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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아편전쟁(鴉片戰爭) vs. 영중무역전(英中貿易戰): 오도된 역사진상으로 미중무역전을 성찰한다

by 중은우시 2025. 4. 14.

글: 조효(趙曉)

1840년, 영국함대가 중국남해로 진격했고, 광주의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중국인에 있어서, "근대굴욕사"의 시작이며,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시작점이었다. 이때부터, "아편전쟁"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고, 모든 중국학생들의 마음 속에서 "국치제1과목(國恥第一課)"이 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중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국제역사학계에서 이번 전쟁을 "Opium War"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

The First Anglo-Chinese War(제1차중영전쟁)

War for Trade(통상전쟁, 무역전)

호칭이 다른 것은 절대로 언어선택의 문제처럼 간단한 걳이 아니다. 이는 가치입장과 서사논리의 차이이다:

"아편전쟁"은 마약, 도의, 침략, 피해를 강조하는 일종의 감정동원식의 민족주의적 기술이다.

"중영무역전" 혹은 "통상전쟁", "무역전"은 무역, 제도, 구조적충돌을 강조하는 더욱 복잡한 세계질서의 시각이다.

왜 우리는 현대경제학의 각도에서 이 전쟁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오늘날 또 다른 구조적 무역충돌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미중무역전. 우려스러운 일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기술하는 것은 여전히 1840년대의 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역사학자인 위안웨이스(袁偉時)는 <동방문화>에 <현대화와 중국역사교과서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중국교육계에 "역사서술중 정치화, 감정화경향을 시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아편전쟁, 의화단 등 역사사건에 대한 교사는 "현대국가의식과 심각한 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6년의 <빙점주간>에서 다시 한번 글을 실었고, 더욱 큰 논쟁과 봉쇄를 당한다. 그러나 친후이(秦暉), 이중텐(易中天), 장밍(張鳴)등 공공역사학자들이 중국근대사에 대한 역사서술을 다시 평가하도록 촉진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역사에서 진정한 제도교훈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계속하여 제도실패의 숙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편전쟁은 단순히 '아편'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제도연접의 실패, 시장규칙의 충돌 및 글로벌질서의 제1차충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특별히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1. 영중간의 구조적무역불균형: 전쟁의 시작점

아편전쟁의 도화선은 무엇인가? 절대로 "아편"이라는 두 글자처럼 간단하지 않다.

현대경제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은 전형적인 국제무역질서불균형이 불러온 구조적충돌이다. 한쪽은 장기적으로 수출하고, 한쪽은 수입을 제한하고, 시장진입이 심각하게 균형을 잃었다. 그러나 제도보장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조정하는 것에 실패했고, 결국은 비극적인 전쟁을 불러오게 된다.

1.1 청나라조정의 대외무역정책: 조공화, 정치화, 봉쇄화

청나라조정은 명나라의 "폐관쇄국"정책을 답습하다가, 1684년에 이르러 해금(海禁)을 개방하고, "정점통상(定點通商)"을 허가한다.

만청이 대외적으로 봉행한 것은 비대등의 무역정책이다. 우리의 차, 자기, 비단을 너는 얼마든지 사갈 수 있다. 다만 우리 시장에는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방무역" "무역장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청나라정부가 해외무역에 대하여 '자유무역', '호혜"의 현대화경제이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이전왕조의 '조공무역'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 대외무역은 "상사(賞賜, 네가 나에게 복종하고 절하면, 내가 너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이지, '자유교환'은 아니다.
  • 외국상인은 "입공칭신(入貢稱臣)"해야 하고, '평등통상'같은 것은 없었다.
  • 황권정치가 시장매커니즘을 압살했고, 경제는 정치와 권력에 우선권을 양보해야 했다.

1684년(강희23년) 비록 "사구통상(四口通商)"을 개방했지만, 1757년(건륭22년)에 전면적으로 축소하고, 오직 광주라는 1개의 통상항구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외국상인들은 강제로 "십삼행(十三行)"을 통해서만 무역하도록 했고, 우회방식은 엄금했으며, 관방과 직접연락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는 국가독점에 상당한다: 영국상인은 오직 정부가 지정한 "총대리상(반관반민성격의 대외무역독점조직)"을 통해서만 중국상품을 구매할 수 있었고, 판매장소를 두거나, 투자하거나 혹은 소비자와 직접 접촉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본국공업제품을 직접 중국에 판매할 수도 없었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는 전형적인

  • 무역진입장격
  • 대외무역독점
  • 정책적인 외자기업과 제품에 대한 차별에 해당한다.

