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하룡(賀龍)을 얘기하자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십대원수(十大元帥)는 밀리터리덕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밀리터리덕들 사이에서는 그가 전투에서 비교적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임총(林總, 임표), 속대장(粟大將, 속유)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밀리터리덕들은 어쨌든 여러 사람들 중에서 일부분이다. 전체 국민들 사이에서 임총과 속대장의 인기는 하노총(賀老總, 하룡)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1930년대의 북방은 홍군(紅軍)과 관련이 없었다.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홍군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군(軍)"이 너무 많았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으며, 백성들은 수천리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때 국민당의 표어 하나는 모두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살주발모조하룡(殺朱拔毛抓賀龍, 朱는 猪와 발음이 같으므로 돼지를 잡고 털을 뽑고 용을 잡자는 내용인데, 주덕을 죽이고, 모택동을 죽이고, 하룡을 붙잡자는 것이다)"이었다. 이를 보면 당시 하노총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인방을 분쇄하기 한해 전에, 필자가 하루는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장정중에 하노총이 낚시를 하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원수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었고, 서수(徐帥, 서향전)와 유수(劉帥, 유백승)의 이야기는 6-7년후에나 듣게 되었다.
나중에 "홍호적위대(洪湖赤衛隊)"가 다시 한번 인기를 끌게 되면서,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에 나오는 "홍호수랑타랑(洪湖水浪打浪)"같은 가사를 흥얼거릴 줄 알게 된다.
가장 불가사의한 점이라면 "홍호적위대"에서 여러번 "하룡을 따라 혁명을 하자"와 같은 가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모위원(毛委員, 모택동)"을 제외하고 주노총(朱老總, 주덕), 주총리(周總理, 주은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감히 그런 가사를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월(僭越)"이다. 머리가 날아갈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노총은 1959년부터 1966년까지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일할 때 환자중에 "왕천붕(王天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하노총을 전문적으로 연기한 전속배우였고, "서광(曙光)"등 여러 영화드라마에 출연했다. 입원기간을 연장하기 위하여, 그는 하대공자(賀大公子)의 "하판(賀辦, 하룡판공실)"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혼과 자녀들의 불효로 몇년후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온몸에서 오줌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혁때, 필자는 경성에 간 바 있고, 직접 "군벌 주덕, 토비(土匪) 하룡을 타도하자"는 것과 같은 류의 거대한 표어를 본 적이 있다. 하룡이 장작림(張作霖)처럼 토비였던 적이 있었던가? 최근 선전방(單田芳) 노선생의 평서 "하룡전기(賀龍傳奇)"에 근거하여 그 시기의 역사를 정리해본 바 있는데, 조반파들의 얘기가 틀리진 않았다. 하노총은 다른 원수들과는 달리 확실히 녹림인물(綠林人物, 녹림은 산적, 토비를 가리킴)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두 명의 누나, 1명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이다. 수당연의의 진숙보(秦叔寶)와 비슷하게, 하노총은 확실히 호소산림(虎嘯山林), 타가겁사(打家劫舍)한 바 있다(산림에 살면서 강도약탈을 하다). 나중에 점점 세력이 커지자 국민당군의 군장(軍長)이 된다. 녹림호한을 당금정부에서는 항상 "농민군"이라 칭한다. 다만 "토비"라고 말하더라도,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백승(劉伯承) 원수는 공산군중에서 전투나 서열로 5위내에 들며, "군신(軍神)"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의 모략과 안목은 아주 뛰어나서 그에게 탄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유백승 원수가 일찌기 높이 평가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한명은 하룡이고 다른 한명은 진갱(陳賡)이다. 유백승 원수에 따르면, 우리 당에서 이 두 사람은 삼교구류(三敎九流)와 많이 접촉했고, 사회규칙을 잘 알고 있어서 각 방면의 세력을 단결시켜 혁명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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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룡의 딸 하첩생(賀捷生)은 문혁때 부친의 대자보를 써서 붙인 적이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하룡은 대 토비이다. 생활에서 자산계급 부패화의 악취가 충만하다. 하룡은 원숭이를 데리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원숭이에게 바나나와 귤을 준다. 한번은 동북에서 수천위안짜리 경찰견을 데리고 왔는데, 개가 병들자 의사를 불러서 보게 하고, 약을 먹이고, 페니실린을 주사했으며 심지어 병원에 입원시켰다. 개에게 먹이는 식사가 사람의 것보다 좋았고, 매끼마다 고기나 생선을 주었다. 당당한 부총리, 정치국위원이 원숭이와 개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를 보면, 하노총의 취미는 확실히 당시의 보통백성들과 달랐고, 강호의 기운이 드러난다.
