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륜(張倫)
모택동은 독재주의의 완전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고, 등소평도 권위통치의 자체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두 논리를 융합하여 활용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불륜불류(不倫不類), 진퇴실거(進退失據)의 이도 저도 아닌 곤란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계속하여 경제의 활력을 증가시켜, 자유시장경제의 이점을 누리면서, 동시에 사회를 엄격히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며, 사상을 통일하여 모택동의 천하를 호령하는 위풍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중국당국에서 가장 크게 기념한 것은 등소평탄생120주년이었다. 민간에서도 글을 실어 등소평시대를 회고하면서, 과거의 느슨한 환경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고, 조소하며, 무감각했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시진핑에 대한 여러가지 소문에 열중했다; 일종의 보편적인 미망(迷茫), 무력(無力), 심지어 절망(絶望)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일부 지록위마(指鹿爲馬)나 후안무치한 '학자' 문인들이 여전히 지도자와 중국의 앞날에 대하여 찬가를 부르는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기실 잘 알고 있다. 중국이 이미 곤경에 빠졌고, 이는 최고지도자 시진핑의 집정노선이 곤경에 빠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택동은 무엇을 잘못하고, 등소평은 무엇을 잘했던가?
10여년전, 시진핑집권1년에 대한 관찰을 거쳐, 필자는 "위험한 정좌경우(政左經右) - 최근중공의 집권방향을 논한다"(2013년 9월)이라는 제목의 평론글에서 이렇게 단정한 바 있다: 만일 시진핑이 정좌경우(당시에는 시장이 정부를 압박하여, 국가는 참여하지 않아야할 영역에서 물러나고, 민영기업에 더욱 큰 자유를 주어, 상하이자유무역구를 내놓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언론을 단속하고, 헌정을 비판하고, 모택동에 대한 숭배를 추진했다)를 진행하고자 하면, 이는 단지, "그가 현대문명의 본질에 대하여 아무런 인식도 없고, 본질적으로 모택동정신의 승계자이다; 또한 그가 주도하는 개혁이 근본적으로 중국의 지금 시대의 과업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 조금 지난 후, 다시 몇편의 글에서 시진핑의 집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그는 "이모규등(以毛糾鄧, 모택동으로 등소평을 시정한다), 모등겸용(毛鄧兼用, 모택동과 등소평의 정책을 모두 쓴다), 모등호보(毛鄧互補, 모택동과 등소평의 정책을 상호 보완한다), 타통모등(打通毛鄧, 모택동과 등소평을 결합한다)"으로 일종의 "신모택동주의집정노선"을 추진하여, 최종적으로 자신의 정치노선과 역사지위를 이루고자 한다; 다만 필자는 당시에 명확히 예언한 바 있다. 이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모택동의 정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정치이다; 등소평의 노선은 사람들에게 일부의 자유를 주는 것이다; 모택동의 정치가 조성한 재난은 모두 이에 기인한다, 등소평노선의 성패는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성공한 것은 사람들이 일부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는 활발해졌다. 실패한 것은 이런 개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공민의 완전한 권리를 갖지 못했고, 권력은 감독받지 않았으며, 법치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언론은 자유가 없었으며, 부패가 창궐하고, 발전은 왜곡되었다. 그리하여 발전의 과실을 잠식당하게 된다. 만일 이런 상태를 바꾸려면, 반드시 등소평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면개혁으로 불완전개혁이 가져온 문제를 시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개혁이전의 방식으로 개혁이 가져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택동이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불완전한 자유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보완하려 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하려고 하면, 불완전한 자유로 얻은 성과마저도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다.
역대이래로, 중공의 지도자는 이전사람의 사상과 정치적 권위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려는 습관이 있다. 모택동에서 등소평까지 다시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했다.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를 도구적으로 이용하여 권력을 탈취한다. 레닌, 스탈린에게서 빌려온 현대용어, 조직방식을 이용하여 혁명, 계급투쟁, 역사규율로 본질적으로 반란이며 천하를 얻으려는 사업을 포장하고 논증했다. 민족주의사상을 섞어넣어, 홍수전이 기독교의 교리를 왜곡하여 이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종교색채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사회와 정신동원의 정신적 자원을 만든다. 모든 것은 권력탈취, 권력획득이 목적이었다. 대권을 독점한 후, 실용적인 도구주의는 상당한 부분이 일종의 독제자들이 항상 제한받지 않는 권력으로 인해 파생되는 허황된 유토피아상상으로 대체된다. 사회에 대해 모종의 급진적인 개조를 진행하고, 절대적으로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여, 하늘과 사람의 분노를 사고, 재난이 이어진다.
