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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24

조광윤: 전설상의 미복사방(微服私訪) 글: 허석림(許石林) 송나라의 재상 조보는 사는 것이 아주 곤혹스러웠다. 다른 관리들은 퇴조한 후, 편안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혹은 연회를 베풀거나, 혹은 금을 연주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가족들과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뿐아니라 만.. 2013. 4. 28.
조광윤(趙匡胤)의 어인술(馭人術) 글: 신력건(信力建)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군인들이 병권(兵權)을 잃은 것은 송태조 조광윤때부터라는 것을. 건륭2년(961년) 칠월, 송태조 조광윤은 금군 숙장(宿將)들을 연회에 초청한다. 그리고 온화한 방식으로 그들의 병권을 해제시켰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2012. 8. 15.
송태조는 왜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황위를 넘겼는가 글: 역사상나사사(歷史上那些事) 태평흥국4년(979년)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光義)는 북한(北漢)을 평정한 후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遼)나라를 정벌하러 가지만 불행히도 대패하고 만다. 그래서 조정으로 돌아온 후 북한을 평정한 공신들은 모두 작위나 상을 받지 못한다. 송태조(宋太祖.. 2012. 8. 15.
송태조 조광윤은 급사한 것이 아니다. 글: 유병광(劉秉光)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죽음은 사학계를 괴롭혀온 천년의 미스테리이다. 역대이래로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의 죽음을 후궁의 스캔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은 조광윤이 비명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즉, 하.. 2012. 1. 7.
무인황제 조광윤은 어떻게 문화왕조를 개창했는가? 글: 정계진(丁啓陣) 당대거인 모택동은 송태조 조광윤에 대하여 ‘초손풍소(稍遜風騷, 문화수준이 약간 떨어진다)’는 조롱섞인 평가를 했다. 그가 당연히 받아야할 평가인 것같다 군사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문학사가의 눈에는 띌만한 시사가부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또 다른 측.. 2011. 5. 16.
황포가신(黃袍加身): 조광윤은 훌륭한 연기자이다 글: 왕위(王偉) “황포가신”이라는 고사성어는 북송의 개국황제 조광윤(趙匡胤)에게서 유래되었다. 내용인 즉슨 이렇다: 조광윤의 부하가 그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조광윤은 황제가 되고싶어하지 않았다. 부하는 황제가 입는 황색의 곤룡포를 강제로 그에게 입혔따. 조광윤은 어.. 2011. 4. 2.
조광윤묘의 도굴에 관한 이야기 글: 예방육(倪方六) 설날이 가까워졌다. 모두 1년간 바쁘게 살았으니, 좀 쉬어야할 때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 때 쉴 수가 없다. 바로 도굴꾼이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설날에 발생하는 도굴사건이 평상시보다 훨씬 많았다. 특히 현대는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렸하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쏘아대.. 2011. 1. 26.
조광윤(趙匡胤)은 왜 장시모(長翅帽)를 발명했는가? 글: 유계흥(劉繼興) 구준 고대황제중 재미있고 총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발명가도 있다. 조광윤은 '장시모'를 발명했다. 오사모(烏紗帽)는 원래 민간에서 자주 볼 수 있던 일반적인 모자였다. 관료들이 머리에 오사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동진(東晋)때부터이다. 그러나.. 2010. 5. 23.
버림받는 송태조 조광윤묘(趙匡胤墓) 글: 장경위(張敬偉) "하남성에 문화재가 많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가 아무리 많더라도,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조광윤의 능묘를 보리밭에 버려두고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공의(鞏義)의 송릉(宋陵)을 고찰한 대학생이 내뱉은 탄식이다. 이에 대하여 매체에서 현지조사.. 2010. 4. 26.
조광윤: 가장 도량이 넓었던 황제 글: 유계흥(劉繼興) 서기927년 3월 21일, 조광윤은 낙양 협마영의 한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홍은(趙弘殷)은 일찌기, 후당, 후진, 후한, 후주 4개왕조의 금군장령을 지냈다.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하고 의표(儀表)가 비범했다. <<송사>>에서는 "용모가 웅위하고, 기.. 2009.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