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천사(山川社)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돌연 북경 중남해에서 '붕어'한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겨우 38세이다. 11월 15일, 서태후가 북경고궁에서 사망한다. 향년 73세이다. 황제와 태후가 연이어 사망했는데, 시간간격이 20시간되 되지 않았다. 특히 광서제의 죽음언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켰고, 적지 않은 수수께끼를 남긴다.
현대 의학계와 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광서제가 남긴 모발, 의복의 잔류물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 비소의 존재가 검출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적으로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음이 검증되었다. 이 발견은 사학계에 큰 파란을 불러온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은 도대체 누가 광서제를 죽였을까 라는 점이다.
여러 혐의자들 중에서 특히 서태후, 이연영과 원세개의 혐의가 가장 컸다.
그러나, 만일 흉수를 이들 3명으로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서태후는 확실히 말을 듣지 않는 광서제를 제거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죽기 전에 서태후는 이미 병이 깊어서 사람을 시켜 독약을 넣을만한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설사 흉수를 서태후가 안배했더라도, 당시 서태후의 상태를 보면, 궁안에 아무도 감히 그런 리스크를 안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태후가 자신에게 이런 후환을 남길 리가 없다.
만일 흉수가 원세개라면 가능성이 더욱 낮다. 어쨌든 원세개는 광서제가 죽을 때 궁밖에 있었고, 근본적으로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이연영은 비록 서태후의 심복이지만, 광서제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서수(西狩)'기간동안, 광서제에게 깔 자리조차 없자, 이연영은 자신의 요를 광서제에게 바친다. 이 거동은 서태후가 싫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연영이 이렇게 리스크를 안아가면서 광서제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는 그가 광서제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광서제의 이연영에 대한 태도는 더욱 이 점을 증명한다. 서수에서 돌아온 후, 광서제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만일 이연영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더 고생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연영이 독을 써서 자신과 관계가 좋은 광서제를 해칠 리는 없는 것이다.
기실, 융유황후(隆裕皇后)야말로 최대의 혐의자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융유는 아명이 희자(喜子)이고, 서태후의 동생인 부도통 예허나라 계상(桂祥)의 딸이다. 그는 광서제의 외사촌누나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서태후의 곁에서 자란다. 그리고 서태후에 의해 강제로 광서제에게 시집을 갔다. 정혼과정에서, 광서제는 정혼신물을 융유에게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태후가 계속 위협하여 할 수 없이 광서제는 타협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융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동방화촉의 밤에도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고, 융유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서태후가 그녀를 광서제의 황후로 삼은 것은 자신의 친조카딸이 광서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광서제는 그녀를 경계했다. 청나라의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에 따르면, 두사람이 성혼한 후 4일째 되는 날, 광서제는 연회를 베풀어 융유의 친정사람들을 대접해야 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크게 결례를 범한다. 자신이 너무 피곤하고 정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이 혼연(婚宴)을 취소해 버린다.
혼연이 취소된 후, 광서제는 준비한 연례(宴禮)를 문무백관에게 보낸다. 융유에게 있어서 황후가 되어 광서제에게 시집간 것이 일생중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광서제가 거리를 두니 광서제에게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비록 부부이지만, 유명무실했다. 광서제가 가장 좋아한 후궁은 진비(珍妃)이다. 평소에 차가운 광서제도 진비와 만나면 웃는 얼굴이 된다. 그러다가 융유를 만나면 다시 얼굴을 굳히고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평소에 황후의 침궁에는 가는 적이 없다. 어느 날 아침, 융유가 광서에게 문안인사를 하는데, 광서제는 평소처럼 그녀에게 물러가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던 그녀는 못들은 척하고 오히려 진비를 노려본다.
광서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융유의 머리에서 비녀를 하나 뽑아서 바닥에 집어던져 부숴버린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원한을 품은 융유는 서태후에게 이를 알린다. 그리고 진비가 비로서 황후인 자신에게 불경한다고 무고한다. 서태후는 그 자리에서 진비에게 곤장을 때리게 하고, 진비의 지위를 귀인(貴人)으로 격하시킨다.
진비가 모욕을 당한 후, 융유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진비의 앞으로 걸어가서 뺨을 한때 때린다. "사람을 때리더라도 얼굴은 때리지 말라"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러나 융유의 행동을 광서제는 다 보고 있었다. 그후 광서제의 융유에 대한 태도는 더욱 나빠진다. 오랫동안 서태후의 곁에 있다보니, 융유도 심기가 깊어진다.
자신은 유명무실한 혼인으로, 후궁들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곁에는 심복궁녀조차 하나도 없다. 궁녀들은 모두 융유가 마구잡이로 화풀이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경원시한다. 융유는 궁녀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걸핏하면 궁녀들을 때리고 욕했다.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온 융유는 마음이 점점 변태적으로 바뀐다. 그녀가 기르는 고양이는 2주도 되지 않아 융유의 손에 죽는다. 목을 졸라 죽이지 않으면 발로 밟아 죽였다.
궁중의 여인은 아주 적막하다. 그래서 궁녀들은 작은 동물에게 마음을 의탁한다. 융유의 고양이학대행위는 그녀로 하여금 더욱 인심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궁녀들은 모두 이 여자는 마음이 악독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서태후의 병이 깊어진 후, 궁중의 대소사는 모두 융유가 처리했다. 융유는 궁중의 사무를 처리하는데는 능력이 있었다. 서태후와 같은 기풍이 있었다.
서태후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만일 광서제가 죽지 않으면, 서태후가 죽은 후에 더 이상 융유는 기댈 곳이 없어진다. 대권을 잡은 광서제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분명히 융유를 폐위시켜 진비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일 것이다. 이 결과는 모두 예상가능했다. 융유는 아주 총명했고, 자신의 최후를 의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광서제를 죽이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야 자신이 서태후처럼 대권을 독점할 수 있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광서제가 연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융유만이 여러 겹의 감시하에서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어의가 황제에게 올린 탕약도 모두 융유가 검사한 후에 비로소 광서제에게 올릴 수 있었다. 광서제는 비록 몸이 약했지만, 매일 정상적으로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어찌 하루아침이 급사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광서제는 서태후가 내린 요구르트를 먹고 독살당한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어의가 끓인 약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어찌되었던 이런 물건은 융유의 손을 거쳤다. 그래서 그녀의 혐의가 가장 큰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광서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0) | 2021.09.16 |
---|---|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0) | 2020.01.16 |
영대수도(瀛臺囚徒):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0) | 2014.11.20 |
광서제의 연금생활은 어떠했는가? (0) | 2013.06.10 |
광서제: 황제의 무릎 (0) | 2012.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