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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전씨대제(田氏代齊)": 300년의 시간을 들여 한 나라를 빼앗은 정치가족...

by 중은우시 2024. 12. 9.

글: 온백령(溫伯陵)

1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는 아주 특이한 정치가족이 출현했다.

그들은 조상이 황음하여 제나라로 망명했고, 제나라의 건국에는 거의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약간의 공을 쌓은 후, 제나라의 정치적갈등을 이용하여, 계속하여 고위층에서 정면을 일으키고, 하층에서는 인심을 매수하여, 결국 몇대에 걸쳐 제나라를 빈털털이로 만들고, 구점작소(鳩占鵲巢)를 실현한다. 그들은 춘추버전의 사마의(司馬懿)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족이 바로 제나라의 전씨(田氏)이다. 그들이 한 일은 바로 "전씨대제(田氏代齊)"이다.

전씨는 진(陳)나라에서 나왔으니, 진나라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상고시대 요(堯)임금이 나이가 들어 선양원칙에 따라 순(舜)임금에게 제위를 넘긴다. 순임금은 수십년간 천자로 있다가 다시 우(禹)임금에게 넘기고, 순의 아들 상균(商均)은 우의 보살핌을 받아 봉국(封國)을 하나 얻는다.

그후 우의 아들 사계(姒啓)가 하(夏)왕조를 건립하고, 상탕(商湯)은 다시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상(商)왕조를 건립한다. 양족은 모두 천여년간 나라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순의 후예의 봉국은 시국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며 때로는 끊기고 때로는 이어지며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과 같았다.

주무왕(周武王)이 상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주왕조를 건립한다. 주무왕 희발(姬發)은 순의 후예 규만(嬀滿)을 찾아가 그를 진(陳)의 땅에 봉하며, 순임금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다. 순의 후예의 봉국은 이렇게 하여 다시 확정된다.

이 순임금의 후예가 받은 봉국이 바로 진나라이다.

규만이 진나라를 건립한 후, 신공서우(申公犀侯), 상공고양(相公皋羊), 효공돌(孝公突), 신공어융(愼公圉戎)등으로 작위가 이어진다. 수백년동안 질서있게 전승되었다. 진려공(陳厲公) 규타(嬀佗)는 진나라의 제13대 국군이 된다.

진려공 규타의 모친이 채(蔡)나라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즉위했을 때, 재나라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진져공 규타도 채나라여자를 맞이하며, 정략결혼의 방식으로 진, 채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이어간다.

문제는 진려공이 취한 채나라여자가 양가규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진나라로 시집오기 전에, 이 채나라여자는 채나라의 미소년과 음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진려공과 혼인한 이후에도 그들은 관계를 철저히 끊지 않았다. 채나라여자는 자주 채나라로 돌아갔고, 옛애인과 정을 풀었다. 그리고 진려공은 채나라의 도움이 필요하여 그것을 심하게 추궁하지는 못하고, 직접 채나라로 찾아가서 그 채나라여자를 데려와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사기.진기세가(陳杞世家)>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공취채녀(厲公取蔡女), 채녀여채인란(蔡女與蔡人亂), 여공수여채음(厲公數如蔡淫)"

이렇게 7년이 지났다. 진려공치하의 진나라는 혼란상태였다. 그리하여 그의 형인 진환공(陳桓公)의 아들인 공자약(公子躍), 공자림(公子林), 공자저구(公子杵臼)가 거병하여 진려공을 죽인다. 형제 셋은 차례로 진나라의 국군에 오른다. 역사에서는 진리공(陳利公), 진장공(陳莊公), 진선공(陳宣公)이라 부른다.

진려공 규타가 죽은 후, 그는 아들을 하나 남긴다. 이름은 공자완(公子完)이다.

참초제근(斬草除根), 풀을 제거할 때는 뿌리까지 뽑으라는 정치논리에 따르면, 공자완이 성인까지 성장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진나라 국군은 공자완을 무시해서인지 그를 진나라에 살려두었다. 그리고 공자완이 진선공의 태자 어구(御寇)와 친밀하게 지내도록 놔두었고, 서로간에 사적인 감정이 쌓이게 된다.

