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경만보(重慶晩報)
사천(四川) 팽산(彭山)이 유비묘(劉備墓)가 현지의 연화촌(蓮花村)에 있다고 주장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그럼, 유비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성도설(成都說), 봉절설(奉節說)과 팽산설(彭山說)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봉절유비묘의 10가지 증거
- 봉절에서 성도까지는 과거에 걸어갈 때 1달 6일이 걸렸다. 유비는 사월 이십사일에 사망하였는데, 봉절에서 성도까지 데려가려면 방부처리를 해야 한다. 오월에 관을 성도까지 옮기려면 산길을 통해서 가야하는데,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 봉절에 감부인묘(甘夫人墓)가 있다. 이는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는 증거이다. 제갈량의 상소문에 따르면, "소열황후(유비의 감부인을 가리킴)는 대행황제(大行皇帝, 사망한 전임황제라는 의미임)와 합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청하고, 황제는 그렇게 하도록 했다."
- 감부인묘의 서쪽에 의형제 장비(張飛)의 묘가 있어, 예속(禮俗)에 부합하지 않는다.
- 감부인의 묘지 일대는 늪이 아래로 내려앉아 있는데, 아래의 공동(空洞)으로 지세가 침강했다고 보인다.
- 명나라때 이경문(李景文)의 "소열황후묘비제기"를 보면 유비묘와 감부인묘는 같은 곳에 있다.
- 해방후 여러 시공과정에서 묘도처럼 보이는 동굴이 전 현정부 방향으로 향한다.
- 허우(許尤)가 등을 켜서 유비를 모신다는 전설이 있다.
- 노인의 말에 따르면 직접 부아문(府衙門) 지하에 삼백여보의 사다리를 내려가보았다고 한다.
- 제갈량은 성동격서에 능하였으며, 당시의 상황을 보면, 진짜 묘는 봉절에 두고, 성도에는 가짜 묘를 두었을 것이다.
- 송나라때 학사 임연(任淵)은 성도의 혜릉(惠陵)이 의관묘(衣冠墓)라고 했다.
사지(史誌)의 결손으로 성도의 유비묘가 정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중경삼국문화연구회 비서장 자조꾸이린(趙貴林)에 따르면, 유비묘에 대한 성도설, 봉절설과 팽산설중에서 현재 성도설이 약간 우세를 점하고 있다. 다만 당초 사지의 기록이 모호하고 결손되어 있어, 성도설은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삼설이 정립된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그 중에서 주로 성도설과 중경설이 대립하고 있다.
유비는 자가 현덕(玄德)이고, 지금의 하북 탁주(涿州) 사람이고, 161년에 태어났다. 221년, 유비는 성도에 촉한정권을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동오를 공격한다. 다음 해 호북 의창에서 참패하고, 지금의 봉절현으로 물러난다. 223년 이월, 승상 제갈량은 성도에서 영안(永安, 봉절)로 갔고, 유비는 병이 위독하여 백제성에서 승상 제갈량에게 자식을 부탁한다. 여름 사월 계사일(24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사망한다.
<삼국지.촉지.선주전>에는 "오월, 재궁(梓宮)이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온다. 시호는 소열황제라 한다. 가을 팔월, 혜릉에 안장한다." 혜릉은 바로 유비묘이고,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인 무후사(武侯祠)내 제갈량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지>는 이십사사중 유명한 "전사사(前四史)"중 하나이고, 촉한멸망후 30년만에 당시 촉의 사관이었던 진수(陳壽)가 편찬했다.
그러므로, 유비의 혜릉에 대하여는 논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찌기 남송 소흥연간에 유비묘를 보수할 때, 학사 임연이 <중수선주묘기>를 써서 명확히 말한다: "성도의 남쪽 3리쯤 되는 곳에, 구릉이 높아 혜릉이라고 하는데, 실은 소열황제의 궁검(弓劍)이 소장된 곳이다." 명나라때 장시철(張時徹)은 <제갈무후사당비기>에서 임연의 주장에 동의한다. 근 천년동안, "궁검설"은 혜릉이 유비의 의관총이지, 진짜묘는 아니라고 일깨워주었다.
