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근대사표차(近代史飆車)
부의가 황궁을 떠나기 전의 준비
1945년 8월 9일 오전,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는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의 황궁 동덕전(同德殿)에서 소련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를 "알현"하며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은 관동군사령관(關東軍司令官)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참모장 하타 히토사부로(秦彦三郞) 중장과 "황제어용괘(皇帝御用掛)"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 중장이었다. 3명은 직접 부의에게 북만주를 지켜낼 수 없다고 알리고, 그에게 즉시 통화(通化) 임강(臨江)에 있는 대율자구(大栗子溝)로 가서 산속에서 계속 만주국을 "통치"해야한다고 말한다. 신경의 궁전, 관아는 모두 불태워버릴 예정이었다.
이때의 부의는 이미 나이가 불혹(40)에 이르렀고, 경험도 많았으며, 침착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즉시 옮겨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3일의 준비시간을 달라고 요구한다.
부의가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은 먼저 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황후 완용(婉容), 귀인 이옥금(李玉琴)등 황실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데려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친동생 부걸(溥傑)이다. 부의의 눈에 부걸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처를 취했으며, 일본이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를 곁에 데리고 있으면 자신은 훨씬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만주국의 대신들 중에서 누구를 데려가고 누구를 남겨둘 것인지는 부의가 고민한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일찌감치 결정해 놓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어떤 물건을 가져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3일의 시간동안 부의의 가장 중요한 일은 가지고 갈 재산을 고르는 것이었다. 금은, 골동, 서화등 돈나가는 것이면서 휴대하기 간편한 물건이 최우선대상이다. 부의가 직접 고르고, 포장을 감독했다. 나머지 일상복, 예복, 이불과 요, 용구도 차례로 상자에 넣는다. 부의가 일본을 방문하여 각지를 순시한 영화필름은 나중에 그의 죄증이 될 수 있어서 사람을 시켜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부의는 한편으로 짐을 싸면서, 다른 한편으로 돈을 주고 시종, 일꾼들을 내보냈다. 원래 조용했던 황궁의 안팎은 혼란에 빠진다.
8월 11일 21시 10분, 부의는 13년여간 생활했던 황궁을 떠나, 기차를 타고 길림(吉林), 매하구(梅河口), 통화(通化)를 거쳐 8월 13일 임강현(臨江縣)의 대율자구로 간다. 거기에서 철광회사 광장(礦長)의 사택에 입주한다.
부의의 이 여행에 대한 기억은 오직 배고픔이었다. 그는 이틀동안 단지 2끼의 식사와 쿠키 약간을 먹었을 뿐이다.
만주군: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이 "유일한 좋은 방법"이었다.
8월 9일 새벽, 소련 극동홍기제1집단군이 국경선을 넘어, 흑룡강 밀산(密山)의 일본군 보루를 공격한다. 이와 동시에 소련군은 각 요새, 현시(縣市)를 폭격하고, 3개의 방향으로 동북에 진입한다. 11개 군관구로 편제된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지휘하에 응전에 나선다.
만주군중 일본인에 충성하는 매국노도 있었고, 일본식민통치에 분통을 느끼는 관병도 있었다. 일본군의 궤멸과 더불어 일찌기 맹세를 소리높여 외치던 만주국장교들은 부의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며 전쟁터에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총구를 일본군에 향했다.
만주국 제10군관구 사령부는 하이라얼(海拉爾)에 설립되어 있었고, 휘하에 2개의 기병단, 1개의 보병단 합계 약 2천명이 있었다. 8월 9일 새벽, 군관구 참모장 정주르자부(正珠爾扎布) 소장은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어보니, 10여대의 폭격기가 남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소련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바로 느낀다.
장주르자부는 어려서부터 일본낭인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에게 길러졌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군에 들어가 장군이 되었다. 그는 몽골족이고, 현지의 영향력은 군관구사령관 곽문림(郭文林)보다 컸다. 일본인들이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청년장군이지만, 소련군이 공격하는 것을 보자 1차적 반응은 항복을 준비한 것이었다.