- 가로회(哥老會)
가로회는 명말청초의 민간비밀결사조직이다. 신해혁명전에 서남의 각성 특히 사천가로회는 현지의 도시와 농촌에 널리 퍼져 있었고, 나중에는 장강중하류의 남북각성으로까지 발전했다. 구성원의 대다수는 농민, 수공업자, 사병과 유민(遊民)이었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계급이었다. 역사적으로 민족이익과 군중이익을 대표하여 통치계급에 저항했다. 일찌기 1911년의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에 참여하였으며, 청말민초 황제제도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에 참가한 중요한 무장단체였다. 또한 중공의 통일전선에서 중요한 단결대상이었다.
등소평(鄧小平)의 아버지 등소창(鄧紹昌)은 일찌기 사천 광안(廣安) 가로회의 수령이었고, 중공의 중요장군들인 하룡, 주덕, 민맹주석 장란(張瀾)등도 모두 가로회의 인물들이다.
사천의 가로회는 한류(漢留)라고도 부르고 속칭 포가(袍哥)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청나라초기 정성공(鄭成功)이 이끄는 반청복명조직 "홍문(洪門)"의 한 갈래이다. "포가"라는 명칭은 <시경(詩經)>의 "기왈무의(豈曰無衣), 여자동포(與子同袍)"(어찌 옷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의미는 모두가 이성형제(異姓兄弟)로 동생공사(同生共死)하겠다는 것이다. 포가는 "한류"라는 명칭도 있는데, 이는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조조의 군영에 옛옷(舊袍)을 남겨놓고 떠났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개략, 강희, 옹정, 건륭시기(1662-1795)에 호광(湖廣), 민(閩), 월(粤), 감(竷)에서 사천으로 이민이 몰려온다. 장기간의 발전을 거쳐, 지방특색을 지내고, 사회적으로 상호부조의 성격을 지니며, 강렬한 민족주의색채를 지닌 민간의 비밀결사조직인 생겨난다. 청나라조정은 반만(反滿)의 경향으로 인하여 이를 "회비(會匪)", "회당(會黨)"으로 칭하면서 엄격하게 조사하고 금지했다.
2. 하룡일가와 가로회
하룡의 당증조부 하정벽(賀廷璧)은 상서(湘西) 가로회의 용두대야(龍頭大爺)였다. 함풍4년 수천명의 인원을 이끌고 태평군(太平軍)의 반청전쟁에 참가한다. 나중에 하정벽은 반청에 시래하여, 청나라조정에 의해 참수당한다. 다만 하정벽은 가로회의 영웅이 되었고, 상서인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갔다.
가족중에 그런 영웅이 있으니, 하씨집안의 민간에서의 지위, 명망 혹은 인맥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 비견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로회 용두대야의 지위는 하룡의 가족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가게 된다.
하룡은 미성년일때부터 강호에 나간다. 관방자료에 따르면 그는 나자객(騾子客, 소금운송), 흘대호(吃大戶, 부유한 집안에서 재물을 빼앗는 것), 부잣집 도련님을 패주는 일등을 했다.
하룡의 부친은 가로회의 용두대야이고, 자형인 곡적정(谷績廷)은 가로회의 고위간부였다. 미성년인 하룡조차도 가로회의 "한산대야(閑散大爺)", "십배노요(十排老幺)"였다.
가로회의 내부등급은 두배(頭排)에서 십배(十排)까지이고, 중간에 이(二), 사(四), 칠(七), 팔(八), 구베(九排)는 없다. 왜나하면 관우가 이야(二爺)이고, 사(四)는 불길한 숫자이며, 칠(七)은 배반자이고, 팔(八)과 구(九)는 양가장 자매들의 칭호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두배, 삼배, 오배, 육배와 십배이다.
두배대야는 용두대야로 불리며, 지위가 가장 높고 일체의 사무를 관리한다.
십배는 지위가 가장 낮고, 대부분은 막 일을 시작한 신입들이다. 다만 "봉미십비(鳳尾十排)"라는 명호는 잠재력을 지닌 후배에게 부여된다.