동시에 세제혼란과 관료의 부정부패로 비록 법률이 규정한 무역세율은 4%였지만, 외국상인들이 실제로 부과받는 것은 20% 심지어 더욱 높은 '회색비용'이 들었다. 실제로는 국제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였다.

1.2 영국의 우려: 백은유실과 재정곤란

18세기후반에서 19세기초에 이르러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대외무역과 자본수출에 대한 수요가 신속히 상승한다.

다만, 중국과의 무역에서, 영국은 그저 백은으로 중국의 차, 자기 및 비단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본국의 공업제품을 중국에 수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무역적자가 발생한다:

  • 건륭10년간(1781-1791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유출된 백은이 1,640만냥에 이른다;
  • 가정10년간(1800-1810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유출된 백은이 2,600만냥에 이른다.
  • 1830년대에 이르러 더더욱 최고조에 이르며, 매년 무역적자가 300만냥에 이른다.

당시의 영국은 금본위제를 실행하고 있었고, 은의 지속적인 유출은 화폐안정, 대외준비금, 재정균형에 모두 위협이 되었다.

즉, 영중간의 무역은 "윈윈" "호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중국은 백은을 벌면서, 시장을 상대방에게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런 논리는 기실 오늘날 중국의 대미무역구조와 극히 유사하다. 중국은 대량으로 수출하지만 금융, 데이타, 표준등 제도의 층면에서 상대방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대방은 장기적으로 손실을 입고 무역을 결국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1.3 영국의 선택: 아편은 그저 대체수출상품일 뿐이었다.

거대한 무역적자와 제도적봉쇄에 맞서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들의 최우선선택은 "아편수출"이 아니었다. 대중공업품수출확대를 희망했다(예를 들어 나일론, 기계등).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이들 상품이 중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엄금하고, 심지어 "이화(夷貨)"로 보았다.

여러차례의 외교교섭이 실패한 후, 영국은 인도식민지에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하고, 중국국내에 이미 존재하던 아편시장을 수출의 '돌파구'로 삼는다.

아편은 중국에서 영국이 가져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명말청초에 이미 광범위하게 민간(예를 들어 진통, 각성)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임칙서(林則徐)의 상소문에서 "아편의 유행은 이미 도시와 농촌에 침투해 있었다"고 쓴 것이 근거없는 말이 아니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시대에는 아직 "마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편무역은 처음에 오늘날의 담배무역과 마찬가지로 전세계에서 완전히 합법적인 무역이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명나라때부터 아편을 수입했고, 계속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 영국인은 해외에서도 팔고, 자기 나라에서도 팔았다. 1868년에 이르러 비로소 영국은 <마약상점법안>을 제정하여 본토의 아편거래를 일반적으로 제한했고, 1914년에 이르러 진정으로 아편을 금지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장악한 인도의 아편시장은 대중수출의 유일한 대체품이 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아편은 "영국인의 마약무기"가 아니라, 청나라가 장기간 봉쇄무역을 하면서 시장개방을 거절한 제도적 부산물이다. 이는 네가 나쁜 수단을 쓰면, 결국 상대방도 나쁜 수단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2. 아편은 음모가 아니다. 구조적인 무역불균형을 타파할 도구였다.

중국어에서 아편전쟁은 거의 '마약전쟁'과 동일시된다. 교과서에서는 반복하여 영국이 '아편을 황금과 바꾸었다'고 강조하고, 중국인민을 해치고, 국가의 부를 약탈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심층적인 문제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영국은 아편으로 황금과 교환했을까?

왜 청정부는 아편무역이 대규모로 크기 전에, 일찌감치 백은의 유입을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우리가 "아편"을 도덕적인 주제에서 "수출상품"으로 환원해보면, 이전쟁의 진실한 면모가 점점 분명해진다. 그것은 "마약과 인권"의 충돌이 아니다. 시장수출과 무역권리의 충돌이다. 일종의 "제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2.1 아편은 '구조적불균형의 대체수출품'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중영무역은 극도로 균형을 잃었다. 중국의 수출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지만, 영국상품의 수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심지어 금지되었다. 이는 영국으로 하여금 장기간 적자라는 곤경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런 구조하에서, 영국정부와 상인의 최초목표는 아편밀수가 아니었다. 나이론, 기계등 공업제품을 중국시장에 판매하며 평등한 무역관계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역사사건에서 영군의 원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 1793년 매카트니사신단: 영국국왕 조지3세는 특사를 보내어 청나라조정과의 외교관계를 요청하고,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 1816년 암허스트사신단: 다시 한번 무역확대와 사절파견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 1820년대부터, 여러차레 상업대표가 청나라조정과 교섭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고, 무역분쟁이 발생해도 제소할 곳이 없었다.