이렇게 계속되면, 태자 어구가 즉위할 것이고, 그러면 공자완도 고위직에 앉아서 앞날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선공은 말년에 득의만면하여 총애하는 첩이 낳은 공자관(公子款)을 매우 총애한다. 태자를 교체하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672년, 진선공은 직접 태자 어구를 죽여서 어린 서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둔다.

공자완은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음 속으로 진려공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는 정치적으로 고립무원이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태자어구의 친구라는 신분이라면 진선공이 태자 어구의 세력을 제거할 때 화를 면하기 어렵겠다고 여긴다.

이런 배경하에서, 공자완은 제나라로 도망쳐서 제환공(齊桓公)에 의탁한다.

그때 제환공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패업으로 혼란된 천하질서를 바로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제후들의 지지가 아주 필요했다. 진나라의 공자완이 자신에게 투항해 오자, 제환공은 아주 기뻐하면서, 제환공은 공자완은 제나라의 정경(正卿)에 임명한다.

그러나, 공자완은 거절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저는 고국을 떠나 도망쳐온 사람입니다. 제나라의 정치적 비호를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만일 다시 제나라의 고관이 되어, 제나라의 녹봉을 받게 되면, 그건 시무를 모르는 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환공은 그 모습을 보자, 차선책으로 공자완을 공정(工正)에 임명한다. 이는 제나라의 장인(匠人), 공정(工程), 염전, 어로, 방직등 수공업을 관장한다. 후세의 공부상서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에서 온 공자완은 이렇게 제나라에 정착하게 된다.

아마도 봉지를 받아서 공자완은 자신을 "진완(陳完)" 혹은 "전완(田完)"이라고 스스로 칭한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에서는 "진"이라고 했고, <자치통감>과 <사기>에서는 "전"이라고 했다.

"전씨대제"라는 습관적인 용어를 감안해서, 여기에서는 "전"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2

일찌기 진나라에 있을 때, 전완의 처 의씨(懿氏)는 점을 보았는데, 괘상이 "대길(大吉)"이라고 나왔다. 괘사는 "봉황우비(鳳凰于飛), 화명장장(和鳴鏘鏘), 유규지후(有嬀之後), 장육우처(將育于妻). 오세기창(五世其昌), 병우정경(幷于正卿), 팔세지후(八世之後), 막지여경(莫之與京)"

규(嬀)는 순임금의 후예로 진나라의 공자이고,

강(姜)은 염제의 후예로 강씨는 제나라를 건국했다.

'오세기창'은 5대이후에 진나라의 공자는 제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제나라의 최고위관리가 된다는 뜻이다.

'막지여경'은 거세무쌍을 아무도 비견할 자가 없다는 뜻이다.

비록 전완이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도망쳐 왔지만, 의씨의 괘사는 일단 들어맞았다. 그러나 막 제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전완은 안분수례(安分守禮), 분수에 맞게 행동하고, 예를 지켰다.

한번은 제환공이 궁실을 벗어나, 직접 전완의 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이를 통해 전완이라는 망명한 공자에 대한 총애를 나타냈고, 외부에 제나라는 인재를 받아들이고, 다른 나라의 공자들을 후대한다는 모습을 보였다. 제환공과 전완은 서로 죽이 잘 맞았으며, 금방 황혼이 되었다.

제환공은 술자리가 끝내고 싶지 않아 전완에게 명령한다: "등을 켜라. 계속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라!"

전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복기주(臣卜其晝), 미복기야(未卜其夜), 불감(不敢)" 낮에 국군을 모시고 술을 마시는 것은 직분내의 일이지만, 저녁은 군군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므로 감히 국군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완은 제환공의 밤새 술마시고 즐기자는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법에 맞는다. 제환공으로서는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연을 파하고 궁으로 돌아간다.

이 일 때문에, 전완은 제나라의 귀족들 사이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이는 전완가족의 제나라에서의 관료로서의 성공하는데 기초가 된다.

바꾸어 말해서, "전완은 예법을 따르고, 국군을 존중하고, 신하로서의 예의범절을 지킨다"는 것으로 제나라에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백년이후, 전씨집안의 가풍은 완전히 바뀐다. 그들은 안분수례(安分守禮)하는 군자(君子)가족에서 응시낭고(鷹視狼顧)의 권신(權臣)가족으로 바뀐다.

