등(楓晴橙) 명나라때, 엄격하게 적장자계승제를 집행하였으므로, 황위쟁탈전은 다른 왕조때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나 명나라때, 비교적 격렬한 후계자쟁탈전이라면 영락제때를 꼽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후계자다툼을 영락제 주체의 편애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정난의 .. 2013. 4. 13.
징기스칸의 후계자문제 글: 사종의(史宗義) 우리는 알고 있다. 징기스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치, 차남 차카타이, 삼남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 징기스칸이 가장 좋아한 아들은 넷째 톨루이였고, 가장 싫어한 아들은 첫째 주치였다. 그런데, 주치는 징기스칸이 사망하기 전에 먼저 병사한다. 징기스.. 2012. 8. 15.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왜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의 적수가 되지 못했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위안스카이는 재능있는 인물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 후세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쩐 인재였는가? 내재(內才)인가 외재(外才)인가? 그가 일본인과 겨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일본과 중국이 처음으로 겨룬 것은 조선문.. 2011.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