학자 Elizabeth Perry가 말한 것처럼, "이는 현대주권국가가 주권평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전현대국가와의 협상"이었다.

영중의 경제관념은 천양지차였다. 중국은 소농경제+왕권전제+인치사회이다. 영국은 시장경제+헌정민주+계약사회이다.

그리하여, 아편은 일종의 본토에 수요가 존재하고, 변경의 관리감독이 느슨하며, 수익이 거대한 상품으로서 자연스럽게 무역의 돌파구가 되었다. 청나라정부가 제도적으로 시장에서 댓가를 치르지 못하게 되자, 아편은 영국상업체계에서 구조적수출보상품이 된 것이다.

이건 "음모론"이 아니다. "제도로 이익추구"하는 것이 글로벌화초기단계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논리였다.

2.2 청정부의 "이중기준": 한편으로 아편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유통을 묵인했다.

임칙서가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그의 "호문소연(虎門銷煙)"이 기실 청정부의 장기적이고 일관적인 아편정책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돌연한 시정조치였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임칙서가 아편을 금지했을 뿐아니라, 일체의 대외무역도 금지해버린 것이다. 영국상인은 모조리 쫓겨났다.

임칙서이전에, 대다수의 관리들의 아편에 대한 태도는 "명금암허(明禁暗許, 겉으로는 금지하지만 암중으로 허락했다)"였다. 심지어 지방정부의 중요한 세원중 하나였다:

- 양광지구(兩廣은 광동, 광서)는 일찌감치 가경연간에 '뇌물'을 통해 아편밀수가 묵인되었다;

- 월해관(粤海關, 광동해관)은 회식비용수취매커니즘이 있었다. 아편무역에서 대량의 은량을 수취했다;

- 일부지방은 심지어 "아편으로 관리를 먹여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통계에 따르면, 1830년대, 청나라조정이 매년 받아들인 아편은 4만상자를 넘었다. 이는 백은억냥의 시장규모를 형성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아편은 이미 중국민간소비의 일반적인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돌연 강제로 소각하게 되었는가?

한편으로, 임칙서는 아편이 이미 사회문제를 조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병사, 문관계층에서 아편흡입이 유행하고, 이는 군정(軍政)의 기초를 흔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편소각은 황제에 대한 충성표시였고, '반부패철완'이미지를 수립하는 수단이었다.

다만, 임칙서의 조치는 아무런 배상이나 법적절차없이 영국상인의 사유재산을 소각해버린 것이다. 당시 국제공법의 틀 안에서 이는 '외국자산불법침탈'에 해당한다. 이는 영국이 병력을 출동시키는 법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외에,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당시는 국제적으로 마약금지조약같은 것이 없었다. 중국에서도 입법으로 아편이 불법상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었다. 영국측은 이런 법을 초월하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영중양국의 무역이 불러온 분쟁은 격화되기 시작한다. 평등대화, 정상적인 외교경로를 통한 문제해결이 불가능해지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상인들은 강력하게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자도 요구하게 된다.

이는 왜 영국이 출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영국국회에서도 그다지 강력한 반대가 없었다. 심지어 적지 않은 자유파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이것이 "상권을 보호하고, 무역을 보호하는" 전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설사 그 당시에도 여전히 대화의 가능성은 있었다. 영국군을 지휘하는 Admiral Sir Charles Elliot(1801-1875)는 여러번 서신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만청대신중 그 어느 누구도 대화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천조(天朝)는 오랑캐(蠻夷)와 대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제국주의에 대하여 오직 타격만 있고, 대등대화라는 것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엘리엇은 최종적으로 협상을 요구하는 <파커스턴 자작(당시 외교대신)이 중국황제가 임명한 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샤먼의 해변에 던져버린다: 이 문서의 말투는 아주 공손했다: "대영제국의 군주는 육해군을 파견하여 중국해안으로 보냈다. 황제가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부탁한다."

2.3 아편전쟁: 아편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아편을 빌어 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아편은 전쟁의 핵심이 아니다. 호문금연의 '민족영웅' 임칙서는 실제로 나중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아편재배를 장려한다. 이 점은 아마도 여러분들이 놀라서 턱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서양아편이 성행하여 백은을 벌어가는 국면에 태상시경 허내제(許乃濟)는 1836년 도광제에게 놀라운 건의를 한다: 국내에 재배를 허용하여 외국에서 들어오는 아편을 막자.

