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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모택민(毛澤民)의 죽음......

by 중은우시 2025. 3. 26.

글: 임휘(林輝)

민국시기 신강(新疆)에는 "신강왕(新疆王)"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성세재(盛世才)이다. 그는 일찌기 봉계(奉係) 장군으로 장작림(張作霖)의 부하인 곽송령(郭松齡)의 휘하에 있던 군관(軍官)이었다. 그는 곽송령부인의 양녀인 구육방(邱毓芳)을 처로 취했기 때문에, 더욱 곽송령의 신임을 받는다. 곽송령의 추천으로, 장작림은 그를 일본육군대학에 공비유학(公費留學)보내준다.

나중에, 곽송령이 거병하여 장작림을 배반한 후, 성세재도 명을 받고 귀국하여 참전한다. 군사반란은 금방 평정되었지만, 장작림은 분노하여 성세재의 공비유학자격을 박탈한다. 그러나 성세재는 다른 사람의 자금후원으로 다시 2년을 더 공부했다.

1927년 성세재는 귀국하여, 국군에 들어가 전후로 참모, 교관등을 맡는다. 그후 신강군벌 김수인(金樹仁)에게 의탁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다. 1933년 신강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김수인이 쫓겨난다. 성세재는 그 기회를 잡아 권력을 장악한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성세재는 여러 차례 소련에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취하며, 자신은 학생시대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했으며, 신강에 당지부를 성립하고 싶다는 뜻을 표시한다.

소련공산당 지도자는 당연히 이웃한 신강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이 세워지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성세재의 신강에서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 대한 신임을 표시했다. 다만, 그와 남경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잠시 신강에서 공산주의를 시행하지 말도록 권한다.

그후, 소련의 지지하에, 성세재는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신강의 최고군사지도자가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1934년 3월,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던 국민정부는 성세재를 신강성변방독판(新疆省邊防督辦)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그에게 육군중장에 상장(上將)계급을 추가한다. 그의 부인 구육방도 '신강의 송미령'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강의 이리(伊犁) 터크쓰(特克斯)현성의 팔괘성(八卦城) 배치는 처음에 구육방의 부친인 구종준(邱宗浚, 당시 이리 둔간사(屯墾使) 겸 수비사령(守備司令)을 맡고 있었다)에서 계획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성세재 치하의 신강은 비록 완전히 중화민국정부의 통제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가까운 듯 멀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정부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게양하는 것을 거절하고, 성세재정권의 "육강성기(六角星旗)"를 게양했다. 그러나, 성세재는 민국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소련에 의탁하고자 했다. 그가 진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는지 아니면 소련인이 더욱 좋은 배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공당사에 따르면, 1938년, 성세재는 치료를 명목으로 비밀리에 소련에 간다. 그때 그는 중공의 협력하에,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는 다시 한번 소련에 공산당가입을 신청한다. 다만 스탈린이 거절한다. 주요 이유는 소련은 동서 양쪽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국정부를 분노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세재는 실망을 안고 귀국한다.

모택민체포

1941년 1월, 성세재는 다시 소련에 제안한다: 투르키스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을 성립하여, 중화민국에서 벗어나고, 소련에 가맹하겠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거절한다. 같은 해 6월, 소련-독일전쟁이 발발하고, 성세재는 소련과 중공이 그를 암살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게 됨에 따라, 태도를 바꾸어 반소반공정책을 펼치고, 장개석에 가까이 다가간다.

1942년 9월의 어느 날, 성세재는 모택민, 진담추(陳潭秋)등 신강에서 일하던 근 150명의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을 붙잡는다. 그리고 적화만성(迪化滿城)의 구공관(邱公館)에 연금시킨다. 성세재는 모택민등이 신강에서 비밀활동을 했다고 비난하고, 소련 주적화총영사관의 지시를 받아, 폭동을 통해 성세재정권을 전복시킬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1943년 1월, 성세재는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앙을 옹호하고, 당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며, 영수에 절대로 복종한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그후 성세재는 육각성기를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로 교체한다. 그후 반소반공을 대거 선전하며, 동시에 경내의 소련인원을 축출하고, 신강의 중공당원과 친공인사를 체포하며, 핵심분자인 모택민, 진담추 등을 처형한다.