기원전548년, 제나라의 권신 최저(崔杼)가 제장공(齊莊公)을 주살하고, 제나라의 군정대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는 "최저시기군(崔杼弑其君)"의 전고를 남긴다. 2년후, 최씨자손은 후계자들간의 다툼으로 내란이 일어나, 경봉(慶封)이 병력을 일으켜 최씨일족을 도륙하고, 최저를 자살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제나라의 군정대권을 탈취한다. 이를 "경봉당국(慶封當國)"이라 한다.

다만, 경봉은 제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

경봉은 음주와 사냥을 좋아했고, 제나라의 최고권력을 차지한 후, 실제업무는 아들 경사(慶舍)에게 맡긴다. 그 자신은 총애하는 신하 노포폐(盧蒲嬖)와 한패가 되어 매일 취생몽사한다. 더욱 생활을 즐기기 위해, 경봉은 가산, 술, 처첩을 모두 노포폐의 집으로 옮겨서 두 집을 하나로 합쳐서 여자들도 공유한다.

이렇게 되니, 제나라는 더욱 지저분해진다. 그리하여 야심을 가진 사람은 경봉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게 된다.

전문자(田文子) 전수무(田須无)는 전완의 증손자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국면을 보고, 전씨집안의 앞날을 매우 걱정한다. 그리하여 아들 전무우(田无宇)에게 말한다: "제나라에 앞으로 대란이 발생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전무우는 별달리 생각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득경씨지목백거어장(得慶氏之木百車於莊)"

목(木)은 집을 짓는 재료이다. 백거목(百車木)은 호화저택을 지을 수 있다.

장(莊)은 임치(臨淄)의 번화한 거리고, 경봉의 주소지이다.

전무우의 뜻은 대란은 겁날 것이 없다. 대란이 없으면 우리에게 기회가 없다. 제나라가 일단 대란에 빠지면, 우리가 경봉을 대체하여 호화저택을 짓고 제나라의 대권을 장악하면 된다는 것이다.

전무우의 말을 듣고, 전수무는 말한다: "가신수야이(可愼守也已)". 얻으면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수무와 전무우 부자의 대화에서 둘은 모두 야심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545년, 전씨에게 기회가 온다.

그해 10월, 경봉이 내성(萊城)으로 사냥을 떠난다. 전무우가 시종을 따라서 내성으로 간다. 경봉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경봉이 임치를 떠나는 것은 손을 쓸 아주 좋은 기회이다. 그리하여, 경봉이 출발한지 며칠도 되지 않아, 전수무는 전무우에게 편지를 보낸다. 모친이 중병에 걸렸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전무우는 서신을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온다. 도중에 임치로 돌아오는 길의 선박, 교량을 모조리 파괴해버린다.

전수무와 전무우가 이렇게 한 것은 정치적 민감도가 아주 높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봉이 성을 나가면 제나라에 대란이 발생할 것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다른 가족들과 연락하여 '경봉을 주살하기로' 의견합의를 이루었을 것이다.

전무우가 임치로 돌아온 후, 난씨(欒氏), 고씨(高氏), 포씨(鮑氏), 전씨(田氏)는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정변을 일으켜 경봉의 세력을 제거한다. 그리고 제경공(齊景公)을 궁으로 다시 모셔오고, 정변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경봉은 사냥이 끝난 후 임치로 돌아가려는데 이미 상황이 바뀌어 오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차례로 노(魯)나라 오(吳)나라로 도망친다.

경봉을 축출하는 정변을 주도한 세력중 하나인 전씨는 정식으로 전완의 군자의 모습을 버리고, 제나라의 권력중심으로 들어간다.

3

전씨는 경봉축출에 참여한 후, 권력탈취의 중요한 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후 전씨는 인심을 매수하여, 이미 취득한 승리의 과실을 공고히 한다.

그때 제나라의 경제는 혼란에 빠지고,인민들의 부담은 아주 무거웠다.

<춘추좌씨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민참기력(民參其力), 이입어공(二入於公), 이의식기일(而衣食其一). 공취후준(公聚朽蠢), 이삼노동뇌(而三老凍餒), 국지제시(國之諸市), 구천용귀(屨賤踊貴)."