실제로 아편전쟁을 시작한 사람인 도광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아편을 즐겨 피웠다. 나머지 친왕, 군왕, 공주, 고관대작, 유명문인들 중에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이 금연을 주장한 것이 우국우민때문이라고 본다면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만청이 아편무역을 금지한 것이 정말 외국으로부터의 치욕을 막아내고, 백성을 위한 생각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서양아편이 대량의 백은을 벌어가기 때문에 국내에 '백은이 귀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정부의 재정기초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영중무역충돌인 것이다.

이번 전쟁의 진정한 핵심은 두 개의 문명간의 "국제교류규칙"에 대한 완전한 오판과 배리(背離)때문이다.

청정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천조이고, 너희는 오랑캐이다. 너는 우리와 나란히 마주앉을 수 없다. 네가 공물을 바쳐서 너에게 매매를 하도록 하는 것은 나의 은혜이지 너의 권리는 안이다. 너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너의 도덕이 타락한 것이지 제도의 불공정은 아니다.

영국정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주권국가이고, 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이에는 반드시 공개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대등한 통상권이 있어야 하고, 재산권보장과 배상매커니즘이 명확해야 한다. 네가 국내시장을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너는 우리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고, 우리의 물건을 불태워버려서도 안된다.

임칙서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군이 일단 상륙하면, 그들 오랑캐는 다른 기능이 없다. 온몸을 싸매어서 허리와 다리가 굳어있어,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병사 한명이 여러 오랑캐를 상대할 수 있을 뿐아니라, 시골이나 시정의 평민이라도 그들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다." 이건 오늘날 입만 열면 트럼프는 히틀러라거나 트럼프는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트럼프를 정상인이 아니라고 여기고 미국을 정상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임칙서는 "근대중국에서 눈을 열어 세계를 바라본 최초의 인물"이라고 칭해진다. 기실 이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전혀 몰랐다. '국제법'을 전혀 몰랐다. 그저 맹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이 국가의 세계관은 전체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몰랐고, 인간성이 같다는 것도 몰랐으며, 국가는 평등하다는 것도 몰랐다. 무역은 공평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계약이 신성하다는 것도 몰랐다!

황권의 무치 + 신민의 무지. 이런 구조하에서 아편은 당연히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최후의 지푸라기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나아졌는가? 철저히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왔는가?

3.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도가 용납할 수 없었다: 청나라의 심층적인 원인

주류의견에서 아편전쟁의 실패를 자주 "견선리포(堅船利砲)"때문이라고 본다. 서방은 튼튼한 배와 좋은 대포를 가지고 있어서, 중국의 칼과 창이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과학기술로 우리를 정복했고, 우리는 냉병기로 이를 막았으니, 자연히 계속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우리가 단지 '과학기술이 낙후되었다'는 해석의 틀에 머물러 있게 되면, 손쉽게 일종의 잘못된 '물리주의의 역사관'에 빠지게 되고, 진상을 보지 못하게 된다. 사실상 물질과 과기는 그저 껍질일 뿐이고, 제도와 이념이야말로 근원이다.

진정 이번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화포의 사정거리의 차이가 아니다. 두 체계의 '세계규칙"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의 천양지차였다.

역사와 오늘은 모두 증명한다: 낙후되면 얻어터진다. 낙후를 초래한 우매와 야만은 반드시 얻어터진다.

3.1 천조체제 vs 글로벌법치체제: 근본적으로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청나라제국의 논리체계는 '황권중심주의'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 황제는 하늘의 명을 받은 군주이고, 천하의 땅은 모두 황제의 것이다

- 국가는 평등한 외교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외국사절은 조공사절인 것이다

- 내부무가 대외사무를 처리한다. 대외관계는 외교가 아니라 '오랑캐사무(夷務)'이다.

- 법률은 '외국오랑캐'를 보호하지 않는다. 조정의 체면을 보호할 뿐이다.

영국은 당시에 이미 헌정화와 시장화가 이루어진 공업국가였다. 그 국가행위는 반드시:

- 계약정신을 준수하고

- 개인재산권을 존중하고

- 의회와 법치를 통해 대외무역질서를 보호하고

- 전세계범위에서 대등주권과 해양법칙을 추진한다.

