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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은 하야후에 어떻게 여생을 보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27.

글: 두문자(杜文子)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도 갈수록 허약해졌다. 신룡원년에 무측천은 이미 병으로 침상에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무측천의 모든 것이 귀찮아 아예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저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만이 그녀를 곁에서 보살펴 주었다. "정무는 대부분 장역지형제에게 맡겼다." 이렇게 되자, 만일 무측천이 죽는다면, 유조(遺詔)는 오로지 장역지, 장창종만 볼 수 있다. 만일 두 사람이 딴 생각을 품는다면, 이당황실에는 큰 타격이 된다. 그리하여 그해 정월의 어느날 저녁, 무측천의 병이 위중하고, 조정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 때, 태자 이현(李顯), 재상 장간지(張柬之)등이 정변을 일으켜, 사람을 데리고 무측천의 영선궁(迎仙宮)으로 쳐들어가서, 무측천에게 '문안인사'를 한다.


이때의 무측천은 일찌감치 어찌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여황으로서의 존엄은 그래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묻는다. 그래도 장간지의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는 무측천에게 보고한다. 장역지, 장창종이 모반을 꾀하여 태자가 대신을 이끌고 진궁하여 반역자를 체포했다고. 그리고 무측천에게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주라고 요구한다.


이미 늙은 무측천은 확실히 더 이상 몸과 마음을 피로하게 만드는 권력투쟁과 정치에 신경쓸 정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현을 감국(監國)으로 선포한다. 이당황실이 마침내 권토중래한 것이다.


신룡정변으로, 조정의 국면도 바뀌게 된다. 무측천의 무주(武周) 깃발은 끌어내려진다.


정변의 승리자인 이당황실과 정변집단은 승승장구한다. 이현은 말할 것도 없이 상징적으로 반달동안 '감국'으로 있다가 정정당당하게 황제에 오른다. 다시 당중종이 된 것이다. 이단(李旦)과 태평공주등 다른 공신들도 크게 봉상을 받는다.


무씨일족은 정변때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는다. 그저 무씨의 여러 왕들은 작위가 상징적으로 1등급씩 내려갔다. 무씨일족은 여전히 조정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정변때, 어떤 사람은 아예 이 기회에 무씨일족의 뿌리를 뽑자고 얘끼하기도 했으나, 장간지가 동의하지 않았다. 첫째는 무씨가족도 반쯤은 피해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무(李武)맹세로 쌍방의 행동을 속박해야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손해본 사람은 무측천이다. 한때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기세와 뜻이 크고 높았던 여황제는 지금 이렇게 쓸쓸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이현이 재차 등극한 다음 날, 무측천은 영선궁에서 쫓겨난다. 종실 이담(李湛)이 이끄는 우림군의 감시하에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가고, 감시당한다.


이때의 무측천에게 이미 군림천하의 광환이나 풍채는 없었다. 이전에 가무승평, 의기풍발하던 나날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이전에 자신을 즐겁게 해주었던 남총들도 죽었다. 더 이상 말년의 생활을 즐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시에 믿을만한 사람도 없어졌다. 게다가 병이 심해지면서 고통에 시달린다. 그녀의 처지는 실로 하늘에서 골짜기바닥으로 떨어지고, 일모도궁(日暮途窮)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는 여전히 "측천대성황제"였지만, 아무런 권력은 없었다. 그저 눈을 멀거니 뜨고 이현의 개혁을 지켜보아야 했다. 자신이 수십년간 힘들게 경영해온 각종제도는 순식간에 없어진다. 이것이 그녀에게 준 정신적 충격은 병마로 인한 신체적 고통보다도 컸다.


돌연 끌려내려온 무측천은 심신이 지쳤다고 할 수 있다. 마음도 재가 되었고, 뜻도 없었다. 머리를 빗고 몸을 씻지도 않아서 모습은 더욱 초췌해졌다. 더 이상 꾸미지 않게 된 무측천은 갑자기 더욱 노쇠해 보였다.


다만 다행히 이현은 그녀를 그다지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비록 이전에 무측천으로부터 핍박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대의를 잘 알고 있었고, 가족의 정도 있었고, 원칙을 지켰다. 무측천이 그 차가운 상양궁에서 혼자 있도록 하지 않고, 가끔 한번씩 찾아가서 위로하고, 위문했다.


첫째, 무측천은 비록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끌려내려와 이선으로 물러났지만, 이현은 여전히 선량하게도 그녀에게 "측천대성황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남겨두었다. 비록 이것은 그저 허위의 칭호이긴 하지만, 이렇게 두 명의 황제가 병존하는 현상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것은 이현이 무측천에게 충분한 존중을 해준 것이고, 영광스럽게 이선에 물러나게 해준 것이다. 최소한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둘째,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불문율을 만든다. 그것은 바로 10일마다 조정의 문무백관을 이끌고 무측천이 있는 상양궁으로 가는 것이다. 가서 무측천을 배알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녀가 너무 고독하고 우울해 하지 않도록. 이 점에 있어서 이현은 할만큼 한 것이다. 황제 자리를 빼앗은 후에 보복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효심을 다 했다. 황실에서 태어나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셋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현이 대권을 다시 장악한 후에 무씨일족을 탄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씨의 대표인물인 무삼사(武三思)와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그를 1품의 사공(司空)에 발탁하고, 무씨후손인 무유기(武攸曁)도 친왕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무씨삼대의 이름을 피휘하고, 글을 써서 올릴 때 범하지 말라고 명한다. 이렇게 이씨와 무씨의 관계가 너무 소원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가까워지도록 조치한다. 이것은 무측천에게는 안위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무측천은 이미 나이가 너무 많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우울하게 10개월을 보낸 후, 일대여황은 세상을 떠난다. 임종때, 그녀는 유조에서 '제호(帝號)'를 삭제하고, 이씨집안의 며느리 신분으로 이미 지하에 묻혀있는 시댁식구들을 만나겠다고 한다.


여황은 죽었지만, 풍파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측천의 매장문제를 놓고, 새로 논쟁이 벌어진다. 원래 무측천은 유조에서 당고종과 건릉에 합장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 대신은 만일 새로 능묘를 파내서 합장하면 '이비동존(以卑動尊)'(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움직이게 하다)으로 예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무씨일족의 반대를 불러온다. 한참을 싸우다가 결국 무삼사가 위후(韋后)와 상관완아(上官婉兒)를 통해 이현을 설득하여, 무측천의 유조대로 집행한다.


일대여황은 이렇게 갔다. 그저 무자비(無字碑)만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