등소평도 모택동을 도구적으로 사용했다. 다만 이데올로기색채는 상당히 옅어진다. 사실상 모택동을 형식적으로 두었지만, 실제로는 모택동을 배신한 것이다. 단지 당과 정권의 권위를 유지하고, 독점의 합법성과 사회를 위협할 때 비로소 모택동을 다시 이용했다. "등소평이 무엇을 잘 했는가?"(주기인의 말). 기실 근본적인 답안은 그가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가 휴양생식(休養生息)할 수 있게 해주었고, 사람들에게 모조으이 자유를 주었다. 모택동식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에 관여하는 극권정치에서 후퇴하여, 사회에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장쩌민, 후진타오는 소규조수(蕭規曹隨)하여, 등소평의 발걸음을 따라 부를 쌓았고, 사회를 뒤흔들지 않았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아, 스스로의 골치거리를 줄였으며, 집권집단은 장물을 나눠가져서 모두가 좋아했다. 보통사람들은 성장단계에서 중국특색의 '낙수효과'를 누리며, 모종의 이득을 얻는다. 단지 이런 '낙수'는 각종 요소로 인하여 특히 권력귀족의 이익독점, 구조고착화, 국진민퇴, 경제실형, 효익체감에 기타 내외경제와 지연정치요소로 성장이 더뎌지고, 최종적으로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도대체 등소평이 무엇을 잘못했느냐와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 그는 모택동을 이용했고, 모택동을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았으며, 고집스럽게 보당(保黨)의 정치독점을 지속했고, 개혁은 단지 부국강병의 도구적 의미만 지닐 뿐이었고, 현대문명을 만들기 위한 개혁이 근본몬적이 되지 못했다. 공민들에게는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64사태"로 중국이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자유로운 법치국가로 발전하고, 사회계층의 이익을 조정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건설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개혁의 컨센서스는 붕괴되고, 부패가 범람하며, 도덕이 퇴락하고 이익분배의 균형이 무너지며, 국수주의의 분위기가 누적되었다...그리하여 시진핑식의 인물과 정치가 나타날 제도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등소평노선의 내재적인 결함은 등소평 자신의 정치선택은 그 자신 및 그가만들 사업의 토양과 조건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생각해보라: 중국이 정치개혁, 법치건설, 언론자유에 진전이 있었다면 어찌 시진핑의 오늘이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시진핑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등소평식개혁은 이미 착금현주(捉襟見肘,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드러난다는 것으로 곤궁함을 표현함)로 곤경에 빠졌다. 30여년간 경제성장으로 인한 신흥사회역량 및 새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기존의 등소평식 틀을 돌파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미래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자 했다; 다만 중공은 권력독점을 유지하는 각도에서, 이런 현상은 권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의 국수주의정서는 급박하게 이러한 등소평식개혁이 가져온 여러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제거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집권자가 어떤 방식으로 적폐를 해소하는지, 그리고 그런 방식이 어떤 악영향을 미치게될 지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원로가정출신으로 지금까지 권력은 자신들이 독식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홍얼다이(紅二代) 시진핑이 중공의 후게자체제에 의해, "그래도 역시 내 자식이 믿을만하다"(진운의 말)는 권력승계합리화하에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이를 통해 강산을 지키고, 새로운 홍색제국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당을 정돈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적폐를 조사하며, 사회역량을 탄압하게 된다. 문화에서부터 사회 내지 경제까지 계통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을 탄압한다. 집권 10여년동안, 핵심은 전체적으로 등소평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최근 몇년간 관방의 결의에서 시진핑을 칭찬하는 말들은 다소 이를 기조로 한다. 소위 시진핑이 "당을 구하고, 군을 구했다" "홍색강산을 유지했다"운운이 그것이다. 모두 등소평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시진핑 치하에서 몇년간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에 대하여는 "새로운 단계로 올라갔다"고 했다. 기실 이는 이전 시대의 정책과 누적된 관성으로 인한 것이며, 대체로 시진핑의 정책과는 무관한 성취였다.
