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완여청양(婉如淸揚)
현무문사변의 실패자로서 이건성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이건성은 후궁을 건드렸다느니, 완전히 무능한 혼용지도(昏庸之徒)라든지, 이연에게 거짓 밀고를 하는 등 어쨌은 나쁜 인간이라는 것이다. 기실 이런 말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기본적인 공정함도 결핍되어 있다. 이건성은 아주 억울하다.
이건성은 능력도 있고 공헌도 있는 사람이다.
태원에서 거병한 초기에 이연(李淵)은 주도자로서 한 무리의 심복과 모신(謀臣)을 끌어들여 대사를 도모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과 사위까지 모두 이용하여 이익최대화를 꾀한다. 그는 원래 두 곳에 기지가 있었다. 첫째 기지는 태원(太原)이다. 그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이 이끌었다. 또 하나의 기지는 하동(河東)이고 주로 이건성이 책임을 졌다. 그는 이건성에게 가족을 돌보라는 명목으로 각로의 영웅호걸들과 연합하게 한다. 후방에서의 보장이 없다면 장기적인 승리는 얻을 수가 없다. 대당의 기반이 튼튼하려면 반드시 강력한 후방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 이건성은 하동을 안정시키고, 관중으로 통하는 요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널리 각로의 영웅들과 교분을 맺는다. 누구든 한가지 재주만 있다면 진정으로 대하고 교류했다. 그리하여, 하동에서 가입한 반란군의 사람은 태원에서보다 적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한 지방의 백성을 응집시켜서 장리 나라를 세우는데 강력한 역량을 축적했다. 이 공로는 적지 않다.
하동이 바교적 안정된 후, 이건성도 태원으로 간다.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중임을 맡는다. 이연이 수나라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전투는 먼저 서하(西河)에서 시작된다. 서하는 태언에서 아주 가깝고,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구(關口)이다. 이건성과 이세민 형제는 중임을 맡아, 군사력을 강화하고 신속히 서하를 탈취하기 위하여, 이건성은 항상 진지하게 인원을 배치하고 군기를 정돈하고 지형을 살피며 병사들과 동감공고(同甘共苦)했다. 그가 이렇게 준비한 결과는 바로 나타난다. 전투가 일어나자 구일만에 서하를 점령한다. 이로 인하여 이건성은 섬서공(陝西公)이 되고 좌령군대도독(左領軍大都督)에 오른다.
태자로 세워지기 전에, 이건성의 주요활동은 역시 군대에서였다. 즉 전쟁터였다. 그러나 그가 태자에 오른 후, 그의 일은 주로 이연을 보좌하여 군정대사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연이 외출할 때는 그가 감국이 되어 막후에 있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무덕3년, 이세민은 왕세충(王世充)과 전투를 벌인다. 이건성은 이때 포주(蒲州)를 지키고, 돌궐을 방어하여 이세민이 양사도(梁師都)와 돌궐의 연합공격을 받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왕세충을 토벌할 수 있게 해준다.
무덕4년, 이세민이 두건덕(竇建德)과 전투를 벌인다. 계호(稽胡)군대 수만명이 대당의 변방에서 소란을 일으킨다. 이건성은 다시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토벌한다. 찬주(贊州)에서 계호군과 만난다. 이건성은 당군을 이끌고 돌격하여 적군을 대파하고 수백명을 참살하며 10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같은 해, 이세민은 유흑달(劉黑闥)을 정벌한다. 이때 이건성은 북방의 변방을 지킨다.
무덕5년, 6년, 7년에 여러번 돌궐을 방어한다. 그리하여 대당의 초기사회의 안정과 백성생활의 안정에 큰 역할을 한다.
이건성은 황태자로서, 자연히 자주 출병하여 전투를 지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군대전공은 이세민만큼 혁혁하지는 않다. 다만, 이세민이 각방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작용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그가 돌궐을 방어하고, 후방을 안정시키고, 전선에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세민이 아무리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고 싶더라도,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절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세민의 전투에서 거둔 성공과 비교하자면 이건성은 후방에서 공헌을 했다. 이런 공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선비들을 예의로 대하고, 널리 인재를 끌어모았다. 그의 여러 모신 맹장들 중에는 위징(魏徵), 이강(李綱)등이 있는데 모두 정관시대의 명신이 된다. 그는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회유,안무정책을 쓴다. 그렇게 하여 당나라의 건립과 통일을 추진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정치적 실력은 분명히 뛰어났다. 그는 적지 않은 성취를 거둔 바 있다. 만일 그가 황제에 올랐더라면, 그가 이전에 한 행위를 보더라도, 그는 분명 대단한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역사는 모두 승리자가 쓰는 것이다. 실패자에게는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다른 사림이 어떻게 쓰던, 어떻게 전하든 그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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