그러므로, 영중간의 전쟁은 당연히 간단하게 '야만국가가 문명국가를 침략했다'는 식으로 귀결될 수 없다. 오히려 '고도로 제도화된 국가'가 글로벌규칙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봉쇄하고, 대등한 교류를 거절하는' 제국체계에 진입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인 Joseph Esherick이 말한 것처럼

"청나라는 영국의 대포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영국인의 신념체계와 조직능력에 패배했다."

3.2 통상논리의 충돌: 광주십삼행 vs 글로벌자유항

다시 양국의 무역제도를 보자.

영국은 당시에 일찌감치 전세계에 걸쳐 '자유항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말라카, 캘커타, 희망봉등이다. 상인이건 물자이건 자본의 유통이건 효율이 매우 높았고, 규칙도 투명했다.

청나라에서 취한 것은

  • 광주에서만 통상이 가능하다.
  • 십삼행이라는 중간상을 통해야 한다.
  • 외국상인은 도시로 들어올 수 없고, 판매거점을 세울 수 없으며, 소송할 수 없고, 직접 조정에 접촉할 수 없다.
  • 모든 무역은 '상사(賞賜)논리"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며, 시장조절매커니즘은 완전히 결핍되어 있다.

이런 고도의 봉쇄되고, 권력지향적이며 국가가 독점하는 통상제도는 근본적으로 글로벌자본주의국가의 거래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국의 시장역량과 행정효율은 전혀 중국에서 시전될 수 없었다.

3.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관세자주권은 왜 청나라의 궤멸을 대표하는가?

아편전쟁이후, 청나라조정은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근대불평등조약'이다.

왜 불평등한다. 겉으로 보면, 배상, 영토할양, 통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 관세자주권상실: 모든 수입화물에 대한 세율을 영국측과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 영사재판권인정: 영국인은 중국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중국법정의 재판을 받지 않는다. 영국영사가 재판한다.
  • 최혜국대우부여: 영국은 모든 통상권익을 획득했고, 자동으로 다른 열강에도 개방된다.-

이런 제도적 안배는 현대국제법과 주권국가규료의 통상적인 매커니즘이다.다만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권위의 와해"이다.

왜 그런가? 대청제국은 현대적의미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종의 "황권-신민-조공"의 등급을 지닌 세계였다. 그것은 외국인을 '평등한 주체'로 보지 않았고, 더더구나 '법률평등'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은 '정의(正義)'가 아니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현대(現代)'가 아니어서 패배한 것이다.

만일 서방의 요구가 중국의 이익과 충돌되면, 그것은 만청통치자의 이익과 충돌되는 것이다; 만일 굴육당한다면 그것은 도광제, 함풍제의 굴욕인 것이다.

보통민중에 있어서, 아편전쟁의 총포성은 바로 철옥창호를 깨부수고, 수백년간의 족쇄에서 벗어나, 진정한 현대문명으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3.4 영국은 '무엇'을 얻었는가? 청나라는 '무엇'을 빼앗겼는가?

영국이 얻은 것은 시장만이 아니다. 더더욱 청나라와 전혀 겸용되지 않는 글로벌질서의 시범운영체계이다.

  • 오구통상에 조계를 설립하고, 은행, 전보, 우정을 발전시킨다
  • 한구, 천진, 상해등지에서 상품과 자본이 유통된다.
  • 근대적 의미의 법률, 공상 및 외환제도의 초기형태가 건립된다.

그리고 청나라가 잃은 것은 돈과 주권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해석권과 참여권을 잃었다.

그후, 중국은 더 이상 '천조체제'로 세계를 해석할 수 없었고, 반드시 '세계체제'로 자신을 다시 인식해야 했다.

이번 충돌은 겉으로 보기에는 '영국이 쳐들어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청나라가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4. 압축된 역사: 우리는 어떻게 아편전쟁을 기술해야 하는가?

아편전쟁은 복잡하고, 글로벌화 초기단계의 중대한 제도충돌이다. 다만 중국어에서 그것은 자주 '한차례의 침략전쟁', '한차례의 만약전쟁' 내지 '서방식민주의의 야만성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치부된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교과서에서 영화드라마까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술방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덤핑하기 위하여, 중국인민의 견결한 반대하에 전쟁을 일으켰다. 최종적으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상권욕국의 <남경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의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굴역적인 역정이 시작되었다."

이런 서술은 당연히 그 역사적 기초가 있다. 또한 몇 대에 걸쳐 민족감정을 분발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있다:

이 역사는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압축되어 감정화된 것이지, 이성적인 구조분석이 아니다

그것은 압축되어 '흑백의 옳고 그른' 논리가 되었고, 제도와 문명의 만남과 충돌이 아니게 된다.