백성들의 수입중 2/3는 국가에 세금으로 내고, 1/3을 자신에게 남긴다. 제나라의 국고는 양식이 넘쳐나서 썩을 정도인데, 수입이 적은 노인, 가난뱅이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다. 그렇지만, 제나라의 공실과 정부는 여전히 만족을 몰랐다. 계속하여 형벌의 강도를 강화하여 많은 백성들이 벌을 받아 장애인이 되었다. 제나라의 시장에는 신발 가격이 내려가고, 지팡이 가격이 올라가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제나라의 공실과 정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전씨에게는 기회가 온 것이다.

전씨는 제나라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무상으로 제나라백성들에게 양식을 보내준다.

제나라의 계량단위는 5가지이다. 승(升), 두(豆), 구(區), 부(釜), 종(鍾). 양식을 통계낼 때, 4승이 1두이고, 4두가 1구이며, 4구가 1부, 10부가 1종이다. 제나라의 1종은 640승이다. 다만 전씨는 이렇게 규정한다. 5승이 1두, 5두가 1구, 5구가 1부, 10부가 1종으로. 그렇게 되면 전씨의 1종은 1250승이다.

이렇게 개혁을 하자, 제나라의 계량단위와 전씨의 계량단위간에 큰 차이가 나타난다.

전씨는 농민들에게 대출을 해줄 때, 전씨의 계량단위를 쓴다. 그리고 농민들이 상환할 때는 제나라의 계량단위를 쓴다. 이렇게 되니, 농민들이 전씨에게 1종을 빌리면, 그 자리에서 610승이 남게 된다. 돈을 많이 빌릴수록 이익이 커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전씨에게 모두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제나라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것이다.

제나라의 관례에 따르면, 농민이 산에서 나무를 베거나, 어민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도 세금을 내야 한다. 나무를 산 아래로 운반하거나, 해산물을 해안으로 내려놓을 때도 세금을 내야 한다. 다시 산아래나 해안에서 시장으로 운반할 때도 세금을 내야 한다. 그렇게 누적되다보면 상업의 비용이 아주 높아진다.

전씨의 규정에 따르면, 전씨와 합작하면 여하한 추가비용도 납부하지 않을 수 있다. 산에서 캐는 나무의 가치가 얼마이든, 시장으로 운반해서 얼마에 팔든, 바다에서 잡을 해산물이 얼마어치이건, 시장에서 얼마의 가격에 팔든지간에.

그 중간의 운송비용은 전씨집안에서 돈을 내서 보조해준다.

이렇게 되니, 농민들과 어민들의 비용이 증가되지 않고, 가격에서 우세를 가지고 대량으로 물품을 시장애 내놓을 수 있다. 구매자들도 비용을 추가로 들이지 않고,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전씨집안에서 이익을 넘겨주는 행위를 함에 따라, 제나라의 백성들은 전씨와의 관계가 아주 좋아진다. 현신 안자(晏子)까지도 "제나라가 진씨의 것이 될 줄은 몰랐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럼 누가 이런 업무를 조종했을까?

<사기.전경중완세가>에 따르면, 이들 업무는 전무우의 차암인 전걸(田乞)이 처리했다. <춘추좌씨전>의 기록에 따르면, 안자가 제나라가 전씨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감탄한 것은 전씨일가가 경봉을 축출한지 겨우 6년이 지난 후였다.

6년이라는 시간은 확실히 전씨집안의 종주(宗主)가 세번 교체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렇게 인심을 얻는 업무를 진행한 사람은 전씨의 제5대종주 전환자(田桓子) 전무우일 것이다.

한편으로 부친으로 하여금 권력쟁탈을 위한 결심을 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개인이익을 내놓아 인심을 샀다. 전무우는 실로 전씨굴기의 핵심인물이다.

4

전왕이 개창한 후, 전무수는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전무우는 인심을 매수했다. 이 세 가지는 전씨를 제나라의 최고가문으로 만들어준다.

다만 제나라의 강산사직을 찬탈하기에는 겨우 '제국강족(齊國强族)'이라는 신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후, 전씨는 연속하여 3번의 정변을 일으켜, 제나라의 다른 강족들을 모조리 주살한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독보적인 정치가족이 된다. 그리고 찬달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진정으로 다진다.

첫번째 정변은 전무우가 일으킨 것이다.

