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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137

11만 청군(淸軍)이 2만 팔국연군(八國聯軍)에 패배한 이유는? 글: 시사중국(詩詞中國)​1900년 5월 28일(청광서26년), 당시의 대영제국, 아메리카합중국, 프랑스제3공화국, 도이치제국, 러시아제국, 일본제국, 이탈리아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등 8개 주요국가는 당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짧은 몇달동안, 팔국연군은 신속히 수도 북경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도망쳤으며, 팔국연군이 북경에 진입한 후 방화약탈을 저지르고, 자금성과 이화원등 황가원림의 보물들을 약탈한다. 이번 전쟁으로 을체결하게 되었으며,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하게 된다.​당시 팔국연군은 5만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겨우 2만여명이고 3만명이 되지 않았다. 인원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일본군으로 1만명이었다. 나머지 러시아군 4천명, 영국군 3천명, 미.. 2024. 10. 21.
"남경조약(南京條約)": 굴욕인가 외교승리인가? 글: 양금린(楊錦麟)​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 2024. 7. 23.
아편전쟁(鴉片戰爭): 하나의 신화 글: 고천활해(高天闊海)​영국의 역사학자 Julia Lovell(중문명 藍詩玲)이 쓴 "The Opium War: Drugs, Dreams and the Making of China"(아편전쟁: 마약, 꿈 그리고 중국만들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은 중국의 "founding myth(건국신화)"중 하나라고.​아편전쟁은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미가 아주 크다. 중국의 가련한 역사교육 속에서, 정부는 이데올로기라는 볼록거울을 통하여 아편전쟁을 엉망진창으로 고쳐썼고 서방국가에 대한 민족원한을 선동하며, 중공통치를 보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중국은 역사허무주의를 이용하여 고쳐쓴 중국역사에서 아편전쟁은 중국근대사의 시작이며, 소위 "중화민족백년굴욕"의 기점이 된다.​줄리아 로벨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2024. 7. 20.
청나라말기의 "섬감회란"과 하마스 글: 사감 (2023. 10. 17) 청나라말기 동치연간의 섬감회란은 1862년부터 1873년까지, 10여년간 지속된 후 청나라조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폭란은 섬서와 감숙 외에도 영하, 청해와 신강까지 파급되어, 중국의 서북지구의 경제와 문화에 엄청난 파괴를 초래했다. 사료를 보면, 섬감 두 개 성의 인구손실이 약 2000여만명에 이르렀다. 전후 청나라조정은 섬서,감숙의 나머지 회민을 강제로 서부의 더욱 편벽한 지역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다시 한번 중국의 중심지역의 안녕을 파괴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19세기 하반기, 태평천국운동이 전체 남부중국을 석권하다가, 마지막으로 최후의 근거지 남경이 함락되면서, 일찌기 기세등등했던 태평천국은 쇠망한다. 그러나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가 시작한다. 북방의 여러 성에서.. 2023. 10. 24.
아편전쟁때 청군의 황당무계한 전술들.... 글: 한언쇄어(閑言碎語) 역사상의 오늘 1840년 7월 5일은 영국전함이 주산(舟山) 정해(定海)를 포격하여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개전된 날이다. 아편전쟁이전에 천조(天朝)로 자처하며 고보자봉(故步自封)하던 대청제국은 이미 시대에 낙후되어 있었다. 문화와 사상도 그러했고, 무기와 군사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아편전쟁의 전모를 살펴보면, 청정부의 여러가지 대응책을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하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어떤 웃지못할 전술전략을 펼쳤을까? 여인의 마통(馬桶)과 과각포(裹脚布) 영국인들이 광주로 쳐들어 올 때, 전선의 장수는 여인의 마통(요강)과 과각포(전족발싸개)를 내건다. 그들이 보기에 "오예(汚穢, 더러운 물건)"로 서양인들의 "요법(妖法)" 즉 서양인들의 .. 2023. 7. 5.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의 영불연합군(하)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외교조약의 체결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과 북경에서 담판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제2차아편전쟁을 종결시키는 은 청나라가 처음 북경에서 서양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실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서 압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역대이래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을 주목했고, 조약체결현장의 내외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실 북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 자체가 연구해볼만한 중요한 이슈이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운 후,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이 조치의 의도를 표명하고, "30만은냥을 피해자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 2023.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