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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128

청나라말기의 "섬감회란"과 하마스 글: 사감 (2023. 10. 17) 청나라말기 동치연간의 섬감회란은 1862년부터 1873년까지, 10여년간 지속된 후 청나라조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폭란은 섬서와 감숙 외에도 영하, 청해와 신강까지 파급되어, 중국의 서북지구의 경제와 문화에 엄청난 파괴를 초래했다. 사료를 보면, 섬감 두 개 성의 인구손실이 약 2000여만명에 이르렀다. 전후 청나라조정은 섬서,감숙의 나머지 회민을 강제로 서부의 더욱 편벽한 지역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다시 한번 중국의 중심지역의 안녕을 파괴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19세기 하반기, 태평천국운동이 전체 남부중국을 석권하다가, 마지막으로 최후의 근거지 남경이 함락되면서, 일찌기 기세등등했던 태평천국은 쇠망한다. 그러나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가 시작한다. 북방의 여러 성에서.. 2023. 10. 24.
아편전쟁때 청군의 황당무계한 전술들.... 글: 한언쇄어(閑言碎語) 역사상의 오늘 1840년 7월 5일은 영국전함이 주산(舟山) 정해(定海)를 포격하여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개전된 날이다. 아편전쟁이전에 천조(天朝)로 자처하며 고보자봉(故步自封)하던 대청제국은 이미 시대에 낙후되어 있었다. 문화와 사상도 그러했고, 무기와 군사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아편전쟁의 전모를 살펴보면, 청정부의 여러가지 대응책을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하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어떤 웃지못할 전술전략을 펼쳤을까? 여인의 마통(馬桶)과 과각포(裹脚布) 영국인들이 광주로 쳐들어 올 때, 전선의 장수는 여인의 마통(요강)과 과각포(전족발싸개)를 내건다. 그들이 보기에 "오예(汚穢, 더러운 물건)"로 서양인들의 "요법(妖法)" 즉 서양인들의 .. 2023. 7. 5.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의 영불연합군(하)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외교조약의 체결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과 북경에서 담판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제2차아편전쟁을 종결시키는 은 청나라가 처음 북경에서 서양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실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서 압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역대이래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을 주목했고, 조약체결현장의 내외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실 북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 자체가 연구해볼만한 중요한 이슈이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운 후,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이 조치의 의도를 표명하고, "30만은냥을 피해자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 2023. 6. 25.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 북경의 영불연합군(상)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1860년의 "경신지변"은 근대중국이 급전직하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또한 청나라 통치집단이 진정으로 깨닫고, 자구자강을 도모한 시작점이다. 이 해에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안정문(安定門)을 점령했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영불연합군과 을 체결하게 된다. 만일 제2차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을 체결한다. 그것은 단지 아편전쟁의 재판이었다. 나중에 다시 곡절이 생겨 제2차아편전쟁은 새로운 업그레이드버전, 확대버전으로 상승하게 되고, 전쟁은 쌍방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의 조류는 열려진 갑문처럼 더 이상 청나라통치자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무력공세에 밀려 자본주의세계의 식민체계로 한걸음 더 빠져들게 된다.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 2023. 6. 25.
대청의 흠차대신(欽差大臣)이 어린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만나다. 글: 왕정(王丁) 1877년 초여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청나라의 주영공사관(駐英公使館)의 일행 4명이 러셀 공작의 집을 방문한다. 나중에 이 방문에 참가했던 사람중 3명이 기록을 남기는데, 각각 정부(正副) 흠차대신인 곽숭도(郭嵩燾),유석홍(劉錫鴻)과 통역관 장덕이(張德彛)이다. 어린 러셀이라 함은 바로 나중에 대철학가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다. 그는 일찌기 2차례에 걸쳐 영국수상을 맡은 John Russell 공작의 둘째손자이다. 중문으로 번역된 외국사람의 이름이 기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린 버트런드 러셀을 만난 내용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하여 그 이야기를 알리고 근대대외교류과정에서 러셀과 중국의 인연에 대하여 하나의.. 2023. 5. 20.