1944년초, 소련이 독일에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국민정부가 예상계회전(豫湘桂會戰, 예는 하남, 상은 호남, 계는 광서를 가리킴)에서 패배하자, 바람을 보고 키를 돌리는 성세재는 다시 한번 변신하여,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소련공산당가입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강을 소련의 가맹공화국으로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국민정부와 등지고 싶지 않았던 소련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의 전보를 장개석에게 보내준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성세재를 신강에서 전보시켜 농림부장을 맡기고, 주소량(朱紹良)을 신강성주석을 임명한다. 1944년 9월, 성세재는 그의 신강에서 11년 5개월에 걸친 군벌통치를 끝내게 된다.

1949년, 성세재는 국민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 정부부서에서 일부 한직을 맡는다. 그리고 1970년 병사한다.

모택민의 죽음

성세재에 의해 처형된 공산당의 핵심분자중 한명이 모택민이다. 모택민은 중공당수 모택동의 친동생이다. 또한 중공초기의 홍색은행가, 홍색대관가(大管家)이며, 모택동이 중요하게 여긴 인물이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후, 중공중앙은 위장병이 위중하고, 신체가 허약한 모택민을 소련과 친한 신강독판 성세재 치하의 신강을 통해 소련으로 가서 병을 치료하게 하기로 결정한다. 1938년 2월초, 모택민이 신강에 도착한다. 다만 중소변경지역에서 페스트가 발생하여 교통이 단절되어 일시에 소련으로 건너갈 수 없게 된다.

당시 성세재는 중공에서 간부를 신강에 파견하여 일하게 해달라는 뜻을 전했고, 모택민은 중공중앙 주신강대표 등발(鄧發)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 "주빈(周彬)"이라는 가명으로 신강성 재정청 부청장, 대리청장의 직위를 맡는다. 부임후, 모택민은 세수 및 화폐제도를 개혁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며, 건설공채를 발행하는 등의 업무를 했다. 신강성의 재정을 정돈한다. 그의 처인 전희균(錢希均은 '신병영(新兵營)'도서관 주임의 직을 맡는다.

1939년 모택민은 허가를 받아 소련으로 간다. 같은 해 그는 전희균과 이혼한다. 1940년 1월 모택민은 소련에서 신강으로 돌아오고, 다음 해 신강성 민정청 청장이 된다.

1943년 2월, 민국정부에 충성을 표시한 성세재는 모택민등을 감옥에 가둔다. 신강의 중공당원중 지위가 모택민과 대체로 비슷한 신강 교육청 청장 서몽추(徐夢秋)는 최종적으로 신강중공조직이 확실히 '폭동음모'계획을 승인했고, 모택민, 진담추가 주모자라고 진술한다. 9월, 모택민, 진담추는 처형당한다. 당시 모택민의 나이 47세였다.

그후의 연구에 따르면, 모택민은 원래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모택동: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는 모택동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원인은 성세재가 소련과 중공이 그를 암살하는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고 의심하여, 소련과 안면을 바꾼 후에, 중공의 신강에 있던 인원들은 여러번 연안에 그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계속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다. 성세재는 모택민등을 체포한 후, 모스크바에서 한때 중공주중경대표인 주은래로 하여금 장개석과 그들을 석방하게 교섭하라고 했다. 그러나,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신강체포인원의 석방문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같은 국민당대표들과의 일련의 면담, 담판과정에서 그런 요구를 내놓지 않았다.

중공에서 말을 꺼내지 않으니, 장개석도 성세재에게 그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택민등은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장융(張戎)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모택동이 중공당원들의 장개석에 대한 원한을 부추기고, 전면적인 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택민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 외에, 홍콩의 개방잡지에 실린 서택영(徐澤榮)이 쓴 <모택민의 죽음의 비밀배경>에서 폭로한 바에 따르면, 모택민의 죽음은 스탈린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스탈린은 모택동이 몽골에 출병하기를 요청받고도 움직이지 않아, 은혜를 배신한 것을 징계하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국민당 중경군사위원회에서 특별히 파견한 "신강심판단(新疆審判團)"의 성원인 정대륜(鄭大綸)의 기술에 따르면, 그때 체포된 중공당원은 "위협과 이익유혹 앞에서 여러 명이 굴복했다" 어떤 사람은 "반공선언"을 쓰고, 어떤 사람은 "자백서"를 썼다. "모택민자백서"의 첫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 자백서를 쓰기 전에, 먼저 나와 다른 중동당원을 잘 대해준 성세재 독판에게 깊이 죄송한 마음을 표한다. 본인은 믿는다. 신강-소련, 신강-연안관계가 악화된 것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져야할 것은 소련이지 신강과 중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확실히 모택민이 한 말이라면, 성세재가 그들을 체포한 원인은 아무런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신강감옥에서 살아남은 다른 공산당원들도 문혁때는 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성세재가 구금한 150명의 중공당원과 가족중에서, 일찌기 중공최고지도자였던 구추백(瞿秋白)의 부인 양지화(楊之華)와 딸 구독이(瞿獨伊)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녀들은 신강을 통해 귀국하다가 연금된 것이다.