아편은 무서울 것이 없다; 진정 무서운 것은 중국인의 사상아편, 정신아편이다! 사로(思蘆)는 이렇게 반성한 바 있다: "함풍제는 체결한 조약을 준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제2차아편전쟁의 원인이다. 함풍제는 이렇게 말했다: '자고이래로 맹세는 믿을 수 없다. 그건 원래 권모술수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계약파기전쟁"이 된다. 계속하여 계약을 어기고, 얻어터지고, 다시 새로 계약을 맺고, 다시 위약하고, 다시 얻어터지는 순환 속에서, 갈수록 심하게 얻어터지게 되고, 조약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제2차아편전쟁은 설명한다. 낙후되었다고 하여 반드시 얻어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국제규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반드시 얻어터지게 된다.

4.1 "아편"은 가장 손쉬운 정서동원도구이다.

왜 이 역사는 처음부터 '아편전쟁'이라고 명명되었을까? 원인은 그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아편은 일체의 죄악과 치욕의 상징이다. 신체를 해치고, 의지를 무너뜨리며, 국민은 노예화한다. '만악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것이다. '아편'이라는 핵심용어를 통하여 신속히 정치적동원을 이룰 수 있다.

  • 민족피해자심리를 강화한다.
  • 제도낙후의 구조적인 원인을 가린다.
  • 영중간의 복잡다단한 제도와 경제관계를 모호하게 흐린다.

다만, 이런 도덕화된 간략한 기술은 우리가 진정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근대세계질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박탈해버린다.

위안웨이스 교수는 <현대화와 중국의 역사교과서문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는 '국치'로 청소년을 교육했다. 그러나, 몇십년을 교육했지만, 학생은 여전히 무엇이 주권이고, 무엇이 국가이고, 무엇이 현대법률질서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의 주류사상과 사고는 여전히 만청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만일 근 200년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면, 진정한 현대문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겪어온 피눈물, 곡절, 고통은 모조리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반복, 재반복, 재재반복의 구덩이일 뿐이다. 한차례 한 차례 우리는 다시 뛰어들게 되는...

4.2 역사학계의 반성: 도덕정서로 제도진상을 가리지 말라

2000년대이래, 중국의 역사학계는 아편전쟁에 대한 기술에 대해 반성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대표인물은 다음과 같다:

위안웨이스: 국가제도건설과 국제규칙인식의 악도에서 근대사를 새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친후이: '낙후되면 얻어맏는다'는 논리로 제도실패의 책임을 가리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중텐: <간명중화사>에서 '피침략이 일체문제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고 언급한다.

쉬쭤윈(許倬雲), 허빙디(何炳棣), 마오하이젠(茅海建): 서로 다른 각도에서 '아편전쟁은 질서충돌이다'라고 이해한다.

이들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는 '아편전쟁을 기억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실패를 '열강침략'에 돌린다면, 손쉽게 가장 추궁해야할 문제들을 회피하게 된다:

  • 왜 아편은 시장에 널리 판매되지만, 공업제품은 그렇지 못했을까?
  • 왜 백은이 유입될 때는 기꺼이 받아들이다가 아편으로 백은이 유출되자 '국치'라고 하는가
  • 왜 영국은 동인도회사, 황실함대, 외교사신단을 조직할 수 있었고, 중국은 여전히 내무부가 외국오랑캐사무를 관리했을까?

바로 친후이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아편전쟁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도태한 것이다."

4.3 감정적인 기술의 결과: 대외원한, 대내맹신

압축된 역사서술은 선전과 같다. 장기적으로 계속되면 두 가지 심각한 악영향이 나타난다:

첫째, 대외적으로: 원한이 이성을 대체한다.

우리는 손쉽게 모든 충돌을 간략하게 '침략과 피침략'으로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도문제는 보지 못하고, 국제규칙이 어떻게 건립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현행질서에 더욱 잘 진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게 된다.

둘째, 대내적으로 폐쇄체제는 반성을 하지 않는다.

문제를 '외적으로 인한 것'이라고 귀결시키면 체제구조, 통치모델, 경제정책을 되돌아볼 필요가 없다. 더더구나 체제적인 실패의 교훈을 인정할 필요도 없다.

아편전쟁은 원래 현대중국이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멋진 첫번째 수업이 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계속되는 세뇌를 통해 그것을 '봉쇄정서체제의 강화제'로 사용하게 된다.

