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장고사(成長故事)
인민해방군역사상, 하나의 특수한 집단이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혁명에 투신하였고, 당내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었지만, 나중에 지위는 크게 낮아진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이들 장령들이 혁명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거나, 병이 들었거나, 노선착오문제를 범했기 때문이다.
장정(長征)도중 장국도는 '분열주의'를 시도했고, 3명의 장령이 장국도를 지지한다. 그 세 명은 각각 진창호(陳昌浩), 하장공(何長工)과 나병휘(羅炳輝)이다.
태도가 가장 확고했던 사람은 진창호이다. 진창호는 홍군내부의 중량급인물이고, 허세우(許世友), 진석련(陳錫聯)과 서해동(徐海東)이 모두 진창호의 부하들이었다.
진창호는 모스크바유학경력이 있을 뿐아니라, 풍부한 실전전투경험도 가지고 있었으며, 업무능력도 매우 강해, 홍군내에서 경력이 가장 많은 인물중 하나였다.
악예환(鄂豫皖)근거지를 창립할 때부터 시작하여, 진창호와 서향전(徐向前)은 장국도와 함께 일했다. 나중에 오랫동안 홍4방면군의 정위(政委)를 맡는다.
장국도가 '당중앙분열'을 시도할 때, 진창호는 선명하게 장국도를 지지한다. 장문천(張聞天)이 여러번 말렸지만, 진창호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만일 주덕(朱德) 총사령관과 서향전이 확고하게 싸우지 않았더라면, 진창호는 아마도 만겁불복의 지경에 처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중앙은 최종적으로 진창호를 용서한다.
장정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창호와 서향전은 서정(西征)과정에서 대패하고 돌아와, 당중앙은 소련으로 보내 일하게 한다. 그는 거기에서 십년이나 일하게 된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진창호는 번역국에서 일을 한다. 십년호겁(문혁)이 시작될 때, 진창호는 비투(批鬪)를 당하면서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최후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사람은 하장공이다. 하장공은 한때 모주석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1922년에 입당했고, 모주석을 따라 추수기의(秋收起義)를 일으킨다.
하장공의 최대 공적은 바로 정강산 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한 것이다. 일찌기, 모주석이 주덕 총사령관의 부대를 찾도록 그를 보냈고, 그는 주모회사(朱毛會師)에 두드러진 공헌을 세운다.
준의회의이후 하장공은 홍9단 정위를 맡아, 중앙홍군의 주력행동을 측익에서 엄호하는 것을 책임진다. 이건 하장공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국도가 '당중앙분열'을 시도하기 전날, 하장공은 장국도에게 회유되어, 한때 장국도의 명을 받는다. 그 결과 그는 모주석의 신임을 잃게 된다.
그후의 혁명전쟁에서, 하장공은 군대를 떠났고, 더 이상 중요한 직무를 맡지 않는다.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한다. 그는 일찌기 항일군정대학 교장직을 맡았었다.
건국이후, 하장공은 공업부 부부장에 임명된다. 역사의 새로운 시기에 하장공은 전국위원회 부주석이 되어, 부국급의 허직(虛銜)을 얻는다.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젊어서 죽은 나병휘도 마찬가지로 장국도를 지지했다. 나병휘도 경력이 많은 홍군이다. 모주석은 그에 대하여 일생동안 진리를 추구하는 기의장군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나병휘는 원래 전군(滇軍, 운남)장령이었는데, 나중에 주덕의 영향을 받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감서(贑西)무장기의에 참가한다. 그는 중국공산당내부에서 저명한 군사가였다.
1930년 장정회의부터 나병휘는 홍9단 단장직을 맡는다. 장정도중, 나병휘와 하장공은 짝을 이루어 홍9군단의 단독행동을 이끈다.
장국도가 하장공을 회유할 때, 나병휘도 가담한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잘못을 깨닫고 순조롭게 섬북(陝北)에 도착하여, 홍군주력과 회합한다.
이 경력으로 인하여 나병휘는 홍군에서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항전발발초기에는 신4군으로 보내어저 제1지대 부사령관이 된다.
해방전쟁이 발발한 첫해에, 나병휘는 심뇌혈관질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49세이다. 비록 나병휘가 잘못을 범한 적은 있지만, 모주석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주은래도 그를 가장 우수한 지휘관중 한명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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