자우꾸이린은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여러 문헌기록을 보면, 당시 정부가 거행한 각종 제사는 모두 혜릉이 의관총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당시에는 문을 열어 묘실을 드나들었다. 사천에서는 도굴이 성행하였는데, 국내외에서 한번도 유비묘에서 유출되었다는 문물이 나온 적이 없다. 그는 지금 여러 설이 병존하는데, 주로 <삼국지>의 기록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모호하며, 그중 여러 의문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시신운송과정, 매장장면등. 자우꾸이린은 당시 촉국은 관련기록을 남기지 않았는데, 촉이 망한 후 수십년이 지나서, 진수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소문으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곽말약의 말 한마디로 봉절유비묘가 돌연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성도 무후사의 유비묘가 의관총일 것이라는 주장이 근 천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지만, 중국 사학계의 태두인 곽말약(郭沫若)이 이에 관심을 가질 때까지는, 성도유비묘가 유일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봉절현 정협문사자료판공실의 리쥔젠(李君鑒)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1961년 9월 14일, 곽말약이 봉절을 지나면서, 봉절에 이틀간 머문다. 당시 그를 접대한 인원에 따르면, 곽말약은 성도의 혜릉이 유비의 진짜 묘가 아니라고 의심했고, 유비묘가 어디에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증했다. 곽말약은 당시에 유비는 기온이 높은 여름에 사망하였고,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봉절에서 성도까지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최소한 30일이 걸릴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의 기술여건에 따르면, 시신은 분명 부패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유비가 가까운 봉절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당시는 학술분위기가 약했고, 곽말약의 의문제시는 학계에 그다지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다. 1978년을 전후하여, 중국역사박물관의 관원에서 백제성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 위안런린(袁仁林)은 고증을 통해, <유비묘고>를 쓰면서 10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백제성의 문화재관리소에서 근무하던 리쥔젠은 위안런린을 위해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여, 처음으로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는 설을 내놓는다. 그후 위안런린은 3차례에 걸쳐 안휘저현(滁縣)문물보호연구소, 사천성지광국남강수문지리공정지질대에 요청하여 탐색하고, 묘도, 갱조(坑漕)등 시설을 발견한다.
수십년간 논쟁을 벌였지만, 성도와 봉절은 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 팽산에 유비묘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리쥔젠에 따르면, 유비묘에 대해 성도설과 봉절설이 수십년간 대치하며 다투어 오고 있었는데, 일찌기 싸움에서 배제되었던 팽산이 다시 논쟁에 가담한 것이라고 본다.
1986년 1월 23일, 리쥔젠이 초안한 봉문발(1986)2호문건으로 현정부에 보고하여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유비묘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사천공인일보>의 기자가 입수하여 "유비의 진짜 묘는 아마도 봉절에 있을 것이다"라는 보도를 한다. 이는 처음으로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는 설을 국내외 언론에 알린 것이다. 리쥔젠에 따르면, 이 글이 실린 후, 전국각지의 유씨일족은 족보를 보내왔고, 이를 통해 유비가 봉절에 묻혔다는 것을 방증하고자 했다.
1986년 7월 24일, 삼국사전문가이며 성도시무후사박물관 부관장인 탄량샤오(譚良嘯) 일행 5명은 봉절에서 좌담회를 연다. 같은 해 9월 4일, 탄량샤오는 <성도만보>에 글을 실어, 사료와 실증증거가 없는 한 사람들에게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고 공표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후 <여유천부>에는 "유비는 도대체 어디에 묻혔는가"라는 글이 실린다.
1987년 4월 2일, 리쥔젠은 언론에 <사천에서 유비의 족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때 처음으로 감부인묘를 조사한 상황이 공개된다. 의도는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더 많은 <유씨족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유비묘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의도였다. 그후 탄량샤오는 다시 한번 <사천문물>에 <유비묘진위고변>이라는 글을 실어, 유비묘가 봉절에 있다는 설에 반박한다. 동시에 성도의 여러 전문가들이 유비묘는 성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는 또한 이런 주장까지 펼쳤다: "궁검(弓劍)"이라는 말은 유비의 시신을 가리킨다. "궁"은 원래 헌원황제가 사용한 "오호궁(烏號弓)"을 가리키고, "검"은 유씨의 황권을 상징하는 "참사검(斬蛇劍)"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1991년, 봉절지명판공실 부편심(副編審) 천젠(陳劍)이 글을 실어, 유씨족보에는 유비의 진짜 묘가 기주부서화원(夔州府署花園)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1994년 3월 23일, 성도매체에서 <팽산현 연화촌에서 발견된 특별히 큰 석묘가 유비묘인지에 대한 고증>을 싣는다. 같은 해 6월, 발굴확인을 거쳐 이 묘는 명나라때 묘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팽산설은 근거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후 CCTV에서 TV드라마 <삼국연의>를 방송하면서, 국내외에서 "삼국붐"이 일어난다. 유비묘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지도 논쟁의 촛점이 된다. 그리하여 중국과학원의 전문가들까지 나서서 봉절에 자료를 요구하며 확인하고자 했다.
1997년 장강의 물길이 바뀌면서 봉절고성이 물에 잠기게 된다. 국내외에서는 이를 기화로 유비묘의 수수께끼를 풀어보자는 의견이 나온다. 1998년 5월 28일에서 30일까지, 봉절현정부, 사천삼국연의학회, 중경시삼협문화보호촉진회가 공동으로 "봉절삼국문화세미나"를 개최한다. 양파의 대표인물들이 초청받아 참석한다. 쌍방은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했고,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한다. 성도혜릉, 봉절유비묘는 모두 출토문물이 없고, 실물증거가 없다보니, 양설이 모두 잠시 성립될 수 있었다.
그후, <사천문물> 제6기에 글이 실려, 다시 한번 성도혜릉이 유비묘라는 사료기록을 싣는 외에 봉절에서 "삼국문화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역사명인을 빌려 지명도를 높이고 관광수입을 올리려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후 성도설, 봉절설의 대표인물들이 서로 왕래하며 토론하였지만 지금까지도 각자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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