전무우가 전씨종주로 있을 때, 제혜공(齊惠公)의 후예인 난씨, 고씨의 실력이 강력하여, 전씨, 포씨와 비견할 수 있었다. 다만 경봉과 마찬가지로, 난씨와 고씨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술을 따르는 부인의 말을 쉽게 믿어, 자신의 주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난씨와 고씨는 전씨와 포씨를 매우 질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씨, 포씨 두 일족을 죽이고 그들의 가산을 빼앗아 자신들의 힘을 더욱 키우고자 했다.

권력을 잡았으면서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 단결하지 않으면 쉽게 적을 만들게 된다.이런 배경하에서 난씨, 고씨는 제나라조야의 공적이 된다.

기원전532년 여름, 누군가 전무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시(欒施), 고강(高疆)이 병력을 이끌고 전씨, 포씨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포문자(鮑文子) 포국(鮑國)에게도 얘기한다.

그 사람이 알려주는 소식을 듣고 전무우와 포국은 서둘러 집안의 사병들에게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게 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게 한다.

준비를 마친 후, 전무우는 포국에게 가서 말한다: "이 소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만일 우리가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분명 우리를 치러 올 것이다. 그들을 기다리느니 우리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전무우의 말투를 보면, 소식을 전한 사람도 아마 전무우가 안배한 인물일 것이다. 목적은 포국으로 하여금 생사존망의 결투를 벌일 결심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함께 난시와 고강을 토벌하는 것이다.

과연 포국은 전무우의 말을 듣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겨 전무우와 함께 거병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전씨, 포씨와 난씨, 고씨간의 4로의 대군이 임치 직문(稷門)에서 혼전이 벌어진다. 난시와 고강이 대패하고, 임치성 안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패배하여 임치성 동남쪽의 녹문(鹿門)으로 물러나나, 다시 패배한다.

난시와 고강은 3전3패를 했고, 전무우와 포국은 3전 3승을 거둔다. 그리하여 난시와 고강은 노나라로 도망치고, 전무우와 포국은 난씨, 고씨집안의 세력, 토지, 재산 및 인구를 나눠가진다.

'

정변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것은 제나라 조야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기 힘들다.

정치적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하여, 전무우는 고강의 부친 고채(高虿)가 축출한 공자산(公子山), 공자상(公子商), 공자주(公子周)를 불러들이고, 난시가 축출한 공자성(公子誠), 공자공(公子工), 공손첩(公孫捷)을 불러들인다. 이전에 식읍이 있던 사람은 식읍을 돌려주고, 식읍이 없던 사람은 전무우가 자신의 식업중 일부를 떼어준다.

제나라 종실인원들에게 잘 대해주고, 난시와 고강의 정적들을 불러들인다.

이런 조치로 전무우는 제나라 조야의 칭찬을 받는다. 그야말로 제나라의 대들보라고 여기게 된다. 심지어 제경공의 모친 목맹희(穆孟姬)는 깊이 감동받아 굳이 우겨서 고당(高唐)을 전무우에게 내리고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한다.

정변은 분명히 전무우가 일으켰는데, 제나라종실은 자신들이 최대의 수혜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백성들도 전무우를 제나라의 충신으로 여긴다. 정변을 이 정도로 실행하는 것을 보면 전무우의 정치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정변은 전무우의 차남인 전희자(田僖子) 전걸(田乞)이 일으켰다.

기원전490년, 58년간 재위한 제경공이 사망한다. 고소자(高昭子) 고장(高張), 국혜자(國惠子) 국하(國夏)는 공자도(公子荼)를 옹립한 공로로 제나라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공자양생(公子陽生), 공자가(公子嘉)등은 다른 제후국으로 망명한다.

옹립하였다는 이유로 권력을 장악한 데 대하여, 전씨종주 전걸은 불만이 있었다.

피동적인 정치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걸은 양면파가 된다. 고장, 국하와 여러 신하들간의 갈등을 조장시킨다.

한편으로, 전걸은 고장과 국하를 따르는 것처럼 하면서, 기회를 틈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나라 신하들은 고집이 세서 모두 말하기를 고, 국씨가 권력을 잡으면 우리를 핍박할 테니, 차라리 우리가 그들을 제거하자고 말한다. 그러니, 최선의 전략은 그대가 먼저 손을 써서 제나라 신하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걸은 고장과 국하의 신임을 이용하여, 제나라 대부(大夫)의 관직을 얻고, 전걸을 직무의 편의를 이용하여 다시 제나라신하들에게 말한다: 고장과 국하가 일찌기 말하기를 국가가 어려운 것은 제경공이 여러 신하들을 총애하기 때문이니, 나라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여러 신하들을 제거해야 한다. 지금 그들은 이미 계획을 사 세워놓았고,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늦을 것이다.

