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만 청군(淸軍)이 2만 팔국연군(八國聯軍)에 패배한 이유는?
글: 시사중국(詩詞中國)1900년 5월 28일(청광서26년), 당시의 대영제국, 아메리카합중국, 프랑스제3공화국, 도이치제국, 러시아제국, 일본제국, 이탈리아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등 8개 주요국가는 당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짧은 몇달동안, 팔국연군은 신속히 수도 북경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도망쳤으며, 팔국연군이 북경에 진입한 후 방화약탈을 저지르고, 자금성과 이화원등 황가원림의 보물들을 약탈한다. 이번 전쟁으로 을체결하게 되었으며,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하게 된다.당시 팔국연군은 5만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겨우 2만여명이고 3만명이 되지 않았다. 인원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일본군으로 1만명이었다. 나머지 러시아군 4천명, 영국군 3천명, 미..
2024. 10. 21.
"남경조약(南京條約)": 굴욕인가 외교승리인가?
글: 양금린(楊錦麟)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
2024.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