정주르자부는 당시 이렇게 생각한다: "태평양전장에서 일본군대는 계속 패퇴하고 있다. 곧 끝장날 것이다. 일본이 패배하면, 만주국도 바로 무너진다. 만일 국민당이 동북을 수복하면, 나의 최후는 체포되거나 처형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소련홍군이 동북으로 진격해 들어온 것은 나에게 있어서 항복할 아주 좋은 기회이다. 나는 소련군에 투항하고, 소련을 도와 일본을 격패시킴으로써 공을 세워 이전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나의 죄책을 감경받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결심을 내리자, 부근 일본주둔군으로부터 소련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정주르자부는 즉시 자신의 계획을 시행한다. 그는 곽문림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우리 투항을 준비합시다. 먼저 일본계 장교는 모조리 죽여버립시다." 곽문림도 동의한다.
이들은 사전 계획에 따라 8월 11일, 만주국 제11군관구의 부대를 집합시킨 후, 일부 장교들이 돌연 총을 발사하여 29명의 일본계 장교를 죽여버린다. 그후 곽문림, 정주르자부는 전체 군대를 이끌고 만주국의 휘장, 견장, 계급장을 떼어내고, "흥몽한제1로군(興蒙漢第一路軍)"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소련군에 투항한다.
부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만주국은 말일을 향하다
소련군이 국경을 밀고 들어오고, 부의는 도망쳤으며, 만주군은 투항했다. 신경, 길림, 심양(瀋陽), 하르빈(哈爾濱)등의 도시에서는 대량의 시민, 학생들이 동원되어 참호를 파고, 방공동을 준비하며, 소방훈련을 실시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헌병과 만주국 특고경찰(特高警察)이 대거 출동하여, 사방에서 적대행위를 하는 외국인과 항일혐의가 있는 중국인을 체포하여 "전시유해분자"로 감옥에 가둔다. 하르빈등지에서 생활하던 소련인은 이때 모두 감옥에 갇힌다.
관동군사령부, 만철본사의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관동주나 조선으로 가는 우선권을 얻는다. 8월 12일부터, 각지의 기차역 플랫폼에는 짐이 가득했고, 부녀들이 아이를 데리고 기차에 올랐다. 소식을 들은 다른 일본인들도 급히 기차역으로 갔지만, 경계를 맡고 있던 헌병들은 승차를 허락하지 않았다. "장춘의 일반 일본국적 시민은 할 수 없이 기차가 떠나는 것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관동군은 확실히 일반 일본교민들은 신경쓰지도 않았다." 일본의 작가 모리 쇼죠(森正藏)는 이렇게 적었다.
동북각지에서 농촌에 거주하던 일본개척단은 마을을 떠나 주둔군에 합류한다. 도중에 어떤 개척단은 중국마을을 습격하여 양식을 강탈했고, 어떤 사람은 기습을 받고 총탄과 양식이 떨어진 절망적인 상황하에 자살을 했다.
8월 14일 만주국 총무청장관(總務廳長官) 다케베 로쿠죠(武部六藏)는 신경에서 각부 차장, 특수회사책임자를 불러 회의를 연다. 그는 다음 날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음 날부터 각 관청은 업무를 중단하고, 인원을 해산하며, 나머지 사무는 관동군이 책임지도록 명령한다.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무조건항복을 선언한다.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모든 일본인점령지에 방송되었다.
관동군은 이미 투항을 결정했다. 이제 만주국은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관동군의 조치로 8월 17일 요시오카 야스나오와 장경혜(張景惠)가 부의를 알현하고, 퇴위조서를 내민다. 부의는 이 모든 것이 관동군의 조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허수아비로서 할 일은 해야 했다. 17일 밤에서 18일 새벽까지 그는 목각인형처럼 황제의 대원수복을 입고, 대율자구의 작은 방에서 퇴위조서를 읽는다. 이를 통해 만주국이라는 '정권'을 소멸시키는 절차를 완성한다.
퇴위후에 부의는 처첩과 여동생들을 대율자구에 남겨두고, 부걸과 두 명의 매부(妹夫), 3명의 조카, 1명의 의사, 1명의 시종만을 데리고 관동군의 호위하에 심양으로 가서, 일본으로 도망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소련군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부의등은 포로로 잡힌다.
얼마 후, 부의등은 소련으로 보내어진다.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한 것은 장경혜등 만주국대신들과 관동군의 야마다 오토조, 하타 히토사부로등 관병들이 있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부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의(溥儀)가 자금성(紫金城)에서 쫓겨날 때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을까? (5) | 2024.10.18 |
---|---|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죽음 (1) | 2023.03.03 |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허수아비황제의 비참했던 동년시절 (0) | 2020.07.03 |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7명 여동생 (0) | 2019.05.15 |
사진자료: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장면 (0) | 2019.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