이런 양면파의 수단으로 전걸은 고장,국하와 제나라 신하들과의 갈등을 조장하는데 성공했다.

기원전489년 6월 전걸, 포목(鮑牧)과 제나라 여러 신하들이 거병하여 궁으로 쳐들어가고, 제나라국군 공자도를 확보하고, 정권의 합법성을 취득한다. 그후 임치로 쳐들어가, 고장과 국하의 사병을 격파하고, 정변의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하여 제나라의 조정을 장악한다.

그후, 전걸은 정변주도자의 신분으로 노나라에서 공자양생을 모셔와 제나라의 국군으로 모신다. 그가 제도공(齊悼公)이다.

정변을 주도하여, 고씨, 국씨 양대 가족을 제거하고, 제나라의 국군을 폐위시키고 새로 옹립한다. 그리하여 전걸은 제나라의 국상(國上)이 되어, 제나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 된다.

<사기.전경중완세가>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제도공이 즉위하자, 전걸은 상이 되어 제나라의 정치를 장악한다."

세번째 정변은 전걸의 아들, 전성자(田成子) 전상(田常)이 일으킨다.

제도공은 4년간 국군으로 있다가 비명에 죽는다. <사기.전경중완세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포목과 제도공은 원한이 있었는데, 제도공을 주살한다. 그러나, <춘추좌씨전>에는 제도공이 국군이 된 다음 해에 핑계를 잡아 포목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결국 제도공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는다.

제도공이후, 그의 아들 제간공(齊簡公)이 즉위하여 국군이 된다. 그에게는 총신이 있었는데, 이름이 감지(闞止)이다.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간공은 군정대권을 감지에게 넘긴다.

이때의 전씨종주는 전성자 전상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전씨는 전걸이 죽고, 전상이 종주에 올라 신구교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제간공의 계획은 기반이 없는 감지를 발탁하여 세력이 커진 전씨를 견제하여 강씨(姜氏)제나라의 운명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간공의 조치에 전씨는 불만이 컸다. 특히 전상은 매번 조정에서 논의할 때마다 긴장감이 돌았다. 자주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전상의 조카인 전앙(田鞅)은 제간공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된다, "진(陳), 감(闞)은 다 가질 수 없습니다. 국군께서 선택하십시오."

제간공의 선택은 선택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씨는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전상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심기가 깊었고, 정적을 주살하려면 서서히 도모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상은 전씨집안내의 방계구성원중 전표(田豹)를 골라서, 그로 하여금, "전씨집안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감지에게 투신하게 한다. 그리고 감지는 전씨세력을 분열시키고 와해시키고 싶어 전표를 받아들여 심복으로 삼는다.

하루는 감지가 전표에게 말한다. 나는 전씨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너를 전씨종주로 삼겠다. 어떠냐?

전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금 위치는 모두 전씨의 방대한 세력때문이고, 만일 전씨집안이 몰락하면 자신이 전씨종주가 되더라도, 감지를 격패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표는 감지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전상에게 이를 알리고, 전상에게 하루빨리 손을 쓰도록 권한다.

481년 5월, 전상등 형제 8명은 병력을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간다. 술을 마시고 즐기던 제간공을 제압하고, 병력을 보내 감지와 그 일당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전상은 제간공을 서주(舒州)로 유배보내고, 다음 달에 죽여버린다. 그리고 제평공(齊平公)을 즉위시키고, 전상이 국상에 오른다.

공자는 전상이 제간공을 주살했다는 말을 듣고, 책상을 치며 일어나, 재삼 노애공에게 출병하여 제나라를 토벌하자고 요청한다. 이를 통해 예법과 군신간의 기강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노애공은 탄식하며 말한다: 노나라의 국력은 제나라만 못하다. 나는 병력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만두자."

노나라는 국력이 약하고,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한다. 유일하게 제나라에 간섭할 수 있는 나라는 진(晋)나라인데, 조(趙), 위(魏), 한(韓), 지(智)등 4경(卿)의 내분으로 동정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하여 전씨는 세 차례의 정변의 승리를 통해 강력한 적수들을 제거하고 제나라의 독보적인 정치가족이 된다.