결과는 이러하다:

  • 영원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얘기한다.
  • 영원히 '외적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하게 된다.
  • 영원히 제도개혁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한다.

5. 오늘날의 우리: 또 다른 '아편전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사는 간단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항상 보충하는 말이 따른다:

만일 1840년의 아편전쟁이 '영중무역전'이라면 그 실패의 근원은 제도의 불용과 무역의 봉쇄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중간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조적충돌은 제2차 '제도적 무역전쟁'이 아닐까?

아편전쟁은 시장진입, 무역공정, 국제질서에 대한 정면충돌이다. 오늘날의 미중무역전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불안한 비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수출만 원하고, 수입은 원치 않는다", "자유무역만 생각하고, 자유 자체는 거절한다", "세계에서 이익을 취할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이익만 원하지, 대등은 원치 않는다"는 청나라의 권력귀족경제의 무역책략을 재현하고 있지 않는가?

5.1 과거에는 차, 비단, 자기였는데, 오늘날에는 반도체, 태양광, 전기자동차이다.

1840년이전에 중국은 기실 영국의 '세계공장'이었다. 계속하여 서방에 차, 자기, 비단을 수출했다. 다만 엄격하게 외국제품이 중국국내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제한했다.

2020년대, 중국은 여전히 세계최대의 제조국이다. 태양광, 희토류, 배터리, 전기자동차등 핵심산업체인을 주도한다. 다만 외자 특히 미국자본의 금융, 데이타, 기술표준, 심사제도등 분야에 진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설치해 두고 있다.

  • 과거의 "십삼행"은 오늘날의 "진입블랙리스트"로 바뀌었다;
  • 과거의 "중간상제도"는 오늘날의 "홍색공급체인"으로 바뀌었다;
  • 과거의 "폐관쇄국"은 오늘날의 "네트워크주권"과 "내순환"전략으로 바뀌었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우리는 겉으로는 강대한 생산능력, 거대한 시장, 완전한 공급체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서로 같은 점이라면, 중국은 여전히 제도적 의미에서의 '자유시장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가 백은의 축적으로 '성세의 허상'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날의 중국은 흑자의 누적으로 '숫자번영'을 얻었다. 그러나 일단 글로벌체제가 균형을 잃고, 외부수요가 단절되면, 하층구조는 철저히 약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5.2 마중간 구조적충돌은 '무역마찰'이 아니라, '제도적 관계단절'

트럼프 1.0에서 바이든, 그리고 다시 트럼프 2.0에 이르기까지 미국정부의 대중정책은 스타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축'에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 2018년 미중무역전이 정식으로 발발한 이래 미국은 중국에 징벌적관세를 징수하고 있다.
  • 2025년에 이르러 트럼프는 '대등관세원칙'을 내놓으며 네가 우리에게 얼마를 수출하면, 우리도 너희에게 얼마를 수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 다시 현재 미국은 정식으로 관세전을 전면제도화했고, 중국상품에 145%의 추가관세를 징수하고 있다.

이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경선을 위한 조작'도 아니다. '첫째가 둘째를 질투하는' 소위 투키디데스함정도 아니다. 오히려 고객(전세계최대의 소비시장)이 상인(글로벌최대제조국)에 대해 내놓은 구조적문책이다:

- 너는 한편으로 규칙의 이익을 모두 가져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규칙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다.

- 너는 한편으로 글로벌공급체인의 이익을 누리면서, 다른 한ㅍ녀으로 체제철막을 쌓을 수는 없다.

- 권력귀족자본으로 시장을 조종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유주의방식으로 시장을 너에게 개방해달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건 당시 영국과 같은 구조에 대한 싸움이다:

영국은 말했다: "우리에게 개방된 시장을 만들어라" 청나라는 말했다: "너는 조공을 바치러 오면 된다."

미국이 말했다: "우리에게 대등호혜를 실현시켜달라" 중국은 말한다: "중국특색을 존중해달라."

이런 대화구조는 근본적으로 대칭되지 않는다. 협상은 영원히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된다. 제도적인 관계단절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5.3 오늘날의 "아편"은 무엇인가?

역사는 간단히 복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매커니즘은 재연될 수 있다.

1840년, 아편은 봉쇄체계를 파괴하는 돌파구였다.

2020년대, '아편'에 유사한 대체품이 나타났다:

  • 중국은 대량의 '녹색공업상품'을 구미에 수출하지만, 외자가 현지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 AI, 반도체, 통신, SNS영역에서 "수입제한, 수출독점"을 지속한다.
  • 대내적으로 행정관제, 보조금정책, 가격통제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 '자유시장지위'를 누린다.