구추백과 양지화는 모두 각자의 첫번째 남편, 부인이 아니다. 구추백의 원부인은 왕검홍(王劍虹)인데, 결혼후 7개월만에 병사했다. 양지화의 전남편은 심검룡(沈劍龍)인데,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다. 그러나 구추백의 성을 따라 구독이로 이름짓는다. 양지화가 상해대학에서 공부할 때, 구추백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후 구추백은 심검룡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친해진다. 심검룡은 이혼에 동의했고, 구추백은 양지화와 결합한다.

구독이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들이 가장 먼저 연금되었다가 2,3개월후에는 감옥에 들어간다. 남녀를 나누었고, 여자들은 상이군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때 그들은 무슨 학대를 받지는 않았고, 고문도 받지 않았다.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방에는 문이 잠겨있지도 않았고, 모두 서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번 옮겨다녔으며, 마지막에는 제4감옥이었다. 거기에 머문 시간이 가장 길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끼를 주는데, 육류는 전혀 없는 야채탕을 주면서, 소금을 약간 넣었다. 거기에 만두를 한통 주었는데, 만두 안에는 모래가 들어 있었다. 다만, 먹는데 제한은 없었다. 단지 영양이랄 것이 없을 뿐이다.

영양을 더하기 위해, 그들은 가지고 있던 옷등 물건을 간수에게 팔아달라고 하여 양꼬리기름등을 구매하여 만두를 먹을 때 찍어 먹었다. 어떤 사람은 건포도와 소고기육포를 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아까워서 먹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명의 위험은 없었다.

근 150명중에서 모택민, 진담추등 몇명이 사형당하고, 몇명이 병사하고, 몇명이 중공을 떠난 것을 제외하면, 130명이 국민정부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알선으로 4년후 석방된다. 그때는 항전이 이미 끝났고, 1946년 6월, 출옥한 이 130명은, 양지화와 구독이 모녀를 포함해서 각각 10대의 트럭에 나누어타고 연안으로 간다.

그러나, 이 130명은 비록 성세재의 구금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많은 사람은 몇십년후에 모택동이 일으킨 문혁때 죽임을 당한다. 양지화도 그 중의 한명이다.

신중국건립후, 양지화는 부련(婦聯)의 국제부에서 일한다. 나중에 부련주석, 중국여공부(女工部) 부장이 된다. 그후에는 검찰위원회에서 일했다. 문혁이 발발한 후, 구추백이 죽기 전에 쓴 <다여적화(多餘的話)>는 그를 '반도'로 규정하는 증거가 된다. 양지화도 격리심사를 받고, 나중에 북경호구가 취소된다. 그리고 중요한 정치범을 수감하는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힌다. 감옥에서, 그녀는 이름이 없고, 그저 번호로 불렸따. 구독이는 10일에 한번씩 모친을 면회갔다. 그녀가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신강감옥에 있을 때는 그녀들에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이 있었고, 인격도 있었는데, 중공은 군벌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양지화는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후 병이 악화된다. 병보석으로 풀려난지 3일후인 1973년 10월 20일 72세의 나이로 양지화는 병사한다.

구독이는 문혁때 우붕(牛棚, 외양간. 문혁때 임시로 구금하던 장소임)에 갇힌다. 그녀는 신강에 있을 때 신화사 기자인 이하(李何)와 결혼했다. 1962년, 이하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그들의 두 아들은 하나가 전쟁시대때 죽고, 다른 하나는 23살때 암으로 죽었다. 그리고 딸 하나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다.

결론

군벌 성세재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다시 중공감옥에도 갇힌 공산당원들은 죽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까? 악독한 것으로 말하자면 공산당이 군벌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 악독한 주군을 따른 그들의 최후가 비참하더라도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