원래, 시진핑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한 가지는 신생사회역량에 의지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고, 철저히 모택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의 부정해야할 부분도 부정하는 것이다. 개혁을 2.0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개혁을 심화하고, 공민에게 더욱 큰 권리를 부여하며, 이를 통해 개혁에 새로운 동력을 주입한다. 설사 한꺼번에 완성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람들에게 이런 방향감각, 일종의 희망은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여전히 활력이 있게 될 것이고, 설사 중국의 역량이 커지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우려하고, 마찰이 증가하지 않았을 것이며, 국제지연정치환경도 근본적으로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보편적가치를 나누는 길로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또 다른 선택을 한다. 모택동의 방식을 다시 꺼내서 등소평의 잘못을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 등소평의 부정해야할 부분은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변본가려(變本加厲)하여 모택동으로 급격히 회귀한다. 동시에 등소평의 부정하지 않아야할 부분 즉 시장부분은 부정해버린다. 당연히, 모택동식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사람이고, 중공체제하에서 성장되고 인격이 형성되었으며, 제도의 이점을 모두 얻어온 정치인으로서 젊을 때부터 모택동은 그들 시대의 신과 같은 우상이었고,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아버지'이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모택동의 정책을 쓰고 그의 언행을 본받고, 모택동이 남긴 제도를 지킬 가능성이 아주 크고, 논리에 부합한다. 시진핑의 사상과 정치적한계는 모택동의 교육과 정치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이데올로기화된 사고는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과 상반된다. 등소평의 이 방면의 특질은 개인의 성격이나 받은 교육외에, 일찌기 중공체제내에서 부침을 거듭한 경력과 관련이 있는 외에, 그의 전쟁연대의 경력과도 관련이 있다: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있지 않게 된다: 전쟁은 승리가 목표이다.
다만, 시진핑도 도구주의의 일면이 있다. 그는 어쨌든 등소평시대를 겪어온 사람이고, 개혁개방정책의 이익을 누린 사람이다. 그는 개혁개방이 중국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잘 알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개혁개방을 버렸을 때 중국에 닥칠 부정적인 영향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등소평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문혁을 거치면서 권력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 권력을 가지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등소평정책을 버렸을 때의 불리한 점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압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등소평식개혁이 가져다준 부정적인 문제들이다. 다만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하여는 분명한 인식이 없었다. 그는 도구적으로 모택동과 등소평을 이용했고, 자연스럽게 모택동식 독재적인 사회와 정치관리, 이데올로기 및 등소평식의 반자유개혁개방모델을 혼합시켜, 양자를 통합시켜 장점을 모두 활용하면, 모택동, 등소평에 비견될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국면을 개척할 수 있으며, 등소평모델이 만들어놓은 경제력을 기초로 하여 신모택동식이데올로기화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만, 모택동과 등소평의 통치방식은 내재적인 모순이 있다. 겸용할 수 없다. 오늘날의 세속화된 사회에 대하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생활에서 사는 것과의 다른 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개혁의 긍정적인 성과"는 누리면서, "문혁식의 관리와 이데올로기"로 돌아간다. 요 몇년간 관방문건에서 많이 써온 "A도 하면서 B도 한다"는 어법식은 시진핑의 이런 사고가 얼마나 천박하고 혼란스러운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개혁은 문혁때문에 일어났고, 개혁해야할 것은 문혁이다. 다만 그는 개혁대상인 문혁으로 개혁을 시정하려고 했고, 개혁을 새로 정의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개혁을 취소하는 것밖에 없다.