이건 기실 오늘날의 '제도적 아편'이다. 비대칭체제에 의존하여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고, 제도투명성과 권리교환을 거절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런 모델은 글로벌 다른 국가에 '제도적 방화벽'을 설치하게 만든다. 영국이 최종적으로 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미국오 오늘날 어쩔 수 없이 장벽을 설치하는 것이다.

네가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네가 불투명하고, 비대칭적이고, 부자유스럽고, 그저 자신의 '특색'만 강조하고, 다른 사람도 기실 사람이라든지, 사람은 평등하다든지, 무역은 대등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지속가능한 경제무역교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6. 결론: 아편전쟁은 이성적인 종결이다. 원한으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각성해야 하는 것이다.

아편전쟁은 지금으로부터 근 200년전에 발생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고대의 굴욕사'가 아니라, 아직 미완성인 역사이다. 여전히 그 구조와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도의 극본이다.

중국인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편전쟁'을 가슴아파하고, 많은 사람은 그것을 '영국의 죄악', '마약의 수치'라고 말하며, '제국주의침략'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많지 않다.

  • 왜 우리는 차를 수출할 수 있는데, 나일론은 수입할 수 없었을까?
  • 왜 우리는 대등통상을 거절하면서도, 장기적인 흑자는 갈망했을까?
  •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양무운동'의 영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시종 현대국가제도는 건설할 수 없었을까?

만일 우리가 시종 '피침략'의 각도에서 역사를 서술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감정소모만 할 뿐이고, '우리가 그때 세계체제에 진입할 하드코어제도여건을 갖추고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주 이렇게 얘기한다: 현대화를 함에 있어서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만 진정한 '근본'은 전통에 있지 않고, 원한을 기억하는데 있지 않고, 인심에 있다; 진실되고 선량한 반성에 있다.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개혁하는데 있다.

바로 위안웨이스교수가 말한 것처럼

"역사는 복수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기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친후이 교수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처럼,

"아편전쟁은 서방이 중국을 패배시킨 것이 아니라, 현대가 전현대를 패배시킨 것이다."

우리는 현대, 전현대의 구분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아편전쟁은 서방이 중국을 패배시킨 것이 아니라, 선진이 낙후를 패배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만일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더 이상 역사의 심연에 빠지길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의식해야 한다:

자유무역의 기본은 값싼 물건에 있지 않고, 제도의 겸용에 있다.

글로벌질서의 열쇠는 국력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통치논리에 있다.

진정한 강대국은 수출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공동으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자유롭지 않은 국가는 오랫동안 자유무역의 이익을 누릴 수 없다. 자유야말로 자유무역의 입장권이다.

중국의 엘리트 그리고 전체 중화민족은 반드시 양심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역사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계속하여 봉쇄체제, 권력귀족자본, 국가주도를 견지하며 오직 '승리'를 위한 설계를 유지하고, 정의의 '반문'을 허용하제 않는 경제강국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제도투명, 계약정신, 개방시장으로 향하여, 글로벌신뢰체계에서 유력하고 평등한 참여자가 될 것인가?

한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편전쟁의 종결은 '영국이 중국을 패배시킨 것"이 아니라, 중국이 처음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던 현대문명세계를 강제로 직면하게 된 것이다.

미중무역전의 향배는 중국이 제2차로 글로벌질서에 대해 선택을 해야할 시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권', '발전', '도로자신'이라는 말로 제도개혁을 회피하고 있다!

'문명자각', '제도연결'로 현대화의 심수구(深水區)를 열 수 있을까?

기억해야 한다:

자유무역은 영원히 자유스럽지 않은 체제에 개방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시장도 불공정한 규칙을 장기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와 개방의 제도야말로 글로벌경제의 통행증이다.

투명, 대등, 법치야말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기본이다.

1840년의 그 문은 이미 포격으로 열려버렸다. 2025년의 그 문을 우리가 어떻게 빠져나갈지 혹은 다시 닫을 것인지는 우리 세대의 운명을 결정할 뿐아니라, 또한 우리 자손이 우리가 완성하지 못한 역사의 숙제를 반복해야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중국본토의 보수수즤자 공자의 말씀을 깊이 새기길 바란다: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

사사로운 의견이 없고,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것도 없고, 고집하는 것도 없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도 없다.

자의(自意), 자대(自大), 자아(自我), 고집을 내려놓고, 진정 중화민족의 천추만대의 자손번성, 문화창성을 위해 양심으로부터 잘 생각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