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등겸용(毛鄧兼用)의 시진핑은 왜 곤경에 빠졌을까?
글: 장륜(張倫)모택동은 독재주의의 완전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고, 등소평도 권위통치의 자체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두 논리를 융합하여 활용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불륜불류(不倫不類), 진퇴실거(進退失據)의 이도 저도 아닌 곤란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계속하여 경제의 활력을 증가시켜, 자유시장경제의 이점을 누리면서, 동시에 사회를 엄격히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며, 사상을 통일하여 모택동의 천하를 호령하는 위풍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이전에 중국당국에서 가장 크게 기념한 것은 등소평탄생120주년이었다. 민간에서도 글을 실어 등소평시대를 회고하면서, 과거의 느슨한 환경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고, 조소하며, 무감각했다. 동시에 어떤..
2024. 9. 2.
시진핑의 양대호법(两大护法), 삼대금강(三大金刚), 그리고 한명의 팔부순안(八府巡按)
글: 호해(胡亥)중국의 장후시대(江胡时代, 장쩌민, 후진타오시대)의 "구룡희주(九龙戏珠,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아홉마리의 용은 9명의 정치국상위, 여의주는 권력을 의미함)", "칠룡희주(七龙戏珠)"를 얘기하면 해외여론은 그것을 집단지도체제의 상징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이를 중공이 정치체제방면에서 '진보'한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이는 장쩌민이 조직의 인원수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억누르며 대권독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구룡희주"는 집단지도체제가 아니고, 각각 자신의 업무를 책임지거나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핵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본질은 허수아비 후진타오를 집단으로 압박하며, 포위공격태세..
2024.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