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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항전시기 중국공산당은 전쟁경비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by 중은우시 2024. 12. 31.

글: 초재사숭(招財史崇)

1935년 가을 섬북의 오기진(吳起鎭)

한 무리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사람들이 피로한 발걸음으로 힘들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나고 있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피난하는 피난민들처럼 보였고, 보무당당한 군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무리가 얼마 후 중국혁명의 대들보가 된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이곳에 왔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들이 어떻게 하여 나중에 그렇게 굴기하게 되었을까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해가 지난 이후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1949년 북경

모택동은 천안문성루에 올라,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고 선포한다.

아래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모택동의 머리에는 십여년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때의 공산당은 가난뱅이였다. 신중국을 건립하는 것은 고사하고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가난하면서 그저 이상만 남아 있던 정당이 마지막에 승리를 거두게 될 줄은.

그중의 비밀은 아마도 그들의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공산당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얘기하자면 섬북에 있던 그때이다. 그때 전군의 돈을 다 모아서 겨우 1,000원이 남아 있었다. 이 돈으로는 며칠간의 식사비도 해결할 수 없었다.

모택동은 당시 골치가 아팠다. 그는 사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녔다. 자기 편의 돈까지도 빌렸다.

한번은 그가 홍15군 군장 서해동을 찾아간다. 서해동은 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돈을 조금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은 차용증을 쓴다, 2,500원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서해동은 두 말없이 직접 5,000원을 건네준다. 이 돈은 중앙홍군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돈도 금방 다 써버린다. 모택동은 다시 송경령(宋慶齡)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송경령이 그녀의 동생인 당시 중국은행 동사장 송자문(宋子文)으로부터 돈을 빌려주기를 바란 것이다.

송경령은 비록 송자문과 일찌감치 의절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방법을 강구하여 5만위안을 만들어 중공중앙에 보내준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상하이의 유일한 저택을 저당잡히고, 손중산이 남긴 모든 돈을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빌려온 돈으로 중앙홍군은 잠시 난관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빌리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그래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한간과 매국노의 재물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듣기에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 운용하는 데 있어서 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간과 매국노가 어디 그렇게 많은가?

1936년, 섬감녕근거지는 한간의 재산을 몰수하여 획득한 수입이 겨우 65.5만원이었다. 1937년에 이르러, 이 숫자는 8.7만원으로 급락한다. 1935년 12월 한달치 수입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방법은 안되겠다고 여기고 공산당은 부득이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새로운 자금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두 곳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은 소련과 국민당이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하여 1931년부터 1937년까지 계속하여 중공에 대량의 원조를 제공했다. 이들 원조는 중공의 경제적 압박을 상당부분 해소시켜준다.

1937년, 소련의 원조는 심지어 섬감녕변구의 전체 수입보다 5.2배가 많았다. 1940년에도 이 비율은 1.5배에 이르렀다.

또 하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은 국민당으로부터의 자금지원이다. 1936년초, 장개석은 홍군에 항일경비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서안사변후 이 약속은 실현된다.

1937년 1월부터, 국민정부는 매달 홍군에 30만원을 제공한다.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된 이후에는 매월겨비가 63만원으로 증가된다.

이처럼 국내외에서의 원조자금은 설중송탄(雪中送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원조로 살아가는 것은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소련은 1943년 코민테른을 해산한 후, 중국공산당에 대한 자금원조를 중단한다. 국민당의 원조도 1940년말부터 끊긴다.

공산당은 다시 곤경에 빠진다. 다만 이번에는 그들도 그동안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대응책이 있었다.

그들은 전국범위에서 도움을 구한다. 동시에 군중들의 자력갱생을 시작한다. 요란하게 대생산운동의 서막이 열린다.

이 운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모택동부터 보통사병가지 모두가 참여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요동입구의 1무(畝)의 땅에 직접 농사를 지었다. 주덕은 생산소조를 조직하여 왕가평(王家坪)의 3무의 채소밭을 개간한다. 주은래와 임필시는 앞장서서 방직을 배우고, 방직기술을 계속하여 익힌다.

일반백성들도 동원되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공예품을 만들고, 심지어 소규모 작방(作坊)을 열기도 했다.

이 운동은 공산당의 경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그들의 '조혈(造血)'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1945년에 이르러 공산당은 이미 91만의 정규군과 200만의 민병을 갖추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공산당이 극히 어려운 여건하에서 거액의 전쟁경비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자금지원을 받아내고, 토호들의 돈을 빼앗고, 국내외의 원조를 받는다. 그리고는 자력갱생운동까지 벌인다. 공산당은 비범한 지혜와 완강한 생존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리 큰 곤란이 있더라도 이상이 있고, 신념이 있는 정당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그런 정신으로 결국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의 공산당은 힘든 것을 잘 견뎠다. 궁즉사변(窮則思變). 이것이 아마도 그들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비결일 것이다. 누가 생각했겠는가. 먹는 것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정당이 마지막에 신중국을 건립하게 될 줄은. 이런 것이 아마도 역사의 매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