5

전완이 제나라로 도망쳐온 후, 전상이 제간공을 주살할 때까지 전씨는 8대의 종주를 내려가면서 "8세이후, 막지여경"의 괘사를 이루게 된다.

그후에 전씨는 전과를 공고히 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전성자 전상, 전양자(田襄子) 전반(田盤), 전장자(田莊子) 전백(田白), 전태공(田太公) 전화(田和), 4대에 걸쳐 제나라를 근 90년간 통치한다.

그 동안, 전상은 정변성공의 기초 위에서, 계속 포씨, 안씨(晏氏) 및 제나라 종실의 강력한 인물들을 주살하며, 제나라에서는 여하한 반항의 조짐도 나타나지 않도록 만든다. 그후, 전상은 직무편의를 이용하여, 안평(安平)에서 낭야(瑯琊)에 이러는 광범위한 지역은 전씨의 봉지가 된다.

"전상은 포씨, 안씨, 감지 및 공족중 강력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안평에서 동으로 낭야에 이르는 땅을 제나라에서 나눠받아 스스로의 봉읍으로 삼는다. 봉읍은 제평공의 식읍보다 컸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임치의 동쪽은 교동반도를 포함하여 모두 전씨의 세력범위가 되었고, 제나라를 둘로 나누어 그 중 절반을 전씨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전상은 제나라의 절반을 장악하고, 그의 아들 전양자 전반은 다시 나머지 절반도 점거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씨의 종족형제들을 모두 봉하여, 제나라의 각 도시에서 도읍대부(都邑大夫)가 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착실하게 경영하면서 기원전391년에 이르러, 전씨는 제나라의 모든 면을 완전히 통제한다. 그리하여 전태공 전화는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배보내고, 작은 도시 하나를 식읍으로 남겨, 강씨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전화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제나라를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더 이상 제나라 국군을 앞에 내세울 필요조차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되니 '전씨대제'는 오직 한 단계만 남겨두게 된다. 그것은 바로 주왕의 책봉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야 광명정대하게 제나라의 국군이 될 수 있었다.

기원전389년, 전화는 위(魏), 초(楚), 위(衛)를 불러 독택(獨澤)에서 회맹(會盟)을 가진다. 삼국으로 하여금 주안왕(周安王)에게 진언하여 정식으로 전씨를 책봉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자치통감>에는 초나라와 위(衛)나라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나와 있지 않지만, 명확하게 "위문후(魏文侯)가 주왕에게 제후로 봉해줄 것을 청했다"고 적고 있다.

왜냐하면 위(魏)나라 역시 진(晋)나라의 강산을 나눠가진 것이어서, 주안왕과 각제후들이 전씨를 승인하면, 기실 주안왕과 각제후들이 위나라를 승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위문후가 나서자 주안왕도 책봉에 동의한다.

기원전386년, 주안왕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전화를 제나라 국군으로 책봉한다. "최초로 제나라의 대부 전화를 제후로 명했다."

다시 7년이 지나, 제강공이 죽고, 아들이 없자, 그의 해번 소도시는 후계자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강씨제국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도시조차 전씨가 제나라로 흡수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하여, 강태공과 제환공의 후손을 끊어지고, 전씨가 300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결국 구점작소를 실현하게 되었다.

삼가분진과 전씨대제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춘추와 전국을 나누는 분계선으로 보고 있다. 다만 삼가분진과 전씨대제는 성격이 다르다.

조, 위, 한의 삼가의 조상은 모두 먼저 진나라의 국군을 따라 정벌에 나섰고, 진나라의 패업에 피땀을 흘렸다. 비록 삼가분진이 예법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공로'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씨는 제나라의 패업에 아무런 공로도 없다. 그저 음모, 정변, 도륙으로 제나라의 강산사직을 빼앗은 것이다.

만일 삼가분진이 "조위대한(曹魏代漢)"과 비슷하다면, 전씨대제와 비견할 만한 것은 "사마찬조(司馬簒曹)"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서한의 황위를 빼앗은 왕망(王莽)은 기실 전씨(田氏)의 후예이다.

권력탈취는 아마도 이 집안의 내력인 것같다.