원명원(圓明園): 중국이 감추는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 글: 사로(思蘆) 원명원유적지는 중국의 애국주의교육기지이다. 중국이 열강으로부터 침략받은 굴육사를 증명하는. 다만,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단지 절반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샤오펀홍들이 걸핏하면 원명원을 가지고 서방에 대한 원한을 표시하는데,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명원을 불태운 사건은 소위 제2차아편전쟁때 일어났다. 1. 전쟁의 원인과 과정 제2차아편전쟁이라는 명칭은 오인시킬 수 있다. 제2차아편전쟁은 아편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남경조약에 규정한 입성, 조약수정등 요구를 청나라정부가 온갖 방법으로 제지하고, 또한 홍콩에 등록된 애로우호(亞羅號)선박이 청나라수군에 수색을 당하고, 프랑스 선교사가 광서에서 지방관리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 2023. 5. 9.
"아편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글: 이대야(李大爺) 나는 "아편전쟁"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것은 중국인이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오도하는 경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문을 열어제치고 서풍동점(西風東漸)을 가져온 획기적인 이 사건은 기실 본질적으로 무역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문명간의 충돌이고, 아편과의 관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편"을 가지고 이 전쟁을 정의하는 것은 극히 부정확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책을 이어받아 폐관쇄국정책을 유지한다. 1684년에 이르러, 해금(海禁)을 개방하고, 정점통상(定點通商, 정해진 장소에서 통상을 진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여기에서 봉행된 것은 불평등무역이었다. 중국의 차, 자기, 비단은 너희들이 얼마든지 사가도 좋다. 다만 너는 중국시장에 마음대로 들어와.. 2023. 4. 17.
"아편전쟁": 중국의 창세신화 글: 고천활해(高天闊海) 이 제목만 보면, 어떤 네티즌들은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려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영국의 역사학자 Julia Lovell(1975-)의 The Opium War: Drugs, Dreams and the Making of China(아편전쟁: 마약, 꿈, 그리고 중국만들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아편전쟁은 중국의 '창세신화(founding myth)'중 하나라고. 아편전쟁은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아주 크다. 중국의 불쌍한 역사교육 속에서, 정부는 이데올로기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아편전쟁을 이러저리 뜯어고쳤다. 그렇게 하여 민족원한(서방국가에 대한)을 선동하고, 중공통치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중공이 역사허무주의로 고쳐쓴 중국역사속에서 .. 2023. 3. 13.
"황러시아계획": 러시아의 중국침략야망 글: 종극신앙(終極信仰) 황러시아계획은 후세인들이 날조한 인터넷글이 아니라, 각종 기록이 남아 있다. 정식학술간행물에도 기재되어 있고( 朱哲芳 저), 중국의 지방현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아이훈현지(璦琿縣誌)제8권), 대학학보에도 있다(길림사대학고1979년제4기 등등). 16세기부터, 제정러시아는 동쪽으로 확장을 시작하며, 두 차례의 야크샤전투(알바진전투)이후 1689년 청나라와 제정러시아는 첫번쨰 국경조약 을 체결하여 중러양국의 국경을 정한다. 비록 국경이 정해졌지만, 제정러시아는 조약을 준수하지 않았고, 청나라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중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간다. 실질적인 점유가 형성되고, 그 토지위에서 러시아인의 인구비율이 우세를 점했을 때, 다시 청나라정부를 압박하여.. 2023. 3. 9.
팔국연합군이야말로 중국인민해방군이다 - 아편전쟁이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이다. 글: 우별자(右撇子) 중국의 우민교육은 황당 그 자체이다. 중공이 만들어낸 각종 정치용어를 보면, 코메디와 몰염치로 충만핟. "해방(解放)"이라는 말을 보기로 하자. 곳곳을 다니며 강탈하고는 모두 '해방'이라는 명목을 붙인다. 전중국을 해방했다는 것은 기실 전중국을 강탈하여 자기 소유로 했다는 말이다. 특히 '대만해방'이라는 것은 더욱 가소롭다. 대만인들을 아주 잘 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못사는 자'들이 하루종일 '대만해방'시키겠다고 떠들고 있다니, 자신은 발에 족쇄를 달고서,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주겠다고 떠들고 있다. 이것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인의 일상언어를 보면, 우리는 자주 해방전에 어떠했고, 해방후에는 어떻고 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공산당이 국민당과 강산을 쟁탈한 전쟁을.. 2023.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