하룡은 어려서 단련이 필요했기 때문에 "봉미십배"부터 시작한다. 이는 동사장의 아들이 하급직위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해동안 강호에서 구르면서, 하룡은 상식현(桑植縣)에서 명성을 드러내고, 한 무리의 형제들과 힘을 합하여 좋아하는 사람을 살게 만들고 미워하는 사람은 죽게 만드는 흑백양도를 모두 장악한 상서의 신인(神人)이 된다.
그런 강호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룡은 군벌혼전의 민국초기에 두 자루의 부엌칼을 들고서 무리를 이끌고 호남의 군벌들 사이를 오가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하룡의 인격적 매력
하룡은 강호의 큰형님으로서, 두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불공정한 일을 바로잡기를 좋아했다. 둘째는 인격적 매력이 넘쳤다. 모택동조차도 하룡에 대하여, "적에게는 용감하고, 당에는 충성하며, 군중을 단결시킨다"고 여러번 칭찬한 바 있다.
1927년 남창의거가 실패로 끝난 후, 여러 지도자들은 여러 조로 나누어 포위망을 돌파한다.
하룡은 11월에 상해에 도착하여,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주은래는 하룡의 강호에서의 지위를 잘 몰라서, 그로 하여금 상해에서 쉬도록 안배하고, 그후 소련으로 가서 군사를 공부하게 하려 했다. 구체적인 업무는 소련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룡은 강호인이다. 자신의 호소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은래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서(湘西), 운귀(雲貴, 운남과 귀주), 천유(川渝, 사천과 중경)의 지형과 인심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특히 상서지구에서는 인원을 끌어모으는 것도 문제가 없다. 내가 돌아가서 홍군을 조직하겠다."
주은래는 며칠동안 생각하고나서, 하룡의 요청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도부를 구성해준다. 거기에는 상악변전위서기(湘鄂邊前委書記) 주일군(周逸群), 노동생(盧冬生), 이량요(李良耀)등등이 포함된다.
1928년초, 하룡과 주일군등은 상악변경에 도착한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한 무리의 인원을 모아서 홍사군(紅四軍)을 조직한다.
이 부대의 핵심역량은 바로 누나 하영(賀英)이 이끄는 가로회 가족무장으로 합계 천여명이었다.
가로회관계와 중공조직의 힘을 빌어, 하룡은 다시 상서에 뿌리를 내리고, 연이어 상악변소비에트구, 악서북소비에트구, 검동소비에트구, 상악천검소비에트구를 만들고, 홍사군도 홍이군단(紅二軍團), 홍이방면군(紅二方面軍)으로 발전한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홍2방면군은 장정도중 천명이상이 설산에서 동사했고, 수천명이 아사했거나 혹은 남경방면의 폭격으로 죽었다. 다만 하룡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아주 컸고, 많은 부하들은 그와 생사를 함께하고자 했고, 중도에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전체 홍군대오중에서, 이처럼 강한 개인적인 매력을 지니고, 홍군으로 하여금 생사를 함께 하도록 만든 것은 모택동, 주덕과 주은래 이외에 바로 하룡이다. 단순히 그의 홍2방면군에서의 영향력만 보더라도 홍1방면군의 모택동에 버금갈 정도이다.
많은 홍군전사들에 있어서, 홍군대오에 참가하는 것은 바로 하룡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홍호적위대"의 그 가사는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근거지의 홍군과 비교하면, 하룡부대의 전투성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역도 가장 넓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생명력은 가장 강했고, 그와 그의 병사들은 연전연패하면서도 계속하여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하룡은 전국의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자신의 가로회에서의 신분을 밝히기만 하면, 바로 무장인원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여러번 지방 가로회의 무장역량을 모조리 홍군휘하로 거두어들인 적이 있다.
결국 그것은 총사령관의 이름이 하룡이기 때문이었다.
상서에서 하룡의 고향집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하룡이 태어날 때, 용권풍(龍捲風, 회오리바람)이 산위에 있는 묘(廟)의 석룡(石龍)을 그의 집앞까지 옮겨놓았다고 한다. 여기에 하룡은 전쟁터에서 수십년간 싸웠지만, 몸에 상처 하나 얻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진룡부체(眞龍附體)"라고 여겼다.
하노총의 최후를 보면, 그는 유방(劉邦), 주원장(朱元璋)같은 진룡천자(眞龍天子)는 아니었고, 심지어 동북의 장작림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중공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는 절대적으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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