모택동은 극권주의의 완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고, 등소평도 권위통치의 자체논리가 있었다. 비록 양자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두 붕괴요소를 축적했지만, 최소한 일정한 시기동안은 정치운영논리로 작용했다. 그리고 시진핑의 웅심은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고 통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 논리에도 부합하지 않고, 논리가 없는 불륜불류, 진퇴실거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계속하여 경제의 활력을 증가시켜 자유시장의 이점을 누리려면 자유를 더욱 확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를 엄격히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사상을 통일하여, 모택동의 천하를 호령하는 위풍을 누리고자 한다. 당초 필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모등겸용, 정좌경우는 결국 내재적인 모순으로 인해 나중에는 결국 한쪽으로 쏠리게 될 것이다; 모택동으로 향하면, 정좌경좌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일종의 정치가 그렇게 내부적으로 서로 부딛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상반되고 배치되는 정책논리를 지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불가피하게 이데올로기상의 '정신분열'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0여년의 역정은 이미 이 점을 증명했다. 중공의 '이데올로기정신분열', '신사상강화(新思想僵化)'의 상황은 최근 몇년간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은 최근 몇년간 관방결의문건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진핑의 등소평탄신을 기념하는 강화를 보면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일종의 기계적이고, 조각나고, 내재적으로 모순된 사고방식과 언어가 중공의 사고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전에 있었던 생동감있는 언어는 없다. 중공이라는 방대한 몸은 날로 굳어지고, 메마르고, 마치 영혼이 사라진 것처럼, 아무런 방향도 없이 망연하게 자신의 권력에 대한 고도의 민감성외에는 외부세계 및 미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지도자가 기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뿐이다.
모택동, 등소평, 시진핑과 고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야 한다.
현재의 곤경을 타파하기 위해, 일종의 여전히 관방의 합법적인 말로 얘기하고, 이를 통해 시진핑의 정책을 비판하려는 것이건,, 아니면 진정으로 등소평의 포스트문혁시대에 개혁을 추진한 역사적 공로를 평가하려는 것이건, 사람들이 등소평을 얘기하고, 등소평을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건 그저 잠정적인 의미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의 국면이 조성된 것은 등소평자신에게 큰 책임이 있다. 등소평식모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사실상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등소평식의 "개혁은 이미 죽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미련은 없고, 미래를 더욱 많이 탐색해야 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 현재 가진 조건하에서 발걸음을 내딛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시진핑은 경제가 하락하는 압력이 커지고, 사회의 불만이 커지며, 국제환경이 악화되는 상황하에서, 다시 한번 등소평을 강조했다. "모등겸용"중의 '등'으로 잠시 돌아간 것이다. 이는 그저 미봉책이라 볼 수 있어, 절대로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시진핑이 진심으로 "모등겸용"노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허망한 강산을 영원히 이어가는 역사에서 모택동, 등소평에 비견되는 인물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등소평모델 자체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넘어서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필자가 말하는 "혁명성개혁"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중국의 제도를 다시 만들고, 공민에게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이 '혁명적개혁'의 핵심이고, 중국의 현대문명을 구축하는 길이다.
중국은 모택동을 철저히 부정하고, 등소평의 부정해야할 부분을 부정해야 한다. 여전히 모등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시진핑을 부정해야 한다. 사실상, 중국에서 시진핑에 대한 부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펑리파(彭立發)이 베이징 쓰통챠오에 "시진핑하야"를 소리친 후, 상하이 제로코로나때의 반응까지, 그리고 최근 후난 (湖南) 러우디(婁底)의 팡이룽(方藝融)의 고함까지, 모두 이 점을 증명하고, 이미 수면위로 올라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이상 개인적인 논의에 그치지 않고, 이미 공공공간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며, 광범위한 공명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2년간 계속하여 발생하는 각종 시진핑에 불리한 건강, 권력상실등의 소문은 기실 필자가 보기에 대부분은 믿기 힘든 가짜뉴스이다. 다만 이러한 가짜뉴스가 계속하여 나오고, 널리 퍼진다는 것은 진짜소식이다. 이는 사회심리와 갈망을 진실되게 반영한다. 시진핑이 하루빨리 역사무대에서 퇴출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중국의 변화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잠시 무슨 유형적인 변화역량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변혁의 에너지가 이미 축적되었고, 언젠가 팽창하여 